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사의 ‘5공 회귀’염불소리
  • 백담사·서명숙 기자 ()
  • 승인 1990.10.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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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3천여명 앞에서 치적 자랑·6공 간접 비판 …“정치일선 복귀 노린 것 아니냐”

 ‘백담사가 움직인다’ 절간으로 ‘유배’당한 후 두 번째 한가위를 보내는 全斗煥씨의 근황과 심경에 묘한 변화가 일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全統이 盧統을 대놓고 비판한다더라” “ 곧 하산 한다더라” “자기 선전에 여념이 없다더라”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소문은 사퇴정국 이후 두달 가까이 ‘실종위기’로까지 표현되는 가을정국의 허를 찌르고 있다. 소문은 일단 정치가십의 수준을 넘어서 있다. 더구나 그 진원지가 정치권 상층부가 아닌, 일반 국민이니 사태는 심각해보인다. 한 독자는 ≪시사저널≫에 보낸 편지에서 “백담사에서 연일 수천명을 모아놓고 대중집회를 연다는 데 왜 그 사실을 언론에서 보도하지 않느냐”고 강하게 질책했다. 백담사가 과연 움직이기 시작했는가, 거기에선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기자가 강원도 인제읍 용대2리에 도착한 것은 추석을 눈앞에 둔 어느날 아침 9시, 백담사에서 8㎞ 떨어진 백담사 입구 주차장 어귀의 경비초소에서 일단정지를 요구받았다. 전두환씨 개인방문객이 아닌 한, 이곳에서 방문접수를 한 뒤 백담사측이 제공하는 소형버스로만 올라가도록 규제하고 있었다.

 

“방문객의 대부분은 대구·경북지역 사람”

 전경으로부터 교부받은 번호표에는 ‘신도대표…’라고 적혀 있었다(일반방문객 개방조치는 사찰에 장기간 신도출입을 규제할 수 없다는 백담사측의 건의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나 신도임을 확인하는 절차는 없었다. 대신 주소와 방문목적을 묻고 난 뒤 방문객 수 4백명이 채워져야 절로 출발하는 방송으로 호명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일러주었다. 나중에 백담사 주지스님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4백명이라는 숙자는 “어르신으로 하여금 여러 차례 설법에 나서는 번거로움을 피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건이 흐르면서 주차장은 서서히 대형관광버스로 메워지기 시작했다. ‘ㅇㅇ지역 노인복지대학’ ‘ㅁㅁ세탁소연합회’ ‘ㅅ ㅅ지역 어머니교실’ ‘애향군인회’등 깃발을 매단 이 버스들은 번호판도 대구 인천 강원 경기 등 각양각색이었다. 그러나 용대리의 한 주민은 “관광객의 거의 대부분이 대구·경북지역 사람들이고, 대개 전씨를 동정하거나 지지하는 사람들”이라고 귀띔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방문객은 동네나 단체별로 돈을 모아 온 사람들, 여행사 관광코스를 택해 온 사람들, 개인적으로 온 사람들로 대개 세 형태, 대구 노인대한 그룹의 任次順(경북 경산군)할머니는 “설악산 관광도 하고 대통령 지낸 양반도 본다길래 2박3일에 3만5천원씩 걷어서 왔다”고 말했다.

 숫자를 채운 방문객들이 전경의 지시에 따라 ‘두줄로 나란히 서기’를 하고 인원점검을 한 뒤 15대의 소형버스에 30번씩 나눠타고 출발한 시각은 10시30분경, 백담사측에서 무료로 운행하는 이 소형버스 중 백담사 소유는 3대뿐이고 나머지는 전국 각지의 절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한다. 백담계곡을 경비하던 한 의경은 “버스 한 대 경비로 매달 2백만원씩 나간다. 거의 3천만원 정도 들지만 여기 오는 관광객이 절에 시주하는 돈으로 충당하고도 남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백담사는 더 이상 단순한 사찰이 아니라 엄청난 관광수입을 올리는 ‘백담그룹’이라는 것이다.

 계곡이 거의 끝나는 마지막 다리에서 대닐 참배객들은 다시 2백여m의 진창길을 걸어 백담사 앞 3백m 전방의 일주문 경비초소에 집결했다. 한쪽에는 ‘설악산 국립공원 백담사 입구’라는 팻말이, 다른 한쪽에는 ‘백담사 입구’라는 팻말이, 다른 한쪽에는 ‘백담사 참배요령’의 게시판이 붙어 있다. 참배요령에서 ‘백담사 사정에 의해 일체의 사진촬영이 금지되오니, 사진가와 녹음기 반입을 일체 금한다’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다시 두줄로 정돈한 방문객들은 선발대로 들어간 각 방문팀별 대표가 경호책임자에게 주소와 방문목적을 진술한 뒤인 11시쯤에야 비로소 경내에 ‘진입’했다.

