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줄, 그러나 무서운 江
  • 정기수 기자 ()
  • 승인 1990.09.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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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수 계기로 진단하는 한강의 안전도… 무분별한 개발이 재난 키워

민족사의 기쁨과 슬픔을 담고 흐르는 강, 수도 서울의 젖줄이자 나라의 대동맥으로 비유되는 大河, 한강은 우리의 위대한 자산이다. 그 위대함은 말없는 흐름으로 사뭇 경외스럽기까지 하지만 그만큼 어떤 두려운 힘을 지니고 있다. 호수같이 넉넉한 평화의 강물이다가도 돌연 가공할 노도로 변해 우리를 사정없이 몰아치고 내팽개친 뒤 또 말없이 흘러간다.

한강의 역사는 그래서 우리 인간에게는 도전의 역사이기도 하다. 홍수의 참화를 수없이 당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고 강과 그 물을 이롭게 쓰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 인간의 자연정복사이다. 한강은 그때마다 물길이 바뀐 채 고쳐 흐르면서 인간의 삽질에 굴복하는 듯했지만 몇년에 한번씩 어김없이 저항하곤 했다. 자연의 순리를 어긴 개발의 대가로 인간은 이따금 생활터전을 내주거나 생명을 바쳐야만 했다. 한강의 변화, 그에 따른 서울의 변화는 그 강을 이겨 살아오고 때로 그 강에 져 온 우리 삶의 역사를 그림처럼 보여주고 있다.

1천5백만 국민의 상수원

금강산 부근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한계령에서 출발한 소양강과 춘천에서 합친 뒤, 삼척 대덕산에서 발원하여 단양 충주 등을 거쳐오는 남한강과 경기도 양평군 兩水里에서 만나 서울을 관류한 다음 휴전선 이북 서해로 빠져나가는 한강. 총연장 5백14㎞로 한반도에서 압록강 두만강 낙동강 다음으로 긴 한강은 유역면적이 무려 남한면적의 4분의1에 달하는 2만6천여㎢. 따라서 그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강은 서울을 비롯한 춘천 원주 충주 등 20여개시 30여개읍 1천5백여만명의 상수원으로서 전국 수요량의 절반 이상을 대고 있다. 젖줄이란 말은 그래서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한강은 또한 경인공업단지 등에서 사용하는 공업용수 연간 2백67억톤(전국의 약 26%), 경기미 생산으로 유명한 김포평야 등의 농업용수 1천3백18억톤(약 12%)을 공급하고 있다. 한강수계에 건설된 화천 의암 춘천 괴산 소양 청평 팔당 충주 등 8개댐의 발전시설 총량은 1백만㎾를 훨씬 넘으니 한강은 물줄 아닌 ‘불줄’로서 또다른 젖줄 구실을 하고 있다.

한강은 그러나 항상 이롭지만은 않았다. 10년이 멀다하고 홍수가 나 큰 피해를 냈다. 주기적인 홍수와 범람을 거치면서 한강 주변의 자연과 시민의 생활상은 조금씩 변화했다. 예전의 한강은 그 물길이 지금과는 크게 달랐다. 자연변천도 많았지만 근래에 들어와서는 인위적인 流路변화가 극심했다. 이는 한강홍수에 직· 간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으며 상습침수지역이 발생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

한강유역에 홍수가 자주 발생할 수밖에 없는 자연적인 요인으로 우선 강수량의 여름철 집중과 호우성이 꼽힌다. 하천유량의 변화를 나타내는 하황계수가 한강은 무려 1 대 394로 라인강(1 대 14), 템즈강(1 대 8)에 비해 유량의 안정성에 크나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홍수발생의 또다른 요소는 한강이 바닷밀물과 접하는 感潮河川이라는 점. 강화만 부근은 조수간만의 차가 약 9m나 돼 밀물때는 한강물의 유출이 둔화 또는 억제되어 수위가 높아지는 것이다. 사리때의 경우 이같은 수위 영향이 워커힐호텔 앞까지 미친다는 조사결과가 있다.

조선시대부터 치수사업 벌였으나

한강의 홍수기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백제 기루왕 40년(서기 116) 6월의 《증보문헌비고》 기록. “큰비로 한강물이 불어나 사람과 가옥이 떠다니고 훼손됐다”고 적혀 있다. 이후 고려말까지의 기록으로는 3건밖에 더 없지만 실제는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한강과 漢城府의 홍수기록이 잘 정리돼 있다. 書雲觀을 두어 기상을 관측했고, 측우기와 水標도 설치됐기 때문이다.

