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물질 K11587의 운명
  • 정희상 기자 ()
  • 승인 1994.10.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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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과기처 산하 한국화학연구소 제초제연구실의 조인호 선임연구원이 과학계에서 ‘추방??된 지난 8월31일은 유난히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날이었다. 86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유기화학분야 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바로 국책 연구소에 스카우트돼 8년여 동안 신물질 개발에 몰두해온 그였다. 그러나 이 날로 그는 연구소를 영영 떠났다.
 정문을 향해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는 그에게는 책보따리 하나만이 들려 있었다. 이윽고 정문에 다다르자 수위가 그를 불러세웠다. “오늘 자정 이후에는 연구소에 출입시키지 말랍니다.??8년여 몸담은 연구소로부터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발명자 조인사 박사 과학계 ‘추방??
 연구실에서 짐을 쌀 때부터 정문까지 조박사와 동행한 취재반은 그에게 어디로 갈거냐고 물었다. “저는 그동안 연구소에서 연구.합성한 신물질 K11587을 살려내려다 신물질과 저 둘 다 사장되는 신세가 됐습니다. 제 개인의 희생이야 그대로 당하더라도 국고 지원을 받아 만든 K11587은 살려내 국가에 귀속시켜야지요. 그 길을 계속 찾아갈 겁니다.??

 정문에서 조박사와 헤어진 취재반은 곧바로 연구소 동편 건물에 자리한 제초제연구실 김대황 실장 방문을 두르렸다. 그는 조박삭가 이 날 연구소를 떠나게 되는 ‘사건??의 소용돌이에 처음부터 휩쓸렸던 당사자이자 조박사의 상사였다.

 “그동안 연구소가 조인호 사건 때문에 피해를 많이 보았습니다. 조박사의 터무니없는 주장 때문에 여기저기 불려다니느라 연구도 제대로 못하고 분위기가 이만저만 침체된 게 아닙니다.?? 연구소측이 조인호 박사를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는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설명이었다.

 한 과학자가 연구소의 ‘국가 기밀 누출??을 고집스레 주장하고, 연구소측은 ??명예 실추??를 내세워 그를 정리해버린 이 갈등의 내막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한국화학연구소가 국고 지원을 받아 의욕적으로 합성해낸 신물질K11587이 깊숙이 관련돼 있다. 문제의 K11587은 학국화학연구소 제초제연구실 소속 조인호 박사가 92년 1월16일 합성한 것으로, 벼의 피를 제거하는 효능이 기대됐던 신물질이다. 앞의 K는 한국화학연구소 영문 두문자(KRICT)에서 따온 것이고, 뒤에 붙은 숫자는 이곳에서 농약용으로 합성되는 새로운 물질에 붙이는 일련 번호이다.

 벼농사를 주로 하는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독자적인 국산 신농약 기술을 제품화한 실적이 전무한 상태라 모두 수입 외국산에 의존(연간 7백억원대)하고 있다. 따라서 벼 제초제 개발은 국가적 숙원 과제였고, 정부는 일찍부터 한국화학연구소 제초제연구실에 막대한 기술 개발비를 지원했다.

 86년부터 연구비를 연간 1억3천만원씩 국고에서 지원받아 제초제 핵심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한 연구소측은 그 과정에서 약효가 뛰어난 물질로 91년에 K11451(고영관 연구원 합성)과 92년에 K11587(조인호 연구원 합성)을 각각 합성해냈던 것이다. 합성 후 1년간 활성 실험을 거친 결과 신물질 K11587은 지금까지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미국 듀퐁사의 론닥스와 일본 닛산사의 NC 311에 비해 벼의 논피 방제력 면에서 무려 4~8배가 높은 약효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아울러 K11587은 벼에 대한 약해 면에서도 화학연구소가 합성해 우수한 물질로 판명한 K11451보다 적은 수치를 보이는 것으로 보고됐다.

 그러나 K11587의 ‘화려한 탄생??은 끝내 축복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약효를 확인한 뒤부터 제초제연구실 김대황 실장이 연구 협력을 명분으로 국내의 농약회사에 이 물질 샘플과 정보를 각각 제공한 사실이 연구실 내에 알려져 국가 기밀 유출 논란에 휘말린 것이다. 연구소측이 이른바 조인호 사건이라 이름 붙인 갈등의 서막으로 92년 10월20일의 일이었다.