 방문객을 맞는 주지스님이 “절에 오셨으니 일단 대웅전에 들러 부처님 뵌 뒤 ‘각하’의 법문을 들으라”고 미리 일렀지만, 방문신청서에 ‘신도대표…라 적은 방문객들 가운데 대웅전 안에 들어가 절을 하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전두환씨가 “法文’을 펼 임시 가건물로 달려가 먼저 좋은 자기 잡기에 바빴다. 이 가건물은 일반 방문객을 맞으면서 수백명을 한데 수용할 큰 장소가 없어 푸른 비닐로 하늘을 가리고 베니어판으로 급조한 것이지만, 수용인원 6, 7백명의 꽤 큰 규모였다.

 가건물이라 집기 등속은 거칠고 조잡했다. 그러나 방문객은 바닥에, 전두환씨 내외는 2겹의 널판대 위에 의자 2개를 나란히 올려놓고 1m높이의 연단을 사이에 두고 앉도록 배려한 구조는 청와대 접견실을 고스란히 옮겨온 듯했다. 그 광경은 5공과 6공의 대통령 이미지 작업에 깊숙히 관여했던 한 고위관리의 말을 떠올리게 했다. “5공시절 전두환 대통령의 이미지 관리는 정권창출 과정에서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탓에 철저히 권위주의로 일관했다. 게다가 즉흥적으로 말하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실수를 막기 위해 참모들은 의도적으로 방문객들과의 거리를 가능한 한 멀게, 자리는 높게 배치해 권위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전직 대통령은 방문객이 고대하듯 금방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다. 주지스님이 그 공백을 메꾸느라 ‘어르신을 맞는 예의’를 비롯해 佛家의 교훈을 들려주는 과정에서 해프닝이 벌어졌다. 대구 근처에서 왔다는 한 할아버지가 방문객들 틈에서 벌떡 일어나 “여기 온 사람들은 모다 아침부터 굶고 1천리, 2천리길을 왔다 아인교, 스님 잡담이나 듣자고온 게 아니다 이말이요”라고 항의하고 나선 것이다.

 절에서 와서 주지스님의 말을 ‘잡담’으로 치부하고 오히려 이절에 기거하는 객을 주인으로 여기는 엉뚱한 이 항의는 대다수 백담사 참배객의 방문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당황한 스님은 “어르신은 지금 아침 공양중이니 곧 나오실 것”이라 해명하며 “기다리는 정성이 지극하면 이내 나오실 것이니 천수경을 외며 정성을 보이자”고 즉석 제안했다. 

 

1시간만에 나타난 ‘어르신’

 천수경을 외는 소리가 갑자기 절 안을 뒤흔든 지 10분이 지나, 드디어 전두환씨 내외가 경호원들이 파라솔을 받쳐들고 엄호하는 가운데 거처인 萬海堂을 나와 집회장에 들어섰다. 이때가 정오께. 두 내외는 첫눈에서 상당히 건강해보였다.

 연한 미색이 감도는 하얀 실크 한복 마고자 차림의 전두환씨는 “추석 준비로 바쁘실 텐데 먼 곳까지 오신 여러분은 모두 정이 많은 분들”이라고 운을 뗐다. 이어 그는 유배 초기의 몸고생과 마음고생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 내외가 자발적으로 원해서 찾아든 백담사행이 아니었지 않는가. 이런저런 섭섭한 것, 답답한 것에 생각을 쏟다보니 우리 내외가 둘 다 건강도 상하고 마음도 상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훗날을 위해서라도 건강해야 한다.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 남을 미워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탓하지 말라’는 스님들의 가르침을 실천하려 애쓰며 고비를 넘겼다. 정 억울한 마음이 들 때는 지금 겪는 이 고통이 전생에 지은 ‘업’때문이겠거니 하고 마음을 다랬다.”