정종 2년(1400) 4월부터 철종 10년(1859) 6월까지 4백60년간에 걸친 한성부의 홍수 관련기록을 조선총독부관측소(중앙기상대 전신)가 정리한 《京城出水表》에는 당시 피해상황이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다. 예를 들면 “도성안에 물이 넘쳐 종루 동편에서 흥인문까지 사람이 통행할 수 없게 됐다” “인경궁앞의 교량붕괴로 14명이 급사했고 물에 떠내려갔거나 수몰된 인가가 75채나 되었고…” “한강에 연한 많은 주민이 물에 빠져 떠내려갔고 가옥은 무너졌으며 산이나 강변의 사태로 인축의 죽은 자가 많았다” 등이다.

서울의 치수사업은 조선 태조때부터 부분적으로 행해졌지만 태종이 환도 직후 본격적으로 벌였다. 그는 1406년 1월에 덕수궁 창덕궁 등의 건설에 부역돼 올라온 전국의 장정 3천명 가운데 6백명을 한성부 곳곳에 나누어 개천 굴착공사를 시켰다. 그러나 이 공사는 河床을 고르고 약간의 둑을 쌓아 나무를 심는 정도에 그쳐 근본적인 배수시설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이후로도 거의 매년 홍수 피해를 입었다.

1410년에는 5, 7, 8월 세차례나 홍수를 만났다. 태종은 공사계획을 세운 뒤 1412년 1월 전라 경상 충청의 役軍 5만명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開川공사를 실시, 한달만에 준공을 보였다. 이렇게 해서 생긴 하수도가 바로 청계천이다. 開川이라고도 불리는 이 천에는 수심을 재는 手標가 설채됐는데 지금의 중구 ‘수표다리 길’ 부근이었다.

1413년 일부 중신들은 용산~숭례문 운하건설을 건의하기도 했으나 운하의 필요성 논란, 인력동원 등의 문제로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같은 지역은 아니지만 이러한 운하굴착안은 고려조에도 있었다. 1925년 乙丑대홍수때 한강물이 남대문까지 넘쳤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운하안은 상당히 과학적인 것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용산 일대가 자주 침수되었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자연적· 역사적 배경이 있다. 고려말까지도 용산 앞을 흐르는 한강(용산강이라 불림)은 폭이 10여리에 이르는 큰 호수였으며, 연꽃이 만발하여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고 기록에 나타나 있다. 그런데 조선초에 호수의 한강쪽 모래언덕, 즉 자연제방이 홍수로 무너져 호수가 없어졌다고 한다. 이후 밀물때면 조수가 들어와 漕運이 성하게 됐는데, 지방의 세곡수송선은 모두 용산강으로 밀려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약 3백년 후 이 지역 한강의 수위가 점점 낮아지고 모래언덕에 해마다 진흙이 쌓여 조수도 들어오지 않게 되자 선박들이 마포 또는 서강 방면에 정박하게 됐다. 물이 빠진 용산 일대에는 그후 일제때 일인들의 거주지가 형성됐으나 ‘왕년의 강’이었음을 입증하듯 1925년 을축년대홍수 등 물난리가 날 때마다 상습적으로 침수되어 왔다.

1900년대의 홍수피해는 경성측후소가 설치되어 근대적인 강우량관측이 시작된 1908년 10월1일, 그리고 인도교의 준공으로 한강의 수위를 측정하게 된 1918년 8월 이후부터 기록돼 있다. 10m 이상의 최고홍수위를 기록한 것은 1920년(10.03m)과 1925년(12.26m), 1935년(10.08m), 1936년(10.49m), 1965년(10.30m), 1966년(10.78m), 1972년(11.24m), 1984년(11.03m), 그리고 올해 1990년(11.27m) 등이다.

7,8월 두차례에 걸쳐 홍수가 났던 1920년에는 현재의 지명으로 용산의 이촌동, 마포 뚝섬 영등포 합정동 망원동 성산동 수색 등 한강 및 안양천 연변은 물론 종로 중구 지역까지 서울시내가 온통 물바다가 됐다. 이 수해를 계기로 일제는 본격적인 제방공사(수방공사)를 시작했다. 구용산(원효로)에 있었던 옛 제방 1km가량을 돋우어 높였고 신용산에 처음으로 제방 2백m를 쌓았다. 이 신제방은 콘크리트로 옹벽을 치기도 했다. 영등포(당시에는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면) 안양천 하류의 제방 약 2㎞도 이때 처음 만들어진 것이다.

개발 이름 아래 좁아진 강폭

용산 한강제방은 완공되자마자 1925년 7월 미증유의 홍수, 을축년대홍수로 무너져 용산일대를 ‘泥海(흙탕바다)’로 만들고 말았다. 旭川(지금은 복개된 서부역 부근 개천)의 양수표는 이때 무려 13.86m를 기록했다. 을축년대홍수는 1920년 홍수(욱천양수표 11.78m)를 참고하여 높이 13.2m로 축조한 제방을 거뜬히 넘기고 남았던 것이다. 침수지역은 한강 對岸의 전지역에 광범위하게 일어났으며(40면 지도 참조) 사망자만 4백4명에 달했다.