 이 날 조박사는 상사인 김대황 실장으로부터 “독일 바이엘사에 보내야 하니 K11587 약제 샘플을 서둘러 준비해 달라??는 지시를 받았다. 김실장은 이 자리에서 독일 바이엘 본사에서 보내온 팩시밀리 전문 4장을 보여줬다. 이를 복사해간 조박사는 특허도 내지 않은 상태에서 외국기업에 국고 지원으로 만든 약제 샘플을 건네려 하는 것은 국가 기밀 누출이라며 그뒤 샘플 제공을 거절했다. 두 사람의 갈등은 이날 이후 점차 날카로워진다. 김대황 실장은 조박사의 행위가 월권이라며 K11587 연구에서 제외했고, 이에 불복한 조박사는 국가 기밀 유출 문제를 해결해 달라며 11월9일 연구소장(당시 채영복씨)을 찾아가 경위를 보고했다. 그뒤 연구소측은 조박사에게 ??K11587 연구에서 빠진 뒤 다른 제초제 연구를 계속하는지 아예 제초제실에서 다른 실로 옮기라??는 안을 제시하며 양자 택일을 요구했다.

2개월간 추적한 다섯가지 ‘진실??
 이 사건이 있은 후 연구소측은 93년 1월5일자로 조박사를 연구요원실로 대기발령했다. 이를 계기로 조박사는 자기가 주장한 K11587의 국가 귀속을 위한 특허 출원과 연구소내 국가 기밀 유출 방지츨 청원서에 담아 93년 1월8일 청와대.과기처.감사원과 각 정당 대표에게 우송했다.

 그러자 김대황 실장은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조박사를 대전지검에 고소했다. 검찰 조사 결과 조박사가 주장한 특허 출원 요구의 타당성이 인정돼 무고죄는 무혐의 처리됐지만, 명예 훼손은 성립하여 1, 2심 법원에서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이 선고된 뒤 현재 대법원 판결을 남겨두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소측은 93년 4우러1일 조박사를 살균제실로 전보했다. 그는 살균제실에서도 비밀리에 K11587에 대한 연구를 계속했다. 결국 연구소측은 지난 8월31일자로 조박사를 연구소에서 내보내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조박사는 한국화학연구소에서 쫓겨난 이후에도 줄기차에 K11587의 ‘구명??과 이 신물질 처리를 둘러싼 국가 기밀 유출 확인 및 이후의 방지 대책 마련을 주장하고 있다. 연구소로서는 조박사를 내보냄으로써 불을 끄려 했지만 진화가 되지 않은 셈이다.

 이런 사태가 계속 방치된다면 국익을 위해서도 바람직스럽지 않을 뿐 아니라 국책 연구소의 연구 풍토와 한 과학자의 앞날에도 좋지 않을 것이므로 사건의 전모와 진상을 추적할 필요가 있었다. 그동안 이 사건은 본질과는 달리 매국 행위, 명예 훼손, 월권 등 첨예한 감정 대립에만 초점이 맞춰져 다루어졌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따라서 〈시사저절〉취재반의 추적은 양측의 감정을 모두 배제한 채 철저히 신물질 K11587의 탄생 및 사장 과정에 얽힌 진실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췄다.

 이 사건 추적은 2개월에 걸쳐 이뤄졌다. 그동안 약 2천5백장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와, 연구소측과 외국 기업 사이에 오간 비밀문서, 공문서, 사건경위 설명서, 증언자료 들을 확보해 진위를 확인했다. 또 K11587 약제를 넘겨받은 국내 민간기업 책임자들을 직접 만나 나눈 대화 내용을 녹취자료로 문서화했다. 전문가의 판단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특허청, 정보기관 관계자, 변리사, 법률가의 증언을 받거나 판정 내용을 서류로 받아내기로 했다.

 그 결과 취재반은 신물질 K11587의 운명과 관련해 다섯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를 두달 동안 추적해 확보한 증거 자료를 토대로 압축해 공개한다.

