逆이민 “돌아와 거울앞에 선” 사연
  • 여운연 기획특집부 차장 ()
  • 승인 1991.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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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異國 마음 故國’ 청산 10년새 6배…“한국도 이젠 살기 좋아”

 11월 마지막 목요일은 미국인들의 최대 명절인 추수감사절. 서울 사람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날 뉴욕에서 오래 살다가 최근 몇년 사이 귀국해 정착한 7,8명의 ‘전 재미교포’들은 지난 시절 향수를 잊지 못해 강남의 한 음식점에 모였다. 역시 뉴욕 교포 출신인 음식점 ‘한국촌’주인 김세레피나(50)씨는 ‘칠면조구이’를 장만하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끝내 구하지 못했다. 김씨는 옛 친구들의 기분을 살려주려고 ‘닭구이’를 내놓았다.

 이들은 뉴욕의 명물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딴 이른 바 ‘엠파이어 클럽’이란 친목모임 멤버로 매달 한번씩 6개월째 모이고 있다. 뉴욕한인회이사장ㆍ대뉴욕실업인협회장ㆍ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뉴욕지부장…, 한때는 뉴욕 한인사회에서 꽤나 활발하게 일했을 사람들이다. 고향을 떠나 20년 넘게 살다 고국을 잊지 못해 돌아온 초로의 남자들이 이제는 또 뉴욕을 잊지 못하고 산다. 이민이란 바람결을 타고 이국땅에 갔다가 눈물겨운 고생 끝에 생활기반을 잡은 사람들. 그 ‘생활의 터’를 포기하고 고국을 택한 이들 역이민자들은 최근에 겪는 늦고생 이야기를 신바람나게 털어놓고 있었다.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급격히 늘기 시작한 역이민 현상은 90년대 들어와서도 여전하다. 외무부 해외이주과 자료에 따르면 80년~90년 10년간 영주귀국자는 모두 3만3천여명, 금년 한 해만도 10월말 현재 5천8백37명에 이른다. 역이민 연도별 추세를 보면 80년에 1천49명이던 것이 85년 2천2백90명, 87년 3천3백1명, 88년 4천7백34명, 89년 6천6백85명, 90년 6천4백49명으로 나타났는데(별표 참조) 미국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그 다음 남미ㆍ캐나다 순이다.

 이에 비해 해외이민은 점차 감소추세를 보여 80년 3만3천3백58명에서 85년 2만7천7백93명, 90년 2만3천3백14명이다. 해외이주 대비 역이민 현황은 80년 초에는 4%, 중반에 7%이던 것이 하반에 들어선 20%나 된다.

 이처럼 나라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은 줄고 이민간 사람들이 되돌아오는 역이민이 부쩍 는 이유는 여러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해외생활 부적응ㆍ국내취업ㆍ자녀교육문제 등 다양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국내의 정치ㆍ경제적 상황이 좋아지면서 상대적으로 해외생활에 대한 매력이 줄었기 때문이라고 관계자들은 말한다. 서울대 李光奎교수(인류학)는 “60,70년대 떠났던 사람들에게 국내에서도 돈 벌 기회가 많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고국정착을 택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또한 해외동포들이 현지에서 생활안정을 이루면서 이민 초기엔 잘 몰랐던 사회ㆍ문화적 갈등을 심각하게 느껴 돌아오는 일도 많다는 것이다. 크게는 세계가 탈냉전시대로 변화하면서 한반도에서의 전쟁위협이 그만큼 줄었다는 판단에 따라 돌아오는 이들도 있다.

 이구홍 해외교포문제연구소장은 역이민현상을 동양인 특유의 강한 귀소본능으로 풀이한다. 1백만 이상의 재미교포는 미국에 살면서도 차기 미국대통령이 누가 될것인가보다는 ‘한국의 민주화’에 큰 관심을 쏟고 산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중국 화교들이 본토와 가까운 인천에 모여산다든가, 한인교포들이 로스앤젤레스에 대거 밀집해 사는 것도 바로 “여차하면 돌아가겠다”는 귀소의식의 발로가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다. 80년 이후 영주귀국자는 이제 4만명에 육박한다. 해외영주권을 포기하지 않은 채 거주하는 이들도 상당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실제 귀국자는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귀소 본능 ㆍ현지 부적응ㆍ한국 발전이 원인
 과거를 털어내지 못한 채 몸 따로 마음 따로 살아오다 돌아온 역이민자들. 이들은 과연 기대했던 만큼 고국에서 만족하며 살고 있을까.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부분 고국의 현실이 상상하던 것 같지는 않아도 객지생활의 비애를 맛본 때문인지 진지하고 겸허하게 재정착의 길을 닦고 있는 것 같다.