을축년 대홍수 이후 일제는 ‘한강개수기본계획’을 확정, 총공사비 9백80만圓을 들여 1926년부터 9개년간 제방, 護岸, 河敷堀鑿 공사에 들어갔다. 이 改修공사의 대상은 신· 구용산, 뚝섬· 장안평, 마포, 영등포 일대 등으로, 방수제 축조뿐만 아니라 유수지와 1백80마력짜리 배수펌프 설치도 이루어졌다. 이번 홍수로 터진 고양군의 제방은 당시 東拓 소유였던 이 일대 농장침수방지공사의 일환으로 쌓았던 것이다. 터진 둑 일대의 신평리는 원래 섬이었으나 이 제방을 쌓으면서 백석리와 이어져 육지가 됐다. 일제는 그밖에도 1929년부터 1941년까지 각각 4~8년씩 걸려 안양천(25㎞), 중랑천(16㎞), 청계천(3㎞) 등의 제방을 쌓았다. 이는 우리나라 치수사업의 기초가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이후 본격적인 치수사업은 65년과 66년 두해 연속 큰 수해를 당하고 나서 재개됐다. 67년부터 제방을 겸해 강변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도로 안쪽에 생기는 공유수면을 매립하여 그 위에 아파트를 지어 올렸다. 연쇄적인 ‘대역사’로 한강은 큰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성산대교에서 광진교까지 강남· 북 양둑을 크게 보강, 강변1로에서 강변9로까지 고속화한 강변제방도로가 만들어졌으며 매립지개발과 아울러 양강변에 아파트단지가 대규모로 들어섰다. 이 사업은 도로건설에 거의 광적이었던 金玄玉시장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1970년을 전후하여 한강의 지도를 고치게 하고 한강의 물줄기를 바꾼 공유수면 매립공사는 무려 8개지구에 이르러 대규모의 아파트단지가 조성됐다. 홍수가 날 경우 불어난 물이 지나가던 삼각주와 만, 예컨대 여의도 잠실 반포 압구정동 같은 지역이 상습적으로 침수되는 이유는 결국 물길에 집이 들어선 탓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먼저 용산구 동부이촌동지구에는 1968년 10만여평의 택지를 만들어 1970년부터 아파트 22개동, 1천9가구분이 지어졌다. 해공 신익희의 한강백사장 유세로 유명하고 공수부대의 낙하산 훈련장소였던 이곳은 오래전엔 강이 흘렀으나 유로가 변하면서 넓은 모래밭이 됐다. 일제때는 토막집이, 6· 25직후에는 무허가판자집이 제방앞에 난립하여 홍수때마다 피해를 입곤 했다. 동부이촌동의 개발은 한국수자원개발공사가 착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공사중이던 소양강댐의 건설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공유수면 매립에 의한 택지 매각 수익금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래서는 돈벌기 위해 강폭을 깎아먹어 홍수조절능력을 떨어뜨리고 위에서는 그 돈으로 홍수조절용 댐을 건설한 격이다.

압구정지구의 매립은 매립목적과 매립면적에서 모두 석연치 않은 점을 남긴 것이었다. 세조때의 권신 韓明澮가 갈매기를 감상하며 시를 지었던 곳이며 고종때는 朴泳孝의 정자였다는 압구정 자리의 앞 저수부지를 현대건설이 탐낸 것은 1968년 후반. 영동지구개발이 계획되고 있던 때였다. 현대건설은 3개월여 뒤 허가를 받았는데 당시 매립목적은 공장부지 조성이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70년 매립공사가 시작된 뒤 그 목적이 택지조성으로 변경됐으며 최종매립면적도 4만8천72평으로 1만1천평이나 초과했다. 여러차례에 걸친 서울시의 시정촉구에도 불구하고 “원상복구가 불가능하다”며 버틴 현대는 결국 준공검사를 받아 그 위에 이 나라 아파트의 대명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23개동 1천5백62가구분 건립을 1977년 마무리지었다. 언론인도 포함된 권력층의 ‘현대아파트 특혜분양사건’은 이때 터진 것이다.
반포아파트단지를 탄생시킨 반포지구 매립공사는 1970년 현대건설 대림산업 삼부토건 3사의 공동출자회사(경인개발)가 착공하여 1972년 총 19만여평의 어마어마한 택지를 만들었다. 이를 주공이 일괄 매입, 74년부터 99개동 3천6백50가구분의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세워나갔다. 반포지구는 반포동 신사동 잠원동 일대로, 한강이 氾濫原을 전개하여 만들어진 곳. 반포 동구릉과의 사이에는 배후저습지가 형성돼 있다. 잠원동은 조선왕실의 양잠소가 있었던 곳으로 지금의 잠실을 동잠실, 잠원을 서잠실이라고 불렀다. 두 지역 모두 문자 그대로 桑田碧海임을 보여주고 있다.