 결론 1 : K11587은 초기 단계인 온실 실험결과가 우수하다고 나온 이후 공식적인 국내 포장(현장) 실험을 거치지 않고 사장됐다.
 한국화학연구소 K11587 연구를 중단했다고 공식으로 밝혔다(94년 9월 작성〈조인호사건 관련 상세 설명 자료〉18쪽, 화학연구소 작성). 화학연구소에 따르면 ‘K11587에 관한 연구는 92년 11월부터 93년 8월까지 추진된 국책연구사업(G7과제)의 일부로서 성보화학 주관하에 기업 부담 연구비 1억5천만원과 정부지원금 1억5천만원으로 1차 연도 연구가 추진되었음. 93년 9월부터 시작된 2차 연도 연구부터는 성보화학의 포장 실험 결과가 기존 제품과 경쟁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함에 따라 기업의 연구 참여 포기로 인해 과기처에서 당해 과제에 대한 계속 투자를 중단시켰음. 따라서 다른 기업이 다시 투자를 하고 과기처가 계속 지원을 결정하지 않는 한 동 연구 사업은 계속이 불가능함??이라고 화학연수고가 K11587 연구를 중단한 경위 및 사유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화학연구소의 이런 주장은 첫 마디부터 사실과 다름이 입증됐다. 연구소측이 K11587을 G7 과제 일부로 성보화학 주관하에 포장 실험까지 마쳤다고 공식 발표한 내용과 관련해 성보화학 연구책임자인 조부연부소장의 증언은 이렇다. “K11587은 G7과는 전혀 무관했다. G7에 K11587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연구하지 않았다. K11451은 정부로부터 비용 정산을 받아가며 철저히, 책임질 만큼 포장 실험을 해서 보고서까지 냈지만 K11587은 성보로서는 공격대상이 될 수 없는 컴파운드(compound)였다. 다만 김실장이 개인적으로 우리 회사 오성환 실장에게 약제를 건네 오실장 역시 개인적으로 K11451을 실험한 곳에 몇 번 뿌려보고 그 자료를 김실장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이것은 성보화학과 화학연구소가 거래한 것이 아니라 오실장 개인이 김박사 개인과 거래한 것이다. 만약 공신력을 가지고 책임질 만큼 실험했다면 우리는 화학연구소로부터 비용 정산을 받아가며 철저히 해줬을 것이다. 그런 비공식적이고 개인적인 자료 교환을 이렇게 공식화한 화학연구소의 양식이 의심스럽다.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데 불과하다.?? 이같은 성보측 반박은 녹취록으로 작성되어 있다. 결국 화학연구소는 K11587을 정식 포장 실험 한번 거치지 않고 사장한 셈이다.

 결론2 : K11587을 별도로 특허 출원하지 않기 위해 화학연구소 측은 위증을 거듭했다.
K11587 화학연구소는 92년 9월2일 개소 기념일을 기해 ‘K11587이 K11451보다 약해가 적다??는 점을 감안하여 김대황 제초제연구실장과 조광연 농약활성실장에게 각각 공로 표창을 수여한 바 있다(93년 2월3일자 인사위 속기록). 그 직후인 9월 중순께 김대황 실장은 K11587을 합성한 조인호 박사를 포함한 제초제연구실 연구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K11587에 대해 특허를 출원해야겠다??고 말한 것으로 확인됐다.(제초제연구실 고OO, 류OO 선임연구원 검찰진술 및 인사위 참석 증언 속기록). 이같은 내용에 대해 지난 8월31일 화학연구소를 찾은 기자에게 김대황 실장은 ??사실이었다??고 확인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김실장은 93년 1월8일 조인호 박사가 K11587에 대한 특허 출원 및 국가 기밀 유출 조사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낸 직후 연구소가 대책을 마련하려고 연 인사위원회 석상에 증인으로 참석해 특허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K11587 특허 출원이 틀레임에 들어 있다. 변리사에게 증거를 받아 놓을 수 있다. 22개국에 출원했는데 국제법상에는 문제가 없다.??이어 이 자리에서 다른 인사위원이 ??K11587이 주가 되게끔 특허를 내달라고 조인호 박사가 실장에게 여러 번 얘기했는데 이를 왜 무시했는가??라고 묻자 김실장은 ??특허를 또 낼 수도 없는 문제다??라고 잘라 말했다(93.1.12 인사위 속기록).

