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데없는 정부미 산지쌀로 둔갑
  • 김재일 경제부차장 ()
  • 승인 1990.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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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중 대부분 새포장 … 서울시민 매일 8억원씩 바가지 써

비리 뿌리 뽑아야 … ‘비싼 것만 찾는’ 소비자 의식도 문제

 소비자는 속고 있다. 도시민은 엄청난 웃돈을 주고 ‘산지특미’로 둔갑한 정부양곡을 사먹고 있다. 시중에 나도는 ‘여주ㆍ이천쌀’이나 ‘경기특미’는 거의가 산지쌀이 아닌 정부수매 양곡이다. 산지특미 표시가 안붙은 일반미일지라도 소비자는 가마당 2만~3만원 정도의 웃돈을 더 내고 있다. 그리고 그 쌀 역시 보기만 좋을 뿐 정부미와 동질의 쌀이다.

 전남 목포시 석현동 공단내에는 15개의 도정업체가 모여 있다. 하나같이 간판은 없다. 지난 9월5일 아침 6시경. 쌀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도정공장 주변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7시경에는 10대로 불어났다. 그중 8.5톤 대형트럭에 실린 쌀은 내용물이 보이지 않게 커다란 커버로 덮여 꽁꽁 묶여 있다. 찢어진 틈새로 보니 20kg짜리 정부미 포대였다. 7시가 조금 지나 정미소들이 문을 열자 트럭들이 하나 둘씩 정미소로 들어갔다. 하역작업을 하는 동안 각 정미소에서는 한사람씩 문앞에서 망을 보며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였으나 트럭 4대가 도착했다. 트럭이 한 정미소에 들어가고 잠시 뒤에, 기자가 뒤따라 들어가 “어디에서 오는 쌀이냐”고 물었다. 인부들은 벗기던 트럭의 포장을 재빨리 도로 덮었고 주인인 듯한 사람은 “도정을 끝내고 소매상으로 나갈 쌀”이라고 시치미를 뗐다. 기자를 극도로 경계하는 눈치였다.

 기자가 다른 정미소에 들렀을 때, 망을 보던 사람이 “누구냐”고 붙잡았으나 뿌리치고 들어갔다. 공장 안에서 인부들이 일하는 것을 보고 있던 주인이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곳에는 40kg짜리 정부미 포대 수백가마가 쌓여 있었다. 포대를 터서 탱크에 담는데 보니 나락(조곡)이었다. “무슨 쌀이냐”고 물었더니 주인은 “햅벼”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정부수매가 시작되지 않은 시점에서 정부 햅벼란 거짓말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정미소가 상미(商米)공장임이 틀림없는데도 자주미(自主米)공장이라고 둘러댔다.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사진찍는 것을 어떻게든 방해하려고 했다. 주인은 기자를 사무실로 끌고 들어가 이야기하면서도 사진기자의 동태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우리나라 도정업체는 크게 2백90여개의 정부미 도정공장과 1백10여개의 자주미공장(조곡매출업체), 그리고 1만6천여개의 통칭 ‘동네 방앗간’(임도정공장)으로 분류된다. 정부미 도정공장은 정부통제하에 정부양곡을 도정, 임가공료를 받는다. 자주미 공장은 정부양곡을 조곡으로 사서 이를 가공, 20kg나 40kg 포대에 담은 후 자가상표를 붙여 도소매상에 직접 판매한다(80kg 포대에 담는 것은 불법이다). 상미공장이란 규모가 큰 방앗간으로 농가에서 벼를 매입, 가공해서 80kg 포대에 담아 소매상이나 소비자에게 직접 공급한다.

 도정업체에 따라 쌀은 정부미(정부미 도정공장), 자주미(자주미 도정공장), 산지쌀(상미공장, 방앗간)로 나뉜다. 이밖에 농협미는 정부미와 같은 쌀이나 농협의 관리하에 정부미 도정공장에서 위탁 가공, 도소매상에 출하된다. 쌀의 종류는 일반미와 통일쌀로 분류되는데 시중에는 정부 일반미, 정부 통일쌀, 자주 일반미, 자주 통일쌀, 산지 일반미 등이 있다.

