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난 교수재임용 망령
  • 정기수 기자 ()
  • 승인 1990.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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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성여대 성낙돈교수 개강 앞두고 탈락 … 민교협선 “대학민주화 말살의 신호탄”

 “수퍼마킷 점원만도 못하다.” 사립대학 교수들이 자기 신분의 취약성을 자조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이 비유가 과장인지 아닌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사립대학 교수를 비롯한 수많은 교육관계자가 지난 3월 야당의 ‘방관’속에 통과된 개정 사립학교법 가운데 재임용 조항에 주목, 재단의 악용 가능성을 지적하면서 “그것만은 안된다”고 결사반대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사례다. 덕성여대 교직과 성낙돈교수(36·교육학)가 요즘 겪고 있는 일이 그것이다.

 

학장은 “미안하게 됐다”는 말만 거듭

 주말인 지난 8월25일 오전 11시경, 서울 도봉구 쌍문동 아파트에서 다음 주 개강에 대비해 교수계획서를 다듬고 있던 성교수에게 단과대학학장(인사위원회위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잠깐 만나 차 한잔 합시다.” 약속장소로 나가보니 전화를 건 학장이 재단간부 한사람과 앉아 있었다. 성교수는 학교에서 자신의 신변에 좋지 않은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학장은 “미안하게 됐다”는 말을 거듭하면서 23일 인사위원회에서 성교수의 재임용 동의가 최종 부결된 사실을 전했다. 집으로 곧 우편통지가 가겠지만 쇼크를 받을까봐 미리 귀띔을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옆에 있던 재단 간부가 조심스럽게 부연했다. “이번 일은 재단과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진 인사위원회의 독자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성교수는 밖으로 나와 평교수협의회의 한 동료교수를 찾았다. 당장은 정신이 멍하여 자신에게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무지 실감할 수 없었다.

 안정을 찾기 위해 동료와 오후 늦게까지 테니스를 친 뒤 집으로 돌아온 성교수는 자신에게 닥치고 있는 현실을 비로소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등기속달로 배달된 통지서를 먼저 읽고 아내가 울고 있었던 것이다.

 온몸에 힘이 죽 빠져나가면서 머리칼이 곧추 섬을 느낀 성교수는 떨리는 손으로 통지서를 집어들었다. 그 내용은 비정할 만큼 간단한 것이었다.

 제목: 교원재임용에 관한 건

 수신: 조교수 성낙돈

 귀하의 재임용 동의가 1990년 8월21일 및 8월23일 소집된 교원인사위원회에서 부결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1990년 8월24일

 덕성여자대학교 총장직무대리

 “어떻게 이럴수가….” 성교수는 통지서를 보고 할말을 잃었다. “무엇 때문에, 어떤 기준에 의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렇게 결정이 됐다는 말인가.” 성교수는 통지서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나 아무리 뜯어보아도 거기에는 더이상의 설명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왜 재임용에서 탈락됐을까, 내가 왜?” 성교수는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부결됐으니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내일 모레면 강의가 시작되는데 당장 그만두라는 얘긴가. 통지와 동시에 해고라니 구멍가게에서도 없는 이런 일이 도대체 대학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 충격과 분노로 성교수는 “만 하루 동안 격렬하게 고통”했다.

 

대학 전체에 불어오고 있는 반민주 바람

 8월27일 이후 정신을 가다듬은 성교수는 재임용 탈락 이유를 “맹렬하게 분석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민교협 대외협력부위원장이고 전교조 대학위 정책간사이며 교육관계법의 ‘민주적 개정’운동을 주도하는 교수라는 ‘명백한’이유가 있었지만 그것은 주관적 판단일 뿐, 학교측이 내세우는 객관적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유신시대도 5공도 아닌 지금, 민주화시대라고 하는 1990년에 과연 무슨 이유로, 그토록 일방적인 절차에 의해, 단 한차례의 소명기회도 없이 한 교수의 생존권을 박탈할 수 있는 것일까.”

 뒷날 덕성여대 평교수협의회가 학교측으로부터 알아낸 탈락사유 세가지는 성교수로 하여금 교수재임용제라는 것이 법개정 당시 우려했던 대로 “능력과 관계없이 재단에 비판적인 교수를 단번에 추방할 수 있는 법적 뒷받침”이라는 사실을 실감케 하는 것이었다. 개정된 사립학교법은 재단에 교수와 교직원의 임면권뿐만 아니라 교수에 대한 재임용 심사를 학기가 끝날 때마다 할 수도 있는 막강한 권한을 주고 있다.

 평교수협의회가 알아낸 세가지 탈락사유는 성교수가 총장실 난입사건에 가담했고, 학생시위를 선동했으며, 대학부설기관인 평생교육원에서의 파견근무가 불성실했다는 것이다. 세가지 심사기준 가운데 연구실적과 교수능력은 자격요건에 충족됐으나 앞의 사유 때문에 인사고과 점수가 낮게 나왔고 ‘교수의 품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인사위원회측의 설명이었다.

 성교수와 평교수협측은 세가지 사유가 모두 학교 몇몇 인사들이 “학내민주화와 교육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눈의가시’를 제거하기 위해 벌인 모략”이라고 말하고 있다. 총장실난입이란 성교수 등 평교수협 교수 5명이 올바른 인사행정을 요구하며 총장직무대리를 면담한 일이었고, 학생시위 선동이란 총학생회의 초청으로 총장직선제 관련 집회에 성교수가 배석했던 일을 말하며, 근무태도가 불량했다는 것은 평생교육원의 교무과장을 맡고 있던 당시 성교수가 몇차례 자리를 비운 사실을 꼬투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성교수는 지금까지 ‘미국의 원격교육(대학성인계속교육을 위한 방송통신교육) 동향’ ‘대학평생교육제도 발전을 위한 방안’등 3편의 논문을 발표, 3백%(논문 1편당 1백%)의 연구실적으로 이번 재임용 심사대상 23명 중 가장 높은 실적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교수를 2학기부터 보지 않겠다고 한 덕성여대의 결정은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의장 김진균 서울대교수)는 성명을 통해 성낙돈교수의 재임용 탈락사건을 “반민주적이고 파행적인 사립학교 재단이 권력의 지원과 엄호하에 또다시 벌이는 대학민주화 말살행위”라고 규정했다. 수많은 독소조항을 온존한 채 재단의 교육기관에 대한 상업적 지배를 확대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악된 사립학교법을 덕성여대 재단이 솔선하여 민주교수에게 적용시킨, 이 나라의 교육민주화와 대학의 자주화를 위협하는 신호탄 성격의 중대사건이라는 것이다.

 덕성여대 평교수협의회는 “국민여론을 무시하고 개악된 사립학교법이 날치기 통과된 이후 ‘민주교수 목조르기’가 본교에서 최초로 자행된 데 대해 수치와 분노를 느낀다”면서 인사위원회 소속 보직교수와 총장직무대리의 사임, 성교수의 원상회복을 재단에 촉구하고 있다. 교수들은 이번 사건이 단순히 성교수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의 군소 사립대학을 비롯한 대학전체에 불어오고 있는 반민주 바람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교수협의회 탈퇴각서 쓰기를 거부한 교수 12명에게 무더기로 강의를 배정하지 않은 상지대와 학생시위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2명의 교수를 해임한 부산대의 경우는 그 바람의 확산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교수들의 우려와 같이, 지성과 양식의 대학사회가 아부와 굴종만이 살아남게 되는 지난날의 어두운 시절로 돌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최근 일련의 사태는 심상치 않은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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