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 TV‘대통합’실현
  •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2.0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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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 소리 담은 복합매체‘멀티미디어’… 정보통신 판도 뒤바꿀 듯

컴퓨터 전문가인 ㅌ씨는 얼마 전 미국을 방문한 기회에 국내에서 미국 현지의 컴퓨터관련 정보를 손쉽게 입수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알아보고자 했다. 가장 쉬운 길은 미국에서 발행되는 컴퓨터 전문잡지들을 정기구독하는 것이겠지만 잡지의 수도 많을뿐더러 정기구독료에 항공료까지 포함하면 비용이 엄청나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미국 컴퓨터 관련 업계를 돌아보던 그는 이러한 고민이 아주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발견했다.

미국에서는 현대 대형 출판물을 CD-ROM이라는 디스크에 담아 판매하는 것이 점차 보편화되고 있는데, 컴퓨터 잡지도 CD-ROM 제품으로 이미 상품화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매달 이 CD-ROM 1장만 정기구독하면 미국에서 발행되는 컴퓨터 잡지의 총목차와 그 중 70여개 잡지의 내용을 전부 볼 수 있다. 비용도 1년 정기구독료가 약 80만원이고 여기에 국내에서 판매되는 50만원 정도의 CD-ROM 드라이브를 구입해 컴퓨터에 연결하면 미국의 최신 컴퓨터 정보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CD-ROM은 컴퓨터에서 운용되기 때문에 정보 검색이 자유롭다는 이점도 있다.

콤팩트디스크 하면 국내에서는 대개 음악 감상용 디스크만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이나 일본 등에서는 이 콤팩트디스크를 대용량의 데이터 저장매체로 개조한 CD-ROM(ROM은 Read Only Memory, 즉 정보를 읽어낼 수만 있을 뿐 새로 입력시킬 수는 없다는 뜻)이 대형출판물 시장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것은 CD-ROM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기억용량 덕분이다.

책 1천권 기억하는 CD-ROM 이용
일반적으로 CD-ROM 1장의 기억용량은 6백메가바이트(MB) 정도로 알려졌다. 1바이트가 영문자 1자를 기억시킬 수 있는 용량이니 6백메가바이트면 6억자를 기억시킬 수 있는 셈이다. 이 정도면 3백쪽짜리 책 1천권을 기억시킬 수 있고 20~30권짜리 백과사전 한 질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백과사전 등 대형출판물을 발간하는 출판사들이 CD-ROM의 이런 엄청난 능력에 주목하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그러나 CD-ROM이 일으키고 있는 이러한 변화는 단지 대형출판물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 미국이나 일본에서 주목을 받는 것은 CD-ROM의 엄청난 기억용량을 이용해 글 그림 영상 소리 등을 동시에 담은 복합매체의 출현 부분이다. 2000년대의 정보통신 분야로 각광을 받고 있는 멀티미디어가 바로 그것이다. 멀티미디어란 지금까지 개별적으로 존재해왔던 컴퓨터 텔레비전 비디오 오디오 등의 기능을 하나의 시스템에서 실현시킨 새로운 미디어 형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멀티미디어의 실현가능성을 CD-ROM이라는 지름 12cm의 이 조그마한 원판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 예로 미국 ABC방송에서 제작한 멀티미디어용 CD-ROM판을 들어보자.‘대지진 89’(The Great Quake 89)라는 제목이 붙은 이 제품은 지난 8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강타한 대지진의 실제상황을 글과 그림 사진 영상 소리 등의 매체를 총동원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 CD-ROM판을 플레이어에 걸고 이것과 연결된 컴퓨터를 작동하면 컴퓨터를 통해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에 대한 입체적 파악이 가능해진다.