성동구 구의동 광진교 부근에도 1970년 17만여평에 달하는 매립공사가 착수됐으며 신동아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서빙고지구, 양화지구, 흑석동지구, 한강대교 중간에 있는 제1중지도, 양화대교 중간에 있는 제2중지도(仙遊島) 매립조성공사가 이즈음 한꺼번에 이뤄졌다. 이렇게 됨으로써 한강이 범람할 경우 잠기게 되는 여유분, 즉 옛 범람원이 서울시민의 아파트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거대한 한강메우기사업은 여의도 輪中堤개발과 잠실 · 영동지구 개발이었다. 개발 이전의 여의도는 지금의 서울지도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모습이었다. 마포나루터에서 당인리 앞까지 남쪽으로는 노량진에서 양화리까지 한강 흐름의 한복판에는 광활하게 펼쳐진 백사장이 있었다. 홍수때마다 거의 잠겼다가 물이 줄면 바닥이 노출되는 그러한 백사장이었다. 조선시대에 측량한 넓이로는 2백50만~3백만평에 달했다.
그런데 이 넓은 백사장 안에 홍수에도 침수되지 않는 2개의 섬이 있었다. 북쪽으로는 밤섬(栗島), 남쪽으로는 여의도, 약초밭과 뽕나무밭이 있었고 고려때에는 귀양지이기도 했던 밤섬은 1968년 여의도 개발시 물의 편안한 흐름을 위해 폭파돼 지금은 일부 형체만 남아있다. 국회의사당이 세워진 부근의 면적에 불과했던 과거의 여의도는 양이나 말을 기르던 곳으로 봉우리 부분을 養馬山 또는 양말산이라고 했다. 여의도는 일제시대 이후 개발전까지 연병장이나 비행장으로 쓰였다.

 

물의 흐름 바꿔놓아 역류 잦아

매스컴과 온 국민의 관심 속에 여의도 윤중제 공사가 68년 착공 5개월만에 준공됐다. 서울시는 당초 이곳에 국회의사당을 비롯, 대사관 등 외국공관과 정부 각 기관을 유치하여 로마의 신도시와 같은 官衙도시를 조성하려 했다. 그러나 제방 안쪽 매립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동안에도 국회의사당 외에는 더이상 입지를 희망하는 기관이 없었다. 부채에 허덕이던 시가 이때 구상한 것이 유명한 시범아파트의 건립. 12층짜리 고층아파트의 단지화, 중앙난방, 주민조직에 의한 관리 등 주택단지의 ‘시범’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후 아파트단지가 다투어 들어서 현재는 4만여명의 상주인구를 유지하고 있다.

서울시가 1960년에 일찌감치 건설부에 매립면허를 냈다가 수리모형시험이 이뤄지지 않아 반려됐던 잠실지구 매립공사는 결국 1971년 착공되 총 1백5만평의 광대한 택지가 조성되었다. 이 지역은 원래 하천곡류율이 확대됨으로써 양 하천 가운데 생긴 섬(河中島). 구의동 옆을 지나 뚝섬쪽으로 흐르던 물이 송파쪽으로 유로를 바꾸던 중이었다. 이것을 두드려 막아 다시 물을 뚝섬쪽으로 흘려보낸 것이 이 매립공사의 결과이다. 석촌호수도 이 과정에서 생긴 인공호수다.

물의 주류를 막고 대신 그 흐름을 억지로 샛강으로 돌림으로써 생긴 결과는 당장 1984년 대홍수 때 나타났다. 원래 물길인 풍납동쪽으로 몰려든 강물의 수위가 급격히 높아지면서 잠실지구에서 단 하나 남겨놓은 지류, 그나마 배수기능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성내천이 나가지 못하고 역류하고 만 것이다. 이 홍수로 성내· 풍납동에서만 1만5천호의 가옥이 침수됐다.
60년대 후반 이후 서울의 급속한 팽창에 따른 한강변의 무분별한 개발로 여의도윤중제, 강변도로, 무수한 교량, 아파트숲이 들어차고 ‘5공의 한강종합개발(82~86년)’이 거기에 덧붙여지면서 한강은 본래의 자연경관을 잃고 상수원은 날로 오염되고 있다. 특히 60년대 이전에는 홍수때의 범람원이었던 저습지가 도시의 중요한 지역으로 변화함으로써 홍수피해의 규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올 여름에도 한차례 반란을 일으킨 한강은 인간의 무분별과 탐욕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시 수위를 낮춘 채 말없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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