 이는 92년 2월25일에 국제 특허 출원한 또 다른 화합물질 K11299에 K11587의 구조물이 포함돼 클레임이 걸려있다는 주장으로, 이것이 사실이라면 특허를 또 낼 수 없다는 말은 당연한 것이다. 특허에서 클레임이란 국제법상 완전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권리보장 장치로, 일단 클레임을 걸면 다시 특허를 낼 수가 없게끔 돼 있다(특허청 관계자 증언).

 그러나 김실장의 이 날 주장은 사실과 다름이 확인된다. K11299 국제 특허에 클레임된 26가지 화합물 중 K11587은 포함돼 있지 않았다. 더구나 연구소측은 K11587 특허가 필요없다고 계속 주장하다가 특허청이 별도 특허를 제출해야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밝히고, 조박사가 감사원에까지 특허 출원 필요성을 청원하자 슬그머니 93년 4월24일자로 K11587에 대해 국내 물질특허를 출원했다. K11587은 이때야 비로소 국내에 한해서 클레임에 든 것이다. 그런 화학연구소측은 이제 ‘국제 특허를 낼 필요가 없고, 내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다.

 결론3 : K11587 국제 특허는 시급히 출원돼야 한다.
 국제 특허를 출원하지 않겠다는 화학연구소의 이유 설명은 다양하다. 화학연구소를 찾은 취재반에게 김대황 실장은 “비용이 5천만원이나 들고 약효도 쓸모없다는 걸 누가 냅니까??라고 잘라 말했다. 그뒤 화학연구소가 제출한 공문서(국정감사 자료. 94.9)는 공식적인 이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국제 특허를 출원하는 데는 약 1억원이 든다. 특히 K11587 국제 특허의 경우는 기업이 연구에 참여했기 때문에 기업과의 연구계약상 특허 실시권은 기업에 귀속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특허 비용 부담은 연구 참여 기업도 부담하도록 계약되어 있는데, 참여 기업이 개발을 포기하고 연구 과제 자체가 중단돼 버려서 출연비를 부담할 재원도 없어진 상태임.??화학연구소측의 이런 공식 입장을 성보화학에 확인한 결과 성보측은 한마디로 ??큰일날 소리??라고 일축했다. 성보측 연구책임자인 조부연 부소장은 ??우리는 K11587에 대해 화학연구소와 연구 계약을 맺은 바 없고 공식으로 실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학연구소가 국제 특허에 우리를 끌고 들어가는 주장도 말도 안된다??라고 주장했다.

 최근 화학연구소는 그동안의 논리를 다시 들고나와 ‘K11587을 포함한 백만여 개의 신물질은 물질로서 기본 특허(K11299)에 포함되어 이미 국내외에 출원 또는 등록됐으므로 한국화학연구소 및 연구 참여 기업의 동의없이는 어느 누구도 제조판매할 수 없게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94.9.〈조인호 사건관련 상세 설명 자료〉). 여기서 화학연구소가 연구 참여 기업이라고 주장하는 성보화학은 ??참여하지 않았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여구 참여 기업인 독일 바이엘사를 뜻하는 것일까. 만일 독일 바이엘사의 ??동의??를 의미한다면 이것은 명백한 국가 보안사고에 해당한다고 아니할 수 엇다(정보기관 관계자 증언). 화학연구소는 이에 대한 답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K11587을 국제 특허 출원해야 하느냐 마느냐와 관련해 특허청은 94년 9월15일자로 내놓은 회신문을 통해 명백한 판정을 내리고 있다.

 ‘K11587 특허 명세서에 특정 이성체인 K11587에 대한 실험자료, 실시예 및 효능에 대한 자료가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아 화학연구소가 출원 당시 이와 같은 특정 이성체인 K11587을 인지하고 있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또한 K11587이 K11299에 비하여 예측할 수 없을 정도의 현저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면 K11587은 K11299의 특허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특허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 견해입니다.??

