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브 ‘1천년 패권’ 계속된다
  • 편집국 ()
  • 승인 1991.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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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스통신> 서울 주재 특파원 아브람킨 ‘3개 공화국공동체’ 분석

 옐친 러시아 대통령, 크라푸츠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및 스타니슬라프 슈시케비치 벨로루시(백러시아) 최고회의 의장은 12월8일 벨로루시 수도 민스크에서 독립 국가공동체 구성에 합의했다. 소비에트연방 중 인구가 가장 많고 부유한 이 3개 슬라브민족의 공화국(인구는 소연방의 70.3%, 산업생산력은 70%)이 공동체를 형성한 지 1주일이 안된 13일 카자흐공화국을 비롯한 5개 중앙 아시아 공화국(투르크멘 우즈베크 타지크 키르기스)이 공동체 가입을 지지하고 나섰다. 새 공동체의 주도적 역할을 맡은 옐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은 14일 샤포슈니코프 연방 국방장관과 새 공동체 통일군 총사령관의 지위 문제 및 사령관직에 임명할 복수후보자에 대해 논의했다. 15일부터 5일 동안 모스크바를 방문한 베이커 미 국무장관도 소연방이 보유한 핵무기에 관해 옐친과 협의를 벌이는 등 소연방은 해체 직전에 와 있다.

 다음은 최근 소련 사태와 관련해 <타스통신> 서울 특파원 올레그 아브람킨씨(41)가 《시사저널》에 기고한 글이다. 아브람킨씨는 모스크바 출생으로 73년 모스크바대학 아시아ㆍ아프리카과(한국사 전공)를 졸업한 직후 <타스통신>에 입사해 77년부터 82년까지 평양 주재 특파원을 역임했다.

 우선 3개 슬라브계 공화국이 공동체를 결성한 배경부터 짚어보자. 인구 1천만명의 벨로루시공화국의 지도자들은 연방탈퇴는 경제개발에 악영향을 줄 위험이 있다는 판단 때문에 연방의 존속을 바랐다. 그러나 체르노빌원전사고로 영토의 27%가 오염되고 주민 2백10만명이 피해를 입었으며, 1990년 추계로 피해액이 1천억루블에 이른 벨로루시 정부는 독자적인 힘만으로는 이 손실을 메우기가 힘들어 공동체 구성에 합의한 것이다.

 레오니드 크라푸츠크 우크라이나공화국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인구 5천1백만명 중 크리미아와 카르코프, 도네츠크 석탄지대에 거주하는 1천1백만명의 러시아인이 러시아공화국으로부터 떨어지길 원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사정으로 크라푸츠크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독립공화국으로 나가자는 안에 반대했다.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가 뭉친 데는 옐친이 제시한 경제개혁책이 크게 작용했다. 시장경제로의 전환이 필요함을 절박하게 느낀 두 공화국은 국민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13일 공동체에 가입하기로 결정한 카자흐공화국은 석유와 가스 등 엄청난 천연자원과 숙련된 전문인력을 확보하고 있는 등 상당한 경제적 잠재력을 지녀 독립국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 또한 지리학적 위치로 인해 아시아ㆍ태평양국가 및 대서양국들과의 접촉을 촉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1천6백만명의 인구 중 3분의 1만이 카자흐 국민으로 이뤄진 이 공화국이 독자 공화국을 설립하면, 다른 민족이 반발할 가능성이 커 공동체 가입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세 슬라브계 공화국은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그들의 동지인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공화국 대통령과 상의도 않은 채 왜 이같은 협정을 서둘러 체결했는가. 카자흐공화국 대통령 나자르바예프는 옐친과 더불어 신연방조약 탄생에 앞장선 인물이 아니었던가.

 일부 러시아공화국 지도자들은 러시아의 미래를 같은 슬라브계통의 두 인접 공화국과 연결하고자 했다. 이들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1653년 연방조약을 맺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다. 러시아 지도자들은 강력한 서유럽 경제에 맞선 전통적인 우방(우크라이나)이 정치적(카자흐공화국은 예외지만)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남쪽 회교 공화국들과 접근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들은 또 슬라브국가공동체를 통해 러시아가 다른 공화국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공동체의 행정수도를 민스크로 정한 것은 이같은 통제로 좀더 잘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연방 해체의 직접적 원인인 경제적 문제는 역사적으로 이 지역에서 슬라브민족이 행사한 역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슬라브민족의 역사는 길다. 인종적 특징보다는 언어적 특성으로 구분되는 슬라브민족은 아리안족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2억5천여만명으로 추산되는 슬라브민족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를 중심으로 사는 동슬라브인,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를 중심으로 한 서슬라브인, 유고연방에 흡수돼 분쟁을 겪는 슬라보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불가리아인을 통칭하는 남슬라브인 등 크게 세 종류로 구분된다. 이외에도 1천여만명의 슬라브민족이 북ㆍ남미 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에 흩어져 산다. 슬라브민족의 숫자는 유럽인구 중에서 가장 많다.

 동부 슬라브민족은 현 우크라이나공화국에 위치한 드네프르강 근처에 9세기경 최초로 러스라는 국가를 창설했다. 당시 수도는 현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예프였다. 12세기까지는 키예프 러스 국가가 있었다. 그 다음 세기에 탄생한 것이 백러시아(현 벨로루시)와 소러시아(현 우크라이나)이다. 이같은 역사에 비춰볼 때 슬라브계 세 공화국의 연결을 끊는다는 것은 숱한 혁명과 부침에 익숙한 소비에트 국민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1920년대말 스탈린이 완전히 권력을 장악한 후 소수민족의 지도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은 축소되었다. 인민의 러시아화정책 때문이었다. 인종주의적 요소를 가진 스탈린의 정책은 한 민족을 하나의 단위로 보고 과오를 물을 때 그 전체를 범죄자로 규정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코카서스 출신인 스탈린의 러시아화정책은 슬라브민족 중심의 소비에트연방의 유대를 견고하게 했다. 한 민족에 의한 통치는 자연히 반발을 잉태했다. 중앙정부는 그루지야와 아제르바이잔 및 회교공화국에서 발생하는 반정부시위나 민족적 폭동을 막기 위해 폭력을 사용했다.

 소연방 인구의 약 30%가 자기 출신 공화국 이외의 지역에 거주한다. 각 공화국 경제는 밀접히 연관돼 있다. 기계류를 생산하는 공장은 수백개의 부품을 다른 공화국으로부터 수입한다. 소연방국들은 구상무역, 즉 버터와 목재를 맞바꾸는 식의 물물교역을 해왔다. 따라서 다수의 소련 국민은 연방이건 공동체이건 ‘연대’가 유지되기를 원한다. 연대없이는 경제개발은 말할 것도 없고 살아가기조차 힘들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로 대표되는 동부 슬라브인들의 특징은 다양한 기후와 자연조건에 잘 적응한다는 점이다. 점령지의 민족들과 융합하기보다는 그들의 언어를 비롯한 문화적 본질을 보존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회교공화국에서 슬라브민족 출신들은 교사 의사 엔지니어로 활동했다. 바로 이같은 특성 때문에 이 지역에서 1천년 이상 패권을 차지하고 있는 슬라브민족은 앞으로도 계속 권한을 행사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각 공화국이 공동체 참여를 놓고 민족간에 발생할 격렬한 찬반 논쟁을 마무리짓는 데는 많은 시일이 소요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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