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한 시기 묘한 선택
  • 이흥환·서명숙 기자 ()
  • 승인 1990.10.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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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 처방’일단 효험

金大中 총재, 관심 집중시켜 위상 ‘회복’

 묘한 시기의 묘한 선택. 평민당 金大中 총재의 단식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왜 하필 이 시점에서, 다른 투쟁방법은 다 제쳐두고 굳이 단식을 택했는가. 단식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김총재가 택한 이번 단식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저항수단이 봉쇄된 가운데 선택의 여지없이 취한 최후의 투쟁방법은 아니라는 점이다. ‘옥쇄’와 같은 마지막 저항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상대인 여권을 가장 효과적으로 제압하는 최상의 ‘협상전략’이 아니냐 하는 의견이 많다.

 김총재 가까이에서 그의 정치행태를 줄곧 지켜보아온 한 야권인사는 김총재의 이번 단식이 정국의 위기상황을 의식해서 나온 행동이라기보다는 총체적으로 김총재 ‘자신의 위기’에서 탈출해보려는 ‘비장한 각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얽힐 대로 얽힌 정국을 돌파해보려는 단순한 목적이었다면 단식 외에도 범야권의 결집을 시도한다거나 대중집회를 통해 바람몰이를 하는 등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김총재는 구태여 단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지난 83년 5월 金泳三씨의 23일간에 걸친 단식은 눈에 보이는 ‘과실’을 얻어냈다. 단식도중에 김씨에 대한 연금조치가 해제됐고, 이 단식을 계기로 양김씨의 ‘공동문화투쟁’선언이 나왔으며 민추협의 결성을 촉발시켰다. 87년 4·13호헌조치에 반대한 천주교 사제들 및 이에 동참한 李基澤씨 등 야권 정치인들의 단식 역시 6월항쟁으로 이어져 6·29선언을 이끌어내는 촉매역할을 한 바 있다.

 김총재가 택한 단식의 과실도 일단 눈안에 들어왔다. 김총재가 단식에 돌입한 8일 이후 정가에는 ‘단식정국’이라는 새로운 造語가 하나 생겨났다. 보안사파동·남북축구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김총재의 단식은 강한 흡인력을 가지고 단연 뉴스의 초점이 되고 있다. 이것이 첫번째 변화다. 지루하게 전개되던 사퇴정국이 한순간에 단식정국으로 탈바꿈했고, 그동안 정국의 언저리를 맴돌 뿐 중앙에 자리잡지 못했던 김총재가 일거에 정국의 ‘핵’으로 부상한 것이다. 김총재가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으나 13일 보라매집회에서도 이런 현상은 여실히 나타났다. 형식이야 어떻든 실질적으로 김총재는 범야권 연대투쟁의 정점에 서게 된 것이다.

 재야 일부에서 김총재의 단식을 의혹에 찬 눈으로 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ㅅ대학의 ㅇ교수는 김총재의 단식에 대해 “보안사 사찰파동은 현정권 퇴진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호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김총재의 단식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노정권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의 기회가 희석된 것이다. 관심의 초점은 단식으로 돌려졌고 결국 민자당에 대한 심판을 유예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분석한다.

 

민자당의 ‘변화’이끌어내

 김총재 측근들도 단식이 겨냥한 것 중의 하나가 김총재에 대한 ‘관심집중’이라는 점은 부인하지 않으나 재야쪽과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즉 정권을 유도하는 결정적인 견인력은 역시 김총재에게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야권통합 추진 과정에서 김총재의 야권 내 위상이 다소 떨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단식으로 상황은 다시 역전되었다.

 민자당이 핵심 당직자를 교체하는 등 변신을 꾀한 것도 큰 변화 중의 하나다. 사퇴정국하에서 평민당 김총재의 결단만을 요구하며 미동도 하지 않던 민자당이 협상테이블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단식이 이끌어 낸 가장 큰 결실을 수도 있다. 김총재는 여권에 내각제 개헌 포기 선언과 지자제 전면실시를 요구하면서 이는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조건임을 강조했다. 이 두가지 요구사항은 민자당 내 계파간 갈등 노출시키는 효과를 가져왔고, 더불어 내각제 개헌을 둘러싼 불투명한 정치일정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면화시켜야 하는 상황전환을 유도했다.