컴퓨터를 작동시키면 화면에 세가지 선택 메뉴가 나온다. 지진이 왜 일어났는가, 어디서 일어났는가, 지진이 일어난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등 대지진의 원인 경과 결과에 대해 사용자가 알고 싶은 부분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사용자는 자기가 궁금하게 여기는 부분을 마우스(키보드를 대신한 컴퓨터의 입력장치)로 선택한다. 예를 들어 두 번째 항목인 지진이 어디서 일어났는가를 선택했다고 해보자. 그러면 화면에 지진이 일어난 세 지점, 즉 베이브리지 · 다운타운 · 하이웨이880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다운타운을 다시 누르면 지진이 일어났을 때의 다운타운의 실제상황이 화면 오른쪽에 소리와 함께 영상으로 나오고 왼쪽에는 그에 대한 설명문이 나온다. 지진의 원인에 대한 전문가의 설명을 듣고 싶으면 해당 메뉴를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사용자가 프로그램에 적극 개입
즉‘대지진 89’는 여태까지의 매체들이 보여줄 수 없었던 새로운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컴퓨터적인 요소와 텔레비전 오디오적인 요소가 하나의 매체 속에서 동시에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러한 매체간의 결합이 평면적으로 이루어져 있을 뿐 아니라 사용자와 대화하는 기능이 부가돼 있다는 것이다. 사용자는 프로그램의 진행과정에서 단지 피동적인 존재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보고 싶은 부분, 또는 알고 싶은 부분을 지시하는 적극적인 존재로서 프로그램에 개입할 수 있다. 이것이 기존 매체와 멀티미디어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대지진 89’와 비슷한 제품들이 현재 미국에서는 교육용 자료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시장에 나와 각광을 받고 있다. 예를 들면 타임워너사에서 걸프전쟁을 소재로 해서 만든‘사막의 폭풍’(Desert Storm), 에북사에서 세계 유명화가들의 그림을 전문가의 설명을 곁들여 만든 ?集, IBM에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소재로 해서 만든 교육용 프로그램 등 이미 여러 형태의 제품이 선을 보였고 앞으로 점차 확대될 추세이다.

따라서 CD-ROM은 그 자체로서 이미 하나의 새로운 미디어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담고 있는 기술적인 함의이다. 즉 그것은 현재 컴퓨터와 가전산업이라는 정보통신의 양대 산맥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변화의 한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컴퓨터와 텔레비전 오디오 비디오 등 가전산업 분야는 나름대로 독자적인 발전과정을 밟아왔다. 그러나 이러한 고립된 발전은 이제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컴퓨터를 예로 들어보자. 컴퓨터는 초기의 산업용 대형컴퓨터에서 77년 미국의 스티븐 잡스라는 22세의 젊은이가 개인용컴퓨터를 개발한 이래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컴퓨터 문화를 선도해온 미국에서조차‘컴퓨터 회의론’이 강하게 일고 있다고 한다. 기업체의 경우 개인용컴퓨터의 보급이 개인의 사무처리 과정을 변화시켜온 것은 사실이다.

컴퓨터 · 가전제품 한계 서로 보완
그러나 이것이 기업체 전체의 업무 효율을 어느 정도나 향상시켰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라는 평가이다. 옛날에는 4명이면 가능했던 업무가 컴퓨터를 사용함으로써 3명으로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컴퓨터 전문가 1명이 더해진 5명으로 늘어났다는 식의 볼멘 소리도 들려온다. 미국에서 발행되는《비즈니스위크》91년 11월18일자에는 컴퓨터의 교육적 효과에 대한 강력한 회의론이 담겨 있다. 수십억달러를 들여 11만개 정도되는 미국의 초중등학교 97%에 컴퓨터가 보급됐지만 학생들의 언어능력이나 수학실력은 70년대보다 높아지지는 않았다는 지적이다.

컴퓨터 업계에서는 그동안 이러한 컴퓨터의 비효율성이 사용의 어려움과 글 그림 위주의 비교적 단조로운 매체 전달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파악해왔다. 따라서 사용하기 쉽고 영상화면과 음성 등 인간에게 친숙한 정보매체가 컴퓨터에서 구현될 수 있는‘인간적 컴퓨터’의 개발을 꿈꾸어왔다. 그것은 결국 텔레비전 오디오 비디오 등 기존 가전제품과의 결합형태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존 가전산업에서도 발전의 한계가 지적돼왔다. 예를 들어 텔레비전의 경우 기능을 아무리 향상시킨다 해도 정보의 전달이 획일적이라는 한계, 즉 정보의 전달이 방송사에서 시청자에게 일방통행식으로 일어난다는 한계는 극복할 수 없다. 시청자의 의지는 텔레비전을 볼 것인가 말 것인가, 그리고 어느 채널을 볼 것인가에만 국한돼 있을 뿐이다. 자기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만 선택해서 보거나 자기가 보고자 하는 프로그램을 녹화해서 보여주는 등의 정보의 선택과 검색은 거의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시청자와 방송국의 쌍방향적인 대화는 더욱 불가능하다.