 

방치되고 있는 자주미공장의 조곡 유출

 따라서 상미공장에 정부미나 농협미가, 조곡이든 정곡(도정한 쌀)이든, 들어와선 안된다. 목포의 도정공장에서는 명백한 불법행위가 저질러지고 있는 것이다.

 부정 유통되고 있음에 틀림없는 이 쌀과 나락이 어디서 흘러들어 오는가. 그리고 어떻게 둔갑하여 소비자에게 전달되는가. 상미공장은 정부미 정곡을 양곡상으로부터 사들여 이를  다시 가공, ‘산지특미’로 소매상에 도로 내어놓는다는 것이 쌀유통 관계자들의 말이다.

 더 큰 문제는 정부미 조곡이 상미공장에 들어오는 것인데 이는 자주미공장에서 부정유출 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최근 전남지역의 자주미 업체들이 조곡을 상미공장에 판 혐의로 관계당국에 의해 조사를 받고 있는 사실은 이러한 유통비리 실정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자주미 업체는 정부 일반미 조곡을 40kg가마당 2등급기준 2만8천9백20원에 사와 상미공장에 3만5천원선에 넘기니 6천80원의 이익이 생긴다. 한 업체가 이런 식으로 5만가마를 넘긴다면 3억4백만원의 부당이득을 챙기는 셈이 된다. 이 조곡은 상미공장에서 가공된 후 지방수집상, 양곡도소매상을 통해 특미로 둔갑, 소비자에게 공급됨은 물론이다.

 쌀이 둔갑할 수 있는 또다른 장소는 양재동 양곡도매시장으로 전국 각지의 쌀을 소매상에 중개하는 곳이다. 양재동시장에서는 하루 평균 6천가마(80kg 환산)의 쌀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출하되는데, 자주미(곡협미)가 주종이고, 그밖에 공매용 정부미와 80kg 포대의 산지쌀이 포함된다. 9월7일 오후 3시경 많은 가게에 80kg 포대의 쌀이 수백가마씩 쌓여 있었다. 햅벼가 갓 나오기 시작한 시점에서 산지에 구곡이 다 떨어졌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 일. 과연 어디에서 나온 쌀일까.

 

진짜 경기미는 시중에 있을 리 없어

 양재동시장 한 중개상의 후미진 곳에서는 인부 7명이 커다란 멍석에 쌓인 쌀을 80kg 포대에 옮겨 담고 있었다. 사진기자가 카메라셔터를 누르자 주인인 듯한 사람이 나와 “당신들이 뭔데 사진을 찍느냐, 카메라를 갈고리로 찍어버리겠다”며 거칠게 덤벼들었다. 사진기자는 황급히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20kg, 40kg 포대에 담긴 자주미를 산지쌀로 둔갑시키기 위해 80kg 포대에 담는 것이 아닌가고 의심할 수밖에 없는 현장이었다.

 그러나 양재동시장보다는 일반 양곡도소매상에서 더 많은 쌀이 둔갑한다고 봐야 한다. 서울시민의 하루 쌀 소비량이 4만2천가마라고 볼 때 양재동시장에서 방출되는 양은 서울 전체 소비량의 10%에도 못미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쌀은 자주미공장이나 일반임도정공장에서 가공된 후 지방수집상들에 의해 양곡도소매상에 넘겨진다. 양곡소매상은 전국에 3만6천개, 도매상은 2천7백개 정도다.