 평민당은 야당의원들의 사퇴서 제출 이후에도 정국의 최대 현안은 내각제 개헌이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김총재의 단식은 결국 내각제 정국에 종지부를 찍고 국면을 전화시켜보려는 의도에서 단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은 김총재가 단식에 들어간 지 나흘째되던 날인 11일 김총재를 찾아갔다. 당초 김총재의 단식이 선언되었을 때 최대의 관심거리는 과연 언제쯤 어떤 형태로 김대표의 반응이 나타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김대표는 발빠르게 움직였다. 예상 외로  빠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 정가의 일반적 평가이며, 평민당에서는 이를 두고 김대표의 ‘4일만의 굴복’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이제 문제의 핵심은 양김의 ‘50분간 밀담’내용으로 압축된다.

 김대표는 현재 민자당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대표권을 행사하고 있는지 대해서는 당내에서조차 의견일치가 되어 있지 않다. 아직도 김대표는 여권의 ‘변두리’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평민당 김총재도 마찬가지다. 3당합당 이후 김총재는 정국흐름에 휩쓸리고 떠밀려다녔을 뿐 정국의 물줄기를 이끌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사퇴하는 쐐기를 박아 보긴 했으나 효과는 신통치 않았다.

 양김씨의 50분간 만남을 예사롭게 볼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자신들의 영향력이 현저하게 약화되었다고 판단한 두 사람이 변화의 필요를 느꼈고, 그 변화의 내용과 시기 등에 대해 심도있는 얘기가 50분 동안 두사람 사이에 오갔으리라는 점은 쉽게 추측해볼 수 있다. 김총재가 김대표에게 내각제 개헌 포기와 지자제 실시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제2의 6·29선언’의 주인공이 되리라고 제안했음직하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고, 김대표가 김총재에게 내각제 불가와 지자제 실시에 대한 확신을 주는 데 주력했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보안사 파문정국 희석시키는 게 아닌가”

 김총재의 단식 이후 나타난 또 하나의 변화는 야권통합 논의가 일단 ‘결렬’로 판결났다는 사실이다. 재야는 통추회의의 대표단을 해체했고, 공공연하게 “야권통합은 무산됐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 더이상 재야쪽으로부터도 ‘통합유보’라는, 일말의 ‘희망’썩인 단어조차도 들어보기 힘들게 됐다. 김총재는 어렵게 마련된 지난 6월의 3자회동 때에도 ‘선통합 후조정’이라는 자신의 입장을 끝내 고수하면서, 바로 이튿날 시작할 단식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측의 반응을 보면 김총재의 단식이 갖는 성격의 일면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민주당으로서는 정국의 돌파구를 찾겠다는 김총재의 단식을 드러내놓고 비판하지는 못 할 처지다. 더욱이 아직까지는 김총재가 야권통합의 한 파트너로 남아 있다. 따라서 민주당은 표면상으로는 “단식할 수밖에 없는 심정에 공감한다”는 정치적인 수사를 동원하고, 이기택 총재가 김총재를 위로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의할 점은 민주당이 김총재의 단식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한다는 선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이는 상황인식은 같이 하지만 김총재의 단식전략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민주당의 李 哲 사무총장은 “단식이란 다른 투쟁방법이 없을 때 막다른 골목에서 택하는 것이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또 김총재의 정치 스타일도 원래 그런 것이 아니다.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납득하기 힘든 투쟁방법을 선택한 이유는 다목적인 듯하다”고 말한다. 이총장은 또 평민당 내 통합파의 압력이 거세지기 시작한 무렵에 단식을 결행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金正吉 의원은 “지난번에도 김총재는 국회 해산과 조기총선을 요구하는 대신 야권통합 문제를 부각시킴으로써 사퇴정국을 통합정국으로 그 물꼬를 틀었다. 이번에도 보안사 파문정국을 희석시키지 않을까 우려된다”면서 “육십 중반의 나이에 단식이란 극단적 방법을 선택한 김총재의 충정은 이해하나 지금 노정권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투쟁방식은 대외적으로 연대해 싸우는 것이며 야권통합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못 박는다.

 김총재의 이번 단식은 표면적으로는 노정권 퇴지운동의 전초전으로 비쳐지고 있다. 하지만 미묘한 시기에 비정상적인 방법이 동원 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김총재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한편 다시 정국의 중심부로 복귀하려는 몸짓의 하나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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