 “이젠 우리가 전생의 업보를 어지간히 죄닦음한 모양이다. 마음도 편해졌고 이렇게 여러분이 찾아주고, 무엇보다 우리 내외가 10년 전의 건강을 되찾았다. 사실 천국과 지옥, 천당과 극락이란 것도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살아서 겪는 것이라는 걸 느꼈다. 사실 내가 지금 이 누추한 곳에서 여러분을 맞고 있지만, 마음먹기에 따라선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6, 7백명을 한꺼번에 맞을 수 있는 큰 응접실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대목에선 현재의 국면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 국민이 부지런하고 재주 많고, 많은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가장 나쁜 점은 ‘남의 탓을 하는 것’이라고 일갈하며, 그동안 매스컴에 많이 등장했던 예의 ‘움막집 아이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나는 대구에서 가난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움막집 아이로 태어났지만 다행히 가난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부자가 왜 부자가 되는지 곰곰이 연구하라는 아버님의 가르침 때문에 무던히 노력하며 살았다. 덕분에 나 혼자의 노력으로 육사도 들어가고, 들어갈 땐 시원찮은 성적이었지만 계속 노력해 장교임관 후에는 누구보다도 빨리 진급했다. 동기생 중에서 별도 제일 빨리 달고, 많이 달고…. 백담사도 이렇게 가장 먼저 와서 먼저 인생공부를 하고 있지 않느냐”며 농담을 던지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특히 ‘동기생중…백담사도 가장 먼저 와서’라는 대목은 듣기에따라서는 ‘동기생’을 염두에 둔 뼈있는 농담으로 들리기도 했다.

 “빨갱이의 수법이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데모하는 놈도 남의 탓만 하도록 선동한다. 그들은 서민이 못하는 건 나쁜 재벌놈 탓이고, 농민이 못하는 건 농민이 생산한 쌀을 미국에다 공짜로 갖다바치는 놈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아무 것도 모르는 무식한 이야기다. 사실 미국사람은 쌀을 안 먹는다. 공짜로 쭤도 안 먹는다.” 이대목은 요령부득의 말이어서 해득할 수 없었다. 다만 5공 당시 외국산 농축산물 수입을 둘러싸고 운동권이 반발했던 일을 염두에 둔 발언이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이 갈뿐,

 어쨌든 20분여에 걸친 신상발언은 한마디로 ‘타의로 백담사에 유폐된 억울함’을 ‘불교의 가르침에 의존해서 이겨왔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지난 2월, 전씨가 광주항쟁 당시 희생된 무주고혼들의 영혼을 달래려고 지극정성으로 백일기도 끝에 천도제까지 올렸다는 보도가 도하 각 신문을 장식한 바 있다. 그러나 이날의 법문에서 광주항쟁이나 삼청교육대 훈련중의 억울한 죽음, 82년 대통령 경호비행 훈련연습 중 추락사고로 인한 특전사 53명의 죽음 등 그의 집권시절에 있었던 수많은 문제에 관한 悔悟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업보’를 말하면서도 ‘현생에서 저지른 과오’가 아닌 ‘전생의 죄’만 거론했을 뿐이다.

 

서울올림픽 후 선진국 따논 당상이었다.


 정작 ‘본론’은 그 이후부터였다. 그는 요즘 가장 힘주어 얘기한다는(일부 방문객에 의해 ‘자가선전’으로 비판받는 게 바로 이 대목이다) ‘국가경제에 대한 걱정’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이 대목은 물가고, 경제성장 둔화, 국제수지 악화 등 최근의 경제상황과 관련, 전두환씨의 ‘자신감과 현정권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그 요지는 대강 이렇다.

 “절에 있으니 세상 돌아가는 것도 잘 모르고 신경도 안 쓰니 마음이 참 편안하다. 그런데 단 한가지 걱정되는 건 이 나라 경제상황이다. 수출도 부진한데 물가마저 뛰어 서민이 살기 힘들어졌다고 하더라. 도둑도 많아지고 깡패가 날뛰어 민생치안도 엉망이다. 서민이 살기 힘들어지니 ‘사흘 굶어 남의 담 안 넘는 집 없다고 강도로 변하고, 제일 쉽게 돈 버는게 뭐냐. 깡패가 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88올림픽 이후 선진국이 되는 길이 보장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때 국내외 전문가가 이구동성으로 올림픽을 치르고 나면 최소한 2년, 늦어도 5년 이내에 확실한 선진국으로 도약한다고 장담했다. 내가 처음 나라살림을 맡았을 때만 해도 오일 쇼크가 닥친 뒤라서 참 어려웠다. 외국에 진 빚이 너무 많아 파산선고를 하려고까지 했다. 그런데 86년부터 국제수지 흑자가 50억달러, 87년에는 1백억달러를 넘어섰다. 그쯤 되니 돈을 안 빌려준다던 나라들이 저마다 이자를 깎아주면서 돈 좀 빌려가라고 하더라. 수출도 잘 되고, 시실 그때 고민거리는 달러를 어떻게 써야 하느냐였다. 올림픽 후에 우리 국민이 두손 딱 붙들고 아무 일도 않하고 놀기만 하더라도 경제 선진국은 보장된 길이었다. 87년 대선을 치른 후에도 돈이 많이 남았다. 그런데 정치인, 지도자들이 제대로 못하고 서로 싸우기나 하는 바람에… 지금은 모르긴 몰라도 그 많던 돈이 다 거덜났을 것이다. 우리 경제가 참으로 위기다.”