 결론4 : 국책 연구과제(G7)로 공식 선정됐던 K11451은 국내외 민간 기업과 이중 계약이 맺어졌다. K11587도 G7과제라 한다면 역시 이중 계약이다.
 지난 9월1일 화학연구소 김대황 실장은 취재반에게 K11587과 K11451을 독일 바이엘사와 계약한 제품시험 협약한(product test-ing agreement) 원본을 보여주고 각각 1부씩 복사해 주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독일 바이엘 본사에서 사람이 온 것은 92년 8월 중순이고 이 때 내가 K11451과 K11587 약제가 벼농사 제초제로 좋다고 얘기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K11451에만 관심이 있다가 내가 좋다고 얘기하니까 금방 둘 다 협약서를 보내왔다??라고 얘기했다. K11451과 K11587 협약서는 92년 9월14일자로 독일 바이엘사가 먼저 사인해 각각 2부씩 보내온 것을 92년 10월13일에 화학연구소 채영복 소장(현재 연구위원)이 사인하고 그 밑에 김대황 실장이 사인한 것이었다. K11451과 K11587 협약서는 자구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내용이었다. 다만 화학연구소가 두 물질 협약서를 받은 뒤 K11451은 10월13일에 사인을 해 1부는 보관하고, 나머지 1부를 DHL우편으로 독일 바엘 본사에 보냄으로써 협약이 완료됐음을 나타냈으나, 동시에 왔다는 두 협약안 중 K11587 협약안은 2부 모두 한국측 사인란이 비어 있다. 그때 K11587은 협약 체결을 안했느냐고 물었다. 김실장은 ??협약 내용이우리쪽에 불리한 것 같아 수정하여 으듬해 2월에 완료했다??라고 답변했다. 이와 관련해 화학연구소측이 조박사를 명예 훼손으로 고소한 뒤 94년 4월 법원에 제출한 공문서 ??사실 확인 조회서??에 따르면 ??K11587 협약안은 G7 과제로 인해 국내 회사들이 참여할 것을 고려해 협약 내용을 수정 제안하기 위해 사인하지 않았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같은 내용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우선 G7 과제로 국내 회사들이 차여한 공식 과제물은 K11587이 아니라 K11451이었다는 사실이다. 또 두 물질에 대해 바이엘측이 작성한 협약안 내용은 똑같았다는 사실이다. 결국 김실장의 주장대로 독일 바이엘이 보낸 K11587 협약서 내용이 한국쪽에 불리한 것 같아 사인을 미뤘다면, 똑같은 협약 내용인 K11451 계약서는 불리함을 감수하며 체결했다는 뜻이 된다. 뿐만 아니라 화학연구소측 논리에 따른다 하더라도 G7 때문에 국내 회사들을 의식해 바이엘과의 협약안을 수정하려 했다면 K11451을 수정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G7 공식 과제물은 K11451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또 있다. 바이엘과 K11451 협약을 체결한 92년 10월13일 이전에 화학연구소는 김대황 실장을 총괄연구책임자로 하여 그해 7월9일부터 사흘 동안 국내 농약회사인 성보화학.동호화학.경농 3사와 각각 ‘G7 프로젝트 참여의사 확인서??를 받았다. 이어 12월10일에는 위 3사와 각각 특정연구개발 협약서를 체결하고 K11451 연구 수행을 위해 3사는 각각 6천만, 5천만, 4천만원씩 화학연구소에 연구기금으로 내놓게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화학연구소측은 국내 기업들의 G7 참여를 유도하는 과정을 거쳐 K11451 정보를 넘겨 주고 시험 협약을 체결했으며, 동시에 외국 기업인 독일 바이엘사와도 계약을 추진해 체결한 셈이 된다. 92년 10월13일에 독일 바이엘과 체결한 K11451 제품 시험 협약안 속에는 다음과 같은 항목이 들어 있다. ‘바이엘은 화학연구소와 협력하여 K11451 제품을 개발하고 판매하는 일에 바이엘의 관심을 결정하기위해 본 협약 기간동안 시험 물질을 포함한 정보를 독점적으로 평가한다. 어느 일방도 상대방의 사전 서면 동의 없이 본 협약하의 권리와 의무를 이전하거나 할당할 권리를 갖지 않는다. 본 협약은 독일연방공화국의 법률에 따라 해석되며 판단된다.??

 두달쯤 뒤인 12월10일 국내 농약 3사와 G7 과제로 체결한 K11451 연구과제수행 협약안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들어 있다. ‘K11587 연구 결과(노하우 및 산업재산권 포함)는 참여한 국내 민간기업 소유로 한다.??

