‘출제 경향’ 바뀐 국감 ‘한건’ 은 안통한다.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4.09.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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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로보다 정책 대결 …의원들 면학 분우기 진지



 170회 정기국회가 열리기 이틀 전인 9월8일 국회 교육위원회 홍기훈 의원(민주당)은 “외국 비공인 대학에서 가짜 박사 학위를 취득한 교수 87명이 전국 47개 국 · 공립 및 사립 대학에 재직하고 있다”고 충격적인 내용을 발표했다. 홍의원이 발표한 내용은 즉각 일간지와 방송의 머리 기사를 장식하는 성과를 올렸다. 애초에 홍의원측은 이 문제를 이번 정기국회 교육위 국정감사에 ‘터뜨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냄새를 맡은 몇몇 기자가 달려들자, 홍의원측은 반색을 하며 언론의 요구에 따랐다.

 이 한 건으로 홍의원은 국정감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스타 자리를 예약한 셈이 됐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그렇다. 홍의원은 이미 언론을 등에 업은 상태인 데다, 이 여세를 국정감사까지 몰고가겠다는 각오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동료 의원들의 시각이다. 그들은 ‘홍의원이 언론을 이용한게 아니냐’며 결코 곱게 보려 들지 않았다. 즉 큰 뉴스가 쏟아져나오는 국정감사 기간에 터뜨려봐야 언론에 오르내리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홍의원이 몰랐을 리 없다는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시샘이지만, 한편으론 설득력 있는 얘기다. 사실 국정감사 기간에는 의원들이 신문에 이름 석자 내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름 내기’ 경쟁 치열 …외국서 자료 수집도
 “요즘 의원 비서진 대다수의 관심은 이번 국감에서 ‘누가 얼마만한 크기로 신문에 보도 되느냐’에 쏠려 있다. 벌써 국감에서 자기가 모시는 의원을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 머리를 짜내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한 민주당 의원 보좌관의 말이다. 사실 인기를 먹고 사는 의원들이 국정감사에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은 치열하다. 민주당 몇몇 의원은 국감 때 언론에 하루 한번이라도 이름이 오르지 않으면 즉시 비서진에 불호령을 내리기로 유명하다.

 이런 현상은 특히 서울 같은 거대 도시에 지역구를 갖고 있는 의원들 사이에서 심하게 나타난다. 이런 곳은 워낙 주민들의 전출입이 심한 까닭에 평소 지역구를 아무리 뛰어다녀도, 막상 선거 때가 되면 유권자의 절반이 바뀐다고 한다. 텔레비전에 얼굴 한번 비치고 신문에 이름에 이름 석자 나오는 것이 곧 선거운동인 상황에서, 국정감사는 놓칠 수 없는 기회인 것이다.

 반면 농촌이 지역구인 의원은 사정이 다르다. 의정 활동을 열심히 했는데도 ‘저 양반 뽑아줬더니 텔레비전에는 나오는데 지역구에는 코빼기도 안비친다’는 역효과 낳기 때문이다. 민주당 최욱철 의원(강원 명주· 양양)은 “신문에 이름이 나도 유권자들은 모른다. 국정보다는 지역 현안을 쫒아 다니는 게 더 급하다”며 국가적인 문제에 신경 못쓰는 사정을 하소연한다. 이들에게는 국정감사가 지역 미원과 숙원 사업을 관철할 절호의 기회이다.

 정기국회의 백미인 국정감사는 9월28일부터 10월17일까지 이어진다. 국정감사 기간에 여의도에 2개밖에 없는 호텔은 미어터진다. 의원 비서진과 외부에서 데려온 전문가들은 거기서 밤새도록 자료와 시름할 것이다. 연례 행사처럼 벌어지는 일이다. 지금 여의도에서는 의원들이, 한 해 정치 농사가 판가름난다는 국정감사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고 있다.

 이번 국정감사를 준비하는 여야와 각 의원들이 전략은 각양각색이지만, 자세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치밀하다. 이제 관료를 불러다 놓고 무작정 호통치는 것만으로 인기를 유지하던 시절은 지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공부하는 풍토가 생겨났다. 민자당 김형오 의원(교통위)은 사회간접자본 건설을 위한 민자 유치 방안을 연구하기 위해 지난 8월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 다녀왔다. 김의원은 그때 챙겨온 자료를 이번 국정감사에서 십분 활용할 방침이다. 민주당 강창성 의원(국방위 겸 정보위)도 보좌관을 미국에 보내 국방부와 국무부의 한반도 정책 자료를 긁어모았다.

 국정감사에서 눈에 띄게 역량을 발휘해온 민주당 이해찬 의원의 경우, 국내 정치인으로는 처음으로 후원회 기금 모집을 자신이 소속한 상임위의 국감 활동과 연계하고 있다. 이의원은 정기국회 개회일인 9월10일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수질보전 활동기금 마련을 위한 후원회’ 행사를 가졌다. 여기서 거둔 기금으로 항시 수질을 검사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출 계획이다.

