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는 '현대 종교'의 십계명?
  • 이성욱<문학과학> 편집위원·문학 평론가) ()
  • 승인 1994.10.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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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가치·규범을 규정하고 생산 … 물신 숭배 대상으로 떠올라



 어느날 홀연히 X세대라는 ‘신인류“가 나타나더니, 뒤이어 미시족이라는 '신아줌마'들이 등장했다. 또 어느날 남양분유 광고에 미시족쳐럼 보이는 여인네가 아이를 안은 채 세상을 내리깔고 보면서 '내 아기는 다르다'고 강력하게 선포한다. 이 신 아줌마는 자기 아이는 누구와도 다르기 때문에 무엇이든 최고의 것을 주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 문구 밑에는 투명 잉크로 '당신 아이도 최고의 인생으로 키우고 싶으면 그 최고의 분유, 남양분유를 먹여야 한다'고 적혀있다.

 신세대에 관한 논의가 한창일때 50줄에 들어선 사람 중 유일하게 신세대 대접을 받은 인물이 있다. 삼성그룹 이건희 총수이다. 가족 이외의 모든 것은 다 바꾸어야 한다는 그의 신경영 전략은 이른바 리엔지니어링 바람과 맞물러 그를 재계의 신세대로 불리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 신세대 총수는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을 최고가 되기 위한 교두보로 여기며, '최고'를 삼성의 마지막 선택이라 부른다. 최고를 지향하는 삼성그룹의 슬로건이 바로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이다. 여기서 그려지는 풍경은, 이건희씨가 삼성그룹을 가승에 안고 '내 기업은 다르다'라고 포효하는 모습이 아닐까. 그리고 이 문구 밑에는 역시 투명 잉크로 '1둥을 하지 않으면 당신은 죽을 수밖에 없다'라는 사망경고장이 발부되어 있을 것이다.

 '내 아기는 다르다'와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은 이즈막 유독 눈에 들어오는 광고 문구이다. '1등이 아니면 살아남지 못하잖아요'(공보처 공익광고)' 정복 당할 것인가 정복할 것인가'(프로스펙스 광고)' 무조건 이겨서 전승하는 게 목표'(브이네스 광고)처럼 경쟁논리를 앞세운 광고 문구 또한 마찬가지이다.

광고는 '욕망의 계시자'
 실상, 관련 학자들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현대인의 삶이 광고의 자장에 깊이 끌려들어가 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 생활이 디스토피아적인 하드웨어라면 광고 세계는 항상 젖과 꿀이 흐르는 유토피아적인 소프트웨어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고는 현대인이 욕망하는 라이프스타일의 계시자인 것이다. 현대 사회의 가치관과 메시지가 광고로 모아지고, 그 광고는 또 거꾸로 현대의 보편적 가치관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전도사가 된다는 말은 그래서 전혀 과장이 아니게 된다. 그런 까닭에 누구도 광고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많은 경우 자기 인생의 사용가치를 광고 세계에 대한 조회를 통해 확인 하는 것, 요컨대 광고의 세계가 현대인의 생활 수준과 성공 여부를 평결하는 배심원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이것은 광고와 현대인의 관계를 일러주는, 이를테면 광고에 대한 현대인의 숙명을 웅변해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광고의 문제는 이런 관계에서 발생한다. 단순화하면 현대의 광고는 물신 숭배 대상이 되다시피 한다는 것이다. 광고의 나라는 새로운 토테미즘이 되는 것이다. 즉 광고는 개화한 현대인이 찾아 헤매는 새로운 토템에 아주 적절하게 맞아떨어진다. 현대인이 그 숭배물인 토템(광고)이 계시하는 식의 생활을 갈구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광고를 일종의 현대 종교로 보는 시각도 이와 무관치 않다.

 현실에 대한 광고의 이런 영향력은, 광고의 현실 생산력이라는 말로 설명된다. 즉 현실의 가치와 규범 등을 광고가 규정하교 만들어 낸다는 말이다. 광고 문구(언어) 역시 그 현실 생산에 톡톡히 기여한다.

 둥만이 기억된다는, 그러나 사실은 1등만이 살아남는다는 삼성의 광고 문구는 그 협박성에도 불구하고 숭배의 대상이 자신에게 자신감을 고취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내아기'만'은 다르다는 광고 문구에 각인되어 있는 '아이고 내 새끼주의', 가족 이기주의가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 문맥이다. 광고 문구의 현실 생산 내용은 바로 이런 것이다. 광고 문구의 물신적 성격에 장착되어 있는 현실 생산력, 즉 일종의 가치 생산력이 현대인의 신탁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은, 그래서 자못 비극적이다.

형식은 문명적, 내용은 야만적
 무조건 남과 차이나야 한다는 강박과 자기 현시욕, 혹은 남보다 조금이라도 앞서야 하고, 남을 눌러야 자기의 생존 이유가 확인된다는 것은 적자생존이 유일한 법칙인 밀림의 법칙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삼성과 남양분유의 광고 문구가 주장하는 것이 그런 것이라는 둥, 혹은 그것이 공격적이니 반공동체적이니 하는 반항은 거인에게 종주먹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광고와 현실의 현재 관계이다. 게다가 차분한 준비와 실체는 부재한 채울대 세운 구호로만 존재하는 신한국, 신한국인 등등의 새것(新) 콤플렉스, 혹은 일류,

1둥 콤플렉스에 들떠 있는 요즈음 사회 전체의 분위기까지 감안한다면야…

 꾸민 형식은 가장 문명적이되 그 내용은 가장 야만적인 이 광고 문구가 생산해 내는 현실 앞에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개화인임을 자처할 수 있는 길은, 또 밀림의 법칙을 문명의 법칙으로 재역전시킬 수 있는 길을 무엇일까. 벨보다 조금 늦게 전화를 발명한 사람, 암스트롱보다 조금 늦게 달에 내린 사람, 린드버그보다 조금 늦게 대서양을 횡단한 사람, 그러나 벨이나 암스트롱이나 린드버그에 못지 않은 노력과 고통을 감내한 그 2등 인생의 속내를 어진 눈길로 바라보고 격려하는 그런 것이 아닐까. 어떤 소설가의 수필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가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李成旭 <문학과학> 편집위원·문학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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