따라서 텔레비전을 닮은 컴퓨터, 컴퓨터를 닮은 텔레비전은 정보통신과 가전산업 양쪽의 세계적인 기업들의 오랜 숙제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커다란 장벽이 존재했다. 그것은 디지털의 세계와 아날로그의 세계의 차이라는 장벽을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디지털 신호를 기반으로 작동하는 기계이다. 디지털이란 전기가 통하는 때와 통하지 않는 때를 0과 1로 표현하는 계수화된 세계이다. 이와 반대로 텔레비전이나 오디오 비디오는 정보의 전달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아날로그의 세계이다. 따라서 컴퓨터와 다른 가전기기를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 신호로 바꿔줘야 한다. 이때 문제는 컴퓨터에 엄청난 저장용량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286AT 컴퓨터에 하나의 영상화면(프레임)이 뜨기 위해서는 4백킬로바이트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컴퓨터가 1초에 소화할 수 있는 용량은 1백50킬로바이트이다. 따라서 이 컴퓨터로 한 화면이 뜨기 위해서는 2~3초가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 눈에 영화와 같은 자연스로운 동작화면을 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1초당 30개의 화면 정도는 돌아가야 된다고 한다. 이것은 현재의 컴퓨터 용량을 아무리 향상시켜도 불가능에 가깝다는 게 지금까지의 문제였던 것이다.

디지털의 세계와 아날로그의 세계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이 높은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 바로 콤팩트디스크의 출현이다. 세계적인 가전업체인 덴마크의 필립스사가 개발한 이 콤팩트디스크는 초기의 음악용 CD에서 85년 컴퓨터데이터 저장에 적합하도록 필립스와 소니가 공동개발한 CD-ROM, 그 이후 필립스에 의해 다시 독자적으로 개발된 CD-I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해왔다.

CD-ROM과 CD-I의 차이는 전자가 주로 대용량의 인쇄매체와 소리, 그리고 부분적인 영상화면을 저장할 수 있는 데 비해 후자는 여기에 영상화면 저장능력을 향상시킨 것으로 본격적인 멀티미디어 프로그램 입력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CD 기술만 가지고는 컴퓨터에 완전한 영상화면이 나오게 하는 것은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영상화면 자체를 압축하는 압축기술과 이를 다시 재생하는 복원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압축 복원기술은 87년 미국 GE/RCA사가 개발한 후 현재는 인텔사가 주로 추진중인 DVI 기술이 대표적이다. 이 기술을 이용하면 한 화면을 5킬로바이트까지 압축할 수 있어 앞으로 컴퓨터로 영화를 볼 수 있는 날도 멀지 않다는 것이다.

미디어산업 전반에 파급효과 미칠 듯
전문가들은 91년을 멀티미디어 개발에 있어서 전환기적인 해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것은 멀티미디어에 대한 기본적 개념의 정립 및 기술적 교두보가 마련된 해였기 때문이다. 그에 못지 않게 91년은 2000년대의 새로운 미디어 개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세계 거대기업들의 경쟁이 사생활을 건 싸움의 형태로 전개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91년 7월 세계적 컴퓨터 기업인 IBM이 이 분야에서 기술적 우위를 가지고 있는 애플사와 굴욕을 무릅쓰고 제휴했던 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아 있다. 현재 멀티미디어 개발에는 컴퓨터쪽에서는 IBM · 애플 · 인텔 · 마이크로소프트 등이 치열하게 경합을 벌이고 있고, 가전쪽에서도 덴마크의 필립스와 일본의 소니가 정력을 쏟고 있다.

이런 세계 거대기업들이 멀티미디어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는 앞으로 멀티미디어 제품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면 그동안의 정보통신산업의 판도가 뒤바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일반 가정의 경우 여태까지는 컴퓨터 텔레비전 오디오 비디오 등을 각각 따로 구입해야 했으나 앞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기존 텔레비전 시장 등이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가정에서 간단히 사용하기 위해서는 멀티미디어컴퓨터(MPC) 또는 컴퓨터가 부착된 텔레비전 한대만 구입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게 된다.

이와 함께 소프트웨어 분야도 엄청나게 큰 시장이 새로 형성될 것으로 예상되기도 한다. 현재 쉽게 예상되는 것은 교육용 시장과 일반 업무용 시장, 그리고 게임기 분야에서 새로운 혁명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이 파급효과가 신문 방송 등 미디어산업 전반에까지 확대될 것이라는 점이다. 신문의 경우 멀티미디어 기법을 이용하면 앞으로 취재현장에서 기사뿐 아니라 사진, 현장의 비디오화면 및 소리까지 컴퓨터로 전송하는 것이 가능해 본격적인 전자신문의 등장이 가능해진다. 방송의 경우에는 기존의 값비싼 방송기자재가 불필요해져 방송제작 기법에 혁신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또 적은 자본을 가지고도 방송사를 설립하는 것이 가능해져 한정된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는 전문방송시대를 열 수도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멀티미디어 시대가 일반 대중에게 체감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어느정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먼 미래가 아니다. 95년경이 되면 멀티미디어용 하드웨어의 값이 현재의 VCR 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2000년대가되면 다양한 소프트웨어들이 일반인에게 공급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현재의 텔레비전이 그랬듯이 멀티미디어는 우리가 거부하든 그렇지 않든 하나의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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