 당 차원에서도 움직임이 부산하다. 민자당은 9월8일 의원회관 식당에서 김삼훈 핵대사 등 정부 관료를 초청하여 정기국회와 국정감사에 대비해 몸을 다듬었다. 그러나 의원이 겨우 40여명 참석해서 싱겁게 끝났다. 민주당은 9월13일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전경련 · 중소기업중앙회 · 경실련 등 각 사회단체 전문가를 초빙해 ‘국정감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의원 토론회를 가졌다. 이 행사를 주관한 신기하 원내총무는 “지난해부터 한건 위주의 폭로보다는 정책 대결로 바뀐 국정감사에 대비하기 위해 야당 역사상 처음으로 기획한 행사”라고 설명한다.

 현지 답사도 빼놓을 수 없는 국감 준비 과정으로 자리잡고 있다. 민주당 박석무 의원은 이런 현상을 “과거에는 로비 받는 게 아니냐는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국감 대상 기관이나 지역 현장을 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하게 중앙 행정기관에 자료를 요구하는 수준을 넘어서 현장을 확인하려는 풍토가 조성되고 있다”라고 분석한다. 한광옥 의원을 비롯한 민주당 의원 5명은 지난 8월말 강릉 일대를 돌며 지역 현안을 집중 조사했다. 확실히 국정감사를 준비하고 참여하는 의원들이 자세가 달라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선포하면서 사라졌던 국정감사가 88년 부활할 때만 해도, 국정감사는 넘쳐나는 폭로와 한풀이의 장이 되었다. 국민들은 도무지 꺾이지 않을 것 같던 고위층이 국회에서 쩔쩔매는 모습에 박수를 쳤다. 유신 때부터 5공까지 누적되었던 각종 비리와 부정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상황이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또한 당시는 여소야대 국회였다. 여당이 아무리 막으려고 해도 야당이 표로 밀어붙이면 채택한 증인이 꼼짝없이 불려나왔다. 야당 국회의원들에게는 말그대로 ‘아무거나 건드려도 한몫 잡는’ 호시절이었다. 기성 정치인과는 전혀 다른 발상법과 정치인과는 전혀 다른 발상법과 정치 논리를 갖고 있는 재야 출신 야당 초선급 의원들이 스타로 떠오른 것도 그런 배경에서였다.

짧은 감사 기간 · 국회 권한 한계는 ‘숙제’
 그러나 14대 국회가 시작되면서 양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과거 정권의 비리가 어느 정도 밝혀졌기 때문에 국감은 그야말로 현 정부의 정책과 1년 간의 행정 공과를 따지는 행사가 되었다. 공무원들도 국정감사를 염두에 두고 행정을 펴기 때문에 비리와 부정이 수적으로는 줄었지만 더욱 교묘해졌다. 예를 들면 정부가 핵폐기장을 세우기 위해 안면도 땅을 매입한 과정은 차라리 숨은 그림 찾기나 마찬가지였다. 한마디로 한 건 올리기가 어렵게 되었다. 행정에 대한 전문 식견과 집요한 추적 없이는 국감에서 빛을 볼 수 없는 것이다.

 특히 14대 국회에서는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노태우 정권의 비리를 물고늘어지는 민주계 출신 여당 의원들의 발언 강도가 높아졌고, 그래서 국정감사는 더 이상 야당의 독무대가 될 수 없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13대 때와 달리 몇몇 여당 의원들이 야당 의원 못지 않게 각광 받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또한 거대 여당의 탄생으로 권력형 비리는 겉만 핥다가 하나도 밝히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여당이 증인 채택을 거부한 상무대 비리가 대표적인 사례다. 역설적으로 이런 국가 국정감사를 폭로 위주보다 정책 위주로 나아가게 하는 데 한몫 거들기도 했다.

 여하튼 지난해부터 국정감사가 여야 간에 정책 대결의 장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일단 이런 현상에 대해 여야 의원 모두 ‘바람직한 흐름’이라고 받아들이는 데 토를 달지 않는다. 지난해 국감에서 활발한 의정 활동을 폈다고 자평하는 민자당 손학규 의원은 “이제 국회가 생산적인 방향을 변모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행 국정감사 제도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한 나라의 한 해 살림을 점검하고 따지는 기간치고 20일은 너무 짧다. 가령 올해 노동 · 환경위의 경우 하루에 한 기관 이상씩을 감사해야 한다. 의원 1명이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이 기껏해야 1시간을 밑돈다. 관료들 처지에서는 몇 시간만 견디면 한 해를 무사히 넘기게 되는 셈이다. 관료들이 국회의 감사보다 감사원 감사를 더 두려워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래서 감사원 기능을 입법부로 가져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이다. 감사원 기능을 대통령이 장악하는 행정 체계는 개발 독재 국가형 제도이다. 그나마 국정감사가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국회에는 실질적인 권한이 없다.
吳民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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