 미국생활 17년, 뉴욕에서 11년간 국민학교 교사로 지내던 변영애씨(43)는 귀국한 지 1년째다. 한때 그가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미국시민권을 포기하고 주민등록증을 받아 쥔 것이 바로 지난 달. 그동안 귀국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대뜸 “체중 10kg”이라며 웃음을 터뜨린다. 워낙 약골인데다가 긴장의 연속으로 돌아오기 바로 직전에 손가락을 못들정도로 크게 앓았다고 한다. 그녀는 뚜렷한 목적을 갖고 미국에 갔다가 자신의 목적대로 잘 살던 사람이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홀연히 모든 걸 버리고 떠나려 하자 주변 사람들이 대단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더라고 했다. 그가 돌아오자 서울의 친구들도 퍽 놀라워했다. 돌아온 이유는 “미국에서 지낸 17년 동안 스타킹 한번 안사게 한 어머니에 대한 애착 때문”이라고 말한다.

 변씨는 미국에서 따낸 학위ㆍ경력을 모두 묻어버리고 원하던 집필생활에 전념할 수 있게 된 지금 여건을 매우 행복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귀국 직후 내놓은 교육컬럼집《고독해보는 것도 공부다》란 책에서 그는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남의 것이 내 것보다 좋다는 생각을 갖고 수십년을 살았다. 이러한 생각은 나를 미국유학의 길로 인도하였고, 다행인지 미국에 도착해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의 국민학교 교사가 되어 10년이 넘게 미국에 이민 온 한국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미국에 살면서 내 것보다 남의 것이 좋다는 생각은 오류였음을 차츰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20여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정말 긴 방황 끝에 나는 자신에게 돌아왔다….” 변씨는 실망할지언정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으냐며 마냥 행복한 표정이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4년간 살다온 이윤수(43)ㆍ노경복(39) 씨 부부. 8년 전 대기업 중견사원이었던 이씨는 판에 박힌 직장생활에 회의가 생길 즈음 “한달 일하면 일년치 먹을 것을 벌 수 있다”는 이민 브로커의 말에 솔깃해 아르헨티나행 비행기를 탔다. 그곳에 가 야채가게ㆍ봉제공장 등을 운영하며 먹고 살 만해지자 유독 친구를 좋아한 이씨는 이국생활을 못견뎌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2년 전 잠시 서울에 들렀을 때 주변에서 눌러앉으라고 끈질기게 권유하더라는 것이다. 이씨 가족은 돌아가 주저없이 보따리를 싸들고 나와버렸다. 부인 노씨는 “이민생활은 우리에겐 경제적으로 큰 손실이었다”면서 새로 생활기반을 닦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음을 토로한다. 이민 갈 당시 8천만원에 판 강남의 35평짜리 아파트가 귀국해보니 세 곱절이나 올라버렸더라는 것이다. 노씨는 “그래도 무엇이든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게 소득”이라며 웃는다.

 80년대 한국의 경제발전은 해외교포들을 귀국하게 만드는 주된 사유임엔 분명하나, 최근 몇년 사이에 천정부지로 치솟은 집값과 물가는 그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 전체 땅값이 미국땅 70%를 살 수 있는 정도라니까 한국의 부동산값은 세계적이다. 따라서 요즘 역이민을 오는 경우라면 대체로 해외에서 어느만큼 경제적 여유를 쌓았거나 국내에 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는 사람, 아니면 국내에 생활보장이 되는 직장을 마련한 사람들이다.

 북미지역에서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이룬 교포 중 영주귀국하는 사람들은 몇년째 계속되는 미국의 심한 불황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또 일부 흑인과의 갈등에 한계를 느낀 경우가 많다. 19년간의 이민생활을 청산하고 작년 8월 귀국해 부산에서 사업을 시작한 임영섭씨(47)는 “미국은 밑바닥에서 고생할 때는 관대한 나라지만 사업을 크게 확장하면 제동을 거는 곳”이라며 고개를 젓는다. 흑인 강도가 이마에 총을 들이대는 순간을 여러 번 겪었다는 임씨는 나이가 들면서 두려움도 커지고 생활에 지쳤다고 말한다. 이제 내나라에 오니 마음가짐도 느긋해지고 너무 편하다는 것이다. 언어가 통하지 못한다는 아주 중요하고도 커다란 이유 때문에 그 사회에서 주류에 합류하지 못했던 소외감을 해소하는 데 귀향은 최고의 약이라며 좋아한다.

돌아와도 사회ㆍ문화적 갈등 많아
 자신의 선택으로 고국에 다시 돌아왔다고 하더라도 모든 게 다 만족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오랜 외국생활에 젖어온 관습 때문에 이곳에서도 사회ㆍ문화적 갈등을 피할 수 없다. 변영애씨의 경우 이기주의로 뭉친 여고동창들의 생활태도에 아주 비판적이다. 가정적으로 문제가 있는 친구들을 같은 그룹에 끼워주지 않고 그저 비슷한 계층끼리 모이는 포용력 부재를 안타까워한다. 귀국 직후 전화를 걸어온 한 친구의 첫마디는 “몇평짜리 아파트에 사느냐”는 것이었다. 69년 미국에 갔다가 금년 5월 영주귀국한 이석규씨(54)는 성공의 평가를 돈과 권력으로 가늠하는 이곳의 풍토가 답답하다고 했다.