 쌀 둔갑은 특히 도매업 허가를 가진 ㅎ유통, ㅈ통상 등 대형유통업체, 그리고 소형포장미를 취급하는 백화점과 대형 수퍼마킷에서 많이 행해졌다. 이곳에서는 주로 값비싼 ‘경기특미’ ‘무공해 쌀’ 'DMZ 살‘로 둔갑했다. 요즘은 단속기간이라 뜸하지만 한달 전만 해도 시중 백화점과 대형 수퍼마킷에서 취급하는 쌀의 80~90%가 ’경기미‘였다는 것이 한 소비자단체 간부의 말이다. 이들 경기미는 80kg당 15만~16만원까지 받고 소비자에게 팔렸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 쌀이 경기특미가 아님은 물론이다. 포장만 다를 뿐 내용물은 자주미이거나 정부미 또는 농협미인 것이다. 최근 김포 단위농협 조합장이 호남미를 포장만 바꿔 경기미로 속여 판 혐의로 구속됐다. 농협조차 이 지경이다.

 농림수산부는 산지 경기미가 시중에 이미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해 경기미 생산량 4백30만석 가운데 정부수매 물량과 생산농가의 식량 2백59만석을 빼면 시중출하 가능 물량은 1백71만석이다. 이 물량은 서울시민이 두달 먹으면 없어지는 양이다. 특히 여주ㆍ이천쌀은 서울시민 1주일분의 식량에 불과하다고 양곡전문가들은 말한다.

 지금도 경기미가 있기는 있다. 바로 정부가 경기도 6개지역(여주 이천 평택 화성 용인 안성)에서 생산된 쌀을 수매, 농협공판장을 통해 공매하는 정부미다. 이 제도는 지난 5월18일부터 실시돼 요즘은 주 2회 1만가마씩 공판장에 상장된다. 농협의 실무자 한사람은 “공식적으로 나가는 경기미는 공매용 정부미 밖에 없다. 나머지는 둔갑한 쌀이다”라고 잘라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경기산 정부미도 도소매상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역시 고가의 ‘○○표 특미’ 등으로 둔갑해 버리는 것이다.

 

소비자는 4만~5만원을 더 내는 셈

 그러면 소비자는 얼마만큼의 손해를 보고 있는가. 공매용 경기산 정부미의 입찰가격은 80kg당 9만3천~9만4천원선. 자주미도 같은 가격에 양재동시장에 들어와 중개상에서 가마당 수수료 1천원이 붙어 시중 양곡상으로 넘어간다. 양곡상 이윤 10%를 친다 해도 소비자가격은 10만4천~10만5천원이 돼야 한다. 실제로 자주미 일반미와 공매용 정부미는 소매가격이 10만5천~11만원선이다. 정부 일반미의 소매가격은 9만6천원이고 농협미는 10만원이다. 정부 통일쌀은 86년산이 5만2천원, 89년산이 6만4천원선이나 소비자가 워낙 찾지 않아, 시세조차 형성되어 있지 않다고 제기동의 한 양곡상은 말했다. 그런데 공매용 정부미에서 둔갑된 ‘산지특미’의 소매가격은 14만~15만원, 자주미에서 둔갑한 산지쌀은 11만5천~13만원이다. 현재 양곡소매상에서 취급하는 쌀은 80% 이상이 자주미다. 소비자들은 적게는 2만~3만원, 크게는 4만~5만원의 웃돈을 내고 둔갑한 쌀을 사먹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의 경우 하루 쌀 소비량이 4만2천가마이므로 소비자들이 지불하는 웃돈을 가마당 2만원씩만 쳐도 서울의 전체 소비자는 매일 8억4천만원의 손실을 본다는 계산이 나온다.

 시중 양곡상에는 정부미가 귀하다. 정부미를 발견할 수조차 없거나, 있어도 ‘견본용’으로 뒷전에 처박혀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을 따름이다. 시중 양곡상에 정부미가 귀하다는 사실은 한국소비자연맹의 최근 실태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연맹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 시내 1백여개 양곡상 중 절반은 정부미를 아예 비치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시중의 정부미는 통일쌀보다도 일반미가 훨씬 많다. 지난 8월의 경우 농수산부는 통일벼를 8만3천석 방출한 데 비해, 일반벼는 23만8천석을 방출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쌀 유통비리의 주종은 일반벼와 통일벼를, 그리고 구곡과 신곡을 섞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처음으로 일반벼 6백만석을 정부가 수매, 방출하자 올해에는 부정유통의 형태가 바뀌었다. 쌀의 색깔에 따라서 아예 ‘김포쌀’ ‘경기미’ ‘산지특미’ 또는 산지 일반미로 둔갑시켜 버리는 것이다.