 이같은 이중 계약 문제와 관련해 성보화학측은“우리는 화학연구소가 K11451을 독일 바이엘과 먼저 계약 체결한지 전혀 몰랐다. 이것은 계약상 큰 문제로서 6천만원씩 투자한 우리를 속인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결론5 : 과학기술처는 화학연구소의 상부(감독)기관으로서 K11587 사장을 방조.비호했다.
 한국화학연구소의 상급 주무 기관인 과학기술처는 국책 연구소를 지휘.관리하는 기관이다. 더욱이 화학연구소가 국고의 지원을 받아 합성하는 중요 신물질.신기술의 보안 문제와 관련해 말썽이 생길 경우 이를 철저히 조사.확인해 불미스런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조처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K11587을 둘러싸고 93년 1월8일 과학기술처에 조인호 박사 청원서(국내외 특허 출원 요구 및 기밀 누출 조사 요구)가 제출됐지만 과기처는 같은해 1월19일자로 다음과 같이 장관 명의의 회신문을 발송했다. ‘K11587 제초제를 법적으로 보호받기 위해 다시 국제 특허를 출원한다는 것은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이는 대외적으로 말썽이 크게 일기 시작한 산하 기관의 중요 사건에 대응하는 상급 기관의 조처치고는 지나치게 안일한 것이었다. 상급 기관으로서 냉정하게 청원서 내용의 진위를 가리기는커녕 당시 화학연구소측 주장을 그대로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92년10월13일 이미 K11451에 대해 독일 바이엘사와 한국화학연구소 간에는 제품 시험 협약이 완료됐고, K11587에 대한 협약을 바이엘사와 계속 추진하고 있던 시점에서 독일 훽스트사를 거론하는 것은 과학기술처가 전혀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또한 특허에 대한 인식 역시 신중한 검토 없이 궁지에 몰린 화학연수소측 주장을 장관 명의로 그대로 되풀이 주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이후 특허청이 ‘K11587은 신규특허를 출원해야 한다고 봄이 타당하다??는 요지의 심판을 내린 데 비춰 볼 때, 과학기술처가 국고를 지원하는 국책 연구소의 특허 관리(보안.기밀 관리)에 큰 허점을 보인 것으로 확인된다.

 과학기술처는 G7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주무부처이다. G7 과제 중 화학연구소가 합성한 신농약 부문 과제물 K11451을 국내외 이중 계약을 하고, K11587이 공식적인 포장 실험 한번 안거치고 연구 중단된 것 등 수많은 문제점이 있었으므로 과학기술처는 상급 기관으로서 책임에 걸맞는 입장을 밝혀야 할 것이다.


특허 못낼 ‘의혹??있는가
 이상 정리한 다섯 가지 사항은 신물질 K11587 처리 과정을 둘러싸고 전개된 ‘사실과 진실??을 추적하는 가운데 핵심적이라고 판단한 부분만을 집약한 것이다. 약 2개월 간이 추적 과정에서 실제 문제가 되는 사항들은 여기에 적시한 다섯 가지말고도 20여 가지가 더 있다. 그 중 상당수는 문서 위조, 법원.검찬에 낸 사실 확인서 조회 내용 일부 조작. 중요한 사안의 날짜 부꿔치기 등에 해당한다. 또 일부는 위증과 끝없는 주장 번복 등이 포함돼있다(취재반은 여기에 싣지 못하는 그런 증거자료들을 이 사건 처리 과정에서 후속으로 계속 다룰 계획이다.) 

 K11587의 운명을 추적하면서 얻은 결론은, 이 물질이 국익 차원에서 다시 공정한 실험을 거쳐야 한다는 점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연구 결과가 나왔고, 합성 후 1년에 걸친 활성 실험 결과 세계 유명 제품보다 우수한 약효가 보고됐던 K11587이 이후 공식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비정상으로 방치.사장된다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온당치 못한 일이다.

 아울러 K11587은 서둘러 국제 특허를 출원해야 하고, 화학연구소가 이를 기피할 경우 정부가 권리 행사에 나서야 한다는 결론도 얻었다. 화학연구소가 K11587 국제 특허를 내지 않겠다고 공식으로 밝힌 사유들이 특허청과 성보화학측의 심판 및 입장 표명으로 설득력을 잃은 마당에, 더 이상의 특허 출원기피는 연구비를 지원한 국가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자세는 더 나아가 이미 약제를 건네준 독일 바이엘사와의 ‘관계?? 때문에 특허를 내고 싶어도 내지 못할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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