 한때는 선망의 눈길 속에서 이민길에 올랐던 사람들. 그들은 급격히 변화한 한국의 모습에 무척 당황해 하고 있다. 때로는 해외에 살았던 사실을 숨겨야 할 만큼 배타적인 분위기 탓에 멈칫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이민생활에서 얻은 정신력과 자신감은 그들에게 큰 버팀목이 되고 있다. 15년 만에 미국에서 돌아와 활발히 활동하는 피아니스트 김준차씨(45)는 “이곳에 자리잡거나 사는 데 있어선 15년이 아주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삶과 예술에 대한 탈바꿈을 할 수 있었다는 면에선 아주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수년째 계속되는 역이민 현상은 일단 정서적측면에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국토가 좁고 인구는 많은 우리나라 같은 상황에서 적정수의 해외이민은 권장해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부는 흔들리고 있는 이민정책을 전면 재검토해 해외교포들이 현지에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장기적이고 효율적인 이민지원책을 펼쳐나가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이광규교수는 “도양인들은 귀소본능이 강하므로 일본ㆍ중국 같은 경우는 해외교포를 지원하는 제도적 장치가 잘 되어 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이민을 갈 때도 올 때도 아무런 지원책이 없다”면서 지금부터라도 해외로 나가는 사람들을 계몽하고 재정지원을 해주는 적극적인 이민정책을 펼쳐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교수는 최근의 한ㆍ흑 간 갈등은 우리가 흑인문화를 너무 몰라 일어날 한 예라고 꼬집는다.

 60년초부터 이민을 장려해온 정부는 계속 국민들의 해외이주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 현재 우리에게 공식적으로 이민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아르헨티나 등, 지난달 통과된 개정 해외이주법은 지금까지 해오던 해외이주자에 대한 적격심사제를 신고제로 바꾸는 등 이민수속절차를 간소화하여 이민의 활성화를 꾀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느만큼 실효를 거둘 것인가는 관계자들도 회의적이다. 더구나 역이민 대책에 대해선 아무도 생각지 않고 있다. 일본의 경우 역이민이 늘어날 즈음 외무성산하에 국제협력사업단을 만들어 해외교포를 돕는 협력체제를 만드는 기민성을 발휘했다. 외무부 해외이주과 주중철 사무관은 일본 같은 교민지원정책은 우리의 한정된 재원으로는 힘든 상황이라고 말한다.

 이구홍 소장은 이민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강조한다. 사전 지식 없이 떠나는 것도 문제이고 단 몇년 만에 일확천금한 것이 이민의 대성공 사례인양 떠들어대는 언론보도 태도도 시정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민이란 ‘형극의 길’이어서 1세때 씨를 뿌리고, 2세때 가꾸어 3세때 꽃피우는 식의 긴 안목으로 내다봐야 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구한말의 유민, 일제 치하의 강제징용과 망명, 60년대 이후 나타난 인력수출붐 등 시대상황에 따라 숱한 곡절을 겪으며 오늘날 5대양 6대주에 뿌리내린 해외동포는 5백만명에 이른다. 남북한 6천4백만의 8%에 가까운 교포들이 해외에 산다. 인구 10억인 중국의 화교가 1천8백만~2천만, 1억2천만인 일본의 해외교포가 1백74만이니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해외교포는 인구당 최고의 비율이라는 게 이소장의 주장이다. 그는 해외교포를 마치 이 땅을 등진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좁은 소견에서 벗어나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훌륭한 자산이며 민족의 성원이란 인식전환이 요구된다고 거듭 강조한다.

 어쨌든 정착 귀국하려는 해외교포들은 당분간 줄지 않을 것 같다. 지난 9월 서울서 열린 한민족체전에 참가한 해외교포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64.1%가 가능하다면 돌아와 고국에서 살고 싶다고 응답했다.

 이민이 시대적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시대적 변화에 따라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온 영주귀국자들이 대체로 해외에서 여유있게 살던 사람들이란 사실은 눈여겨 볼 만한 일이다. 다시 돌아와 정착하는 것이 만만치 않은게 고국의 현실이다. 고향은 반드시 금의환향하는 곳만은 아닐 것이다. 타향을 정처없이 떠돌다 돌아오는 어머니 품 같은 곳이 고향일진대 지금의 고국은 정말로 타국 땅에서 방황하며 어렵게 지내는 이민자들을 품어주기엔 너무 거리가 먼 곳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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