 쌀유통 비리형태는 다양하다. 해남 나주 김제 등 호남지역에서 난 쌀을 도정만 여주ㆍ이천에서 한 후 ‘여주ㆍ이천쌀’로 내보내는 경우는 다반사다. 전해에 생산된 나락을 신곡인 것처럼 속여 정부수매에 응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생산량보다도 수매량이 더 많은 웃지 못할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88년도 충남지역 통일벼 생산량은 68만8천석이고 수매량은 65만4천석. 정부통계상으로는 생산량이 약간 많다. 그러나 이것은 표본지역의 쌀 생산 평균치로 추산한 것일 뿐, 실제로는 수매량이 더 많았다고 농수산부의 일선 담당자는 말했다.

 일반미에다 칠성벼, 대성벼 등 쌀모양이 비슷한 통일쌀을 상당량 섞어 다시 포장, 1백% 일반미처럼 속여 파는 수법은 벌써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이러한 쌀 유통비리는 유통제도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우선 자주미제도를 들 수 있다. 이 제도는 86년 구곡 소비촉진과 민간 유통기능 정착을 위해 1년간 시험적으로 도입됐다. 당시 이석채 청와대 비서관의 아이디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해가 지남에 따라 정부의 주된 양곡시책으로 굳어져 버렸고 유통질서를 어지럽히는 등 갖가지 부작용을 낳고 있다. 구곡을 도정하는 과정에서 ‘물치고 기름쳐’ 신곡으로 둔갑할 뿐 아니라 소비촉진에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지난해까지는 정부미와 자주미가 전부 통일(신품종)쌀이었는데 이 쌀을 먹는 계층이 중산층 이하 도시서민으로 한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미질이 좋거나 쌀의 홍보를 한다고 해서 밥을 한그릇 먹는 사람이 두그릇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욱이 올 5월부터 방출된 일반미는, 정부미든 자주미든 간에, 산지특미로 둔갑하는 외에도 쌀값을 올리는 데 일조했다. 입맛이 바뀐 소비자는 값비싼 일반미를 사먹게 됐고, 게다가 정부미를 외면, 값이 비싼데도 색깔 좋은 자주미를 찾았다. 양곡상 또한 이윤이 높은 자주미만을 취급하려 했다. 쌀값이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혁명적인’ 물가안정 시책의 일환으로 소비자가 많이 찾는 자주미를 무제한 공급하도록 했다. 정부양곡은 현찰 방출하면서 자주미공장에는 2~3개월 외상 매출 등의 혜택을 주고 있다. 자주미공장 역시 가공한 쌀을 외상으로 양곡상에 넘겨준다. 정부미는 더욱 배척당할 수밖에 없다. 지난 6월 정부는 양곡상 이윤을 보장, 정부미 소비를 촉진시키기 위해 정부양곡의 방출가를 9만원에서 8만7천원으로 내리면서 소비자가격을 자율화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정부미의 소비가 촉진되기는커녕 산지쌀로 둔갑하는 등 더욱 큰 유통비리만 만들었다는 것이 양곡유통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양곡정책에 있어서 단세포적인 발상과 조령모개식의 변덕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소비자가 찾는 쌀을 무제한 방출해서 쌀값을 잡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소비자보호단체협의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국 평균 일반미값은 지난 1월 80kg 가마당 9만6천4백67원, 4월에는 10만3천3백47원으로 약보합세였다. 그러던 것이 일반미가 방출되기 시작한 5월에는 10만7천1백42원으로 올랐고 그후 계속 상승했다. 7월에는 11만1천1백51원을 기록, 연초 대비 15%의 상승률을 보였다. 서울의 경우도 지난 4월 10만2천8백원하던 것이 7월에는 11만8천2백원으로 뛰어 연초 대비 18%에 육박하는 상승률을 기록했다. 이를 예년 같은 기간의 전국 평균 쌀값 상승률과 비교해보면 88년에는 8%, 89년에는 1%에도 못미쳤다. 서울지역의 경우는 88년 4%, 89년에는 2%의 상승에 그쳤다. 일반물가 상승률을 충분히 감안한다 하더라도 올해의 쌀수급과 쌀값 정책은 실패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한국소비자연맹의 李京余 상무이사는 “물량공세로 쌀값을 잡겠다는 정부의 발상이 문제다. 유통이 막혀 있는데 무슨 효과가 있는가”고 반문하고 “자주미 유통의 사후관리를 안한다는 것은 정부가 유통비리를 묵인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농산물검사소의 한 직원은 “자주미 유통은 정부의 통제 밖에 있어 온갖 비리가 저질러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쌀 유통에 있어서 소비자를 혼란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 자주미는 일반미와 어떻게 다른가. 광주시 서구 송암동 소재 자주미공장인 평화정미소는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주지역에서 본 몇 개의 정부 양곡 도정공장이 3~4개월간 문이 닫혀 있는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기자가 공장에 들어서자 공장책임자는 아연 긴장했다. 자주미가 정부미와 다른 점은 마지막 도정과정에서 습식연미기와 색채선별기를 통과한다는 것이다. 습식연미기는 일본 수입품이 2천5백만원, 국산이 1천1백만원이고, 색채선별기는 1억원이 넘는다. 습식연미기는 물을 분사해 쌀의 수분을 맞추고, 색채선별기는 색깔이 안좋은 쌀을 골라낸다. 이 공장의 책임자는 “자주미는 수분을 15~16% 함유, 최고의 맛을 내며 상품이 나쁘면 교환해주는 등 책임판매를 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자주미나 정부미나 원료가 같은 쌀이라는 사실이다. 외관상 미질이 좋은 것처럼 보이나 “물붓고 끊여버리면 마찬가지”라는 것이 양곡 관계자들의 말이다.