 재임 초기, 훗날 아웅산 폭발사고로 순직산 金在益 경제수석에게 물가안정의 중요성을 주지받은 뒤 재임기간 내내 ‘가히 순정적 열정’으로 물가안정 기조를 밀고나갔다는 그는 최근 서민이 피부로 느끼는 경제난을 5공하의 물가안정과 비교하며 ‘명예회복의 계기’로 최대한 활용했다.

 이런 전씨의 ‘전략’이 주효한 탓인지, 요즈음 서민의 피부에 와닿는 물가고가 워낙 심각한 탓인지 청중 가운데 상당수가 그의 ‘경제위기론’에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청주에서 1일관광으로 왔다는 李金姬(43)씨는 “그럼, 전대통령시절에 최소한 물가 하나만은 확실히 잡았지”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한 경제평론가는 전씨 스스로 자부하는 ‘치적’에 반론을 제기한다. “일단 표면적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5공처럼 별다른 경제정책이 없던 시기도 없었다. 5공의 경제성장은 ‘3저’라는 기막히게 좋았던 대외적 여건, 3공 이후 축적된 생산력과 독재정권이 강요한 저임금이 낳은 결과다. 또6공이 겪고 있는 경제문제도 따지고 보면, 국제수지가 엄청난 흑자를 기록한 5공말기에 설비투자와 기술재투자를 하지 않고 부동산투기 등에 흘러가는 걸 방치했기 때문이다. 결국 5공이 3공의 결실을 따먹었고, 6공경제에 악의 씨를 뿌린 것이다.”

 그가 50여분에 걸친 법문을 끝내고 좌중의 박수에 손을 흔들어 답하며 퇴장한 뒤. 이번에는 전두환씨 내외와의 무료 기념사진촬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건물을 나오자 촬영장소인 대웅전 앞마당 한쪽 켠엔 이미 40명을 단위로 한 10개조의 사진촬영 순서가 붙어 있고, 방문객은 주지스님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사진촬영에 들어갔다.

 두 내외는 각 조가 자리를 정돈하고 나면 촬영 직전에 만해당 입구에 비닐로 잇댄 임시 천막에서 나와 참배객 두셋과 대표악수를 한 뒤 기념 촬영을 했다. 그중에는 전씨의 손을 붙들고 “다시 정치를 하셔야 할 텐데” “제발 건강하세요”라고 간곡하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촬영이 끝나면 들어갔다가 다음 조가 자리정돈을 하면 다시 나와 기념촬영을 하고… 꼭같은 일이 10여 차례 반복되었다. 이무료 기념사진은 한달 뒤 방문팀 대표의 집으로 우송된다고 한다.

 

하산 이후가 더 문제

 첫 방문팀 4백명의 ‘백담사 순레’는 이렇게 끝났다. 그러나 전두환씨 내외는 이런 식의 행사를 하루에 최소한 서너 차례, 많을 때는 7,8차례 치러낸다는게 백담사측의 이야기였다. 결국 전씨는 하루에 3천여명의 참배객을 맞아 70여 차례의 사진촬영을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동네사람들이 설악산 관강을 간다길래 따라나섰다가 얼결에 이곳까지 왔다는 千鳳圭(53·관악구 봉천동)씨는 “전씨가 다시 정치일선에 나서는게 아니냐. 그렇지 않다면 하루에도 수십 차례식 이 고역을 치르고 사진까지 보내주겠느냐”고 나름대로 그 근거를 들이댔다.

 전씨는 풍문처럼 노정권을, 그리고 40년 친구인 노대통령을 노골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았다. 하산시기나 하신 이후의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도 없었다. 그러나 재임 동안의 자기 업적과시를 통한 간접적인 6공 비판은 서슴지 않았다. 백담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나마 자신의 세를 확인하며 또 다른 형태의 장외정치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언론은 지난여름부터 끈질기게 7.8월 하산설, 9월 하산설 등을 보도하고 있다. 조기 하산설은 최근 5공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이 수그러드는 사회분위기, 5공세력의 잇따른 귀국, ‘신당 창당설’과 맞물려 더욱 설득력있게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하산시기가 아닌 것 같다. 전씨가 최근 보이는 자신감을 감안한다면, 그의 하산은 단순한 자연인의 권리회복 차원이 아닌, 명예회복과 어느 정도의 활동역역 보장을 노리는 것일 수도 있다.

 백담사는 5공청문회가 끝난 지 1년여가 다되는 현 시점에서도 여전히 6공의 ‘짐’이 되고 있다. 그 ‘짐’은 5공을 역사 속에서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6공 스스로 자초한 ‘원죄’일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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