 결국 이천ㆍ여주쌀 등 경기도의 특수지역에서 나온 쌀을 제외하곤 정부미, 자주미, 산지쌀은 똑같은 쌀이다. 산지쌀도 정부가 수매안한 쌀일 뿐이다.

 

“체면상 정부미 못먹는다”


 유통비리와 쌀값 상승은 소비자에게도 책임이 이다. 무조건 좋은 쌀을 찾는 과소비 경향과 어울러 쌀에 대한 인식 부족이 문제다. 그래서 품질 이상의 값을 지불하게 되는 것이다. 전화로 인터뷰한 서울 각 지역의 주부들은 대부분 자주미와 정부미가 어떻게 다른지 모를뿐더러 ‘둔갑을 해도 비싼 것이 좋은 쌀일 것’이라는 반응이었다. 대다수의 소비자는 정부미를 통일쌀로만 알고 있었고 일반미는 정부미의 반대개념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어느 주부는 체면상 돈을 더 주고 ‘좋은 쌀’을 사먹는다고 했다. 정부미나 농협쌀을 주문하면 양곡상에서 “사모님 댁 같은 데서 그런 쌀을 잡수시느냐” 또는 집에 오는 사람들이 정부미 포대를 보고 “요즘 궁해졌느냐”고 묻는 통에 창피하다는 것이다.

 서울 개포동 ㅁ수퍼마킷의 한 양곡소매상인은 “20kg당 3만3천원 이상 부르지 않으면 소비자가 사지를 않는다”고 말했다. 질나쁜 쌀이라도 값을 비싸게 불러야 팔린다는 말이었다.

 많은 전문가들은 정부의 양곡시책이 현단계에서는 정부미 위주의 정책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미를 상품성있게 만들어 수요를 증대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지속적인 유통비리 단속 의지와 제도가 아쉽다고 지적하는 소리도 높다. 기자가 한번 찾아가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는 비리현장이 그대로 방치된다면 이는 관계기관의 근무태만이나 방조를 뜻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소비자들의 의식이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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