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통일의 철학이 필요하다
  • 김지하 (시인·본지칼럼니스트) ()
  • 승인 1990.10.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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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통일에 대한 열망이 드높다. 그러나 통일이 정말로 될 것인가. 통일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통일에 확신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주변정세를 보면 통일이 빨리 될 것 같기도 하고 남북이 수작하는 걸 보면 통일이 쉽게 될 것 같지 않기도 하다. 민족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통일은 당연한 귀결이지만 주변열강의 재빠른 변화를 보면 우리의 앞날이 걱정되기도 한다. 백년 전, 서세동점 시대에 우리 민족은 국권상실을 앞에 놓고 비슷한 걱정을 했는데, 백년 뒤, 서양의 세계지배가 쇠퇴하고 아시아의 운세가 앞에 놓고 또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한다. 그래서 걱정한다. 역사는 똑같은 되풀이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걱정한다. 왜 이렇게 되는 걸까? 사상의 문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독일을 봐라 ! 우리도 독일처럼 하면 된다”

 그래서 동방정책 비슷하게 북방정책을 내걸고 중국에 접근하고 소련과 수교하여 북한에 우회적 압력을 가하면서 북한에 여러가지 교류제안을 마치 미끼던지듯 하고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말한다.

 “한·소수교를 서두른건 잘못이다. 북한을 막힌 골목으로 몰아넣는 것은 잘못이다”

 아니다다를까. 북한은 남한에 대해 지지부진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일본과 전격적으로 수교를 진행하고 바짝 미국에 접근하고 있다. 남북쌍방이 다 자주적인 접근 노력보다는 외세와의 결탁을 주로 하고 있다. 왜 이렇게 되는 걸까. 역시 사상의 문제이다.

 세계사는 크게 변하고 있다. 자본주의·사회주의가 다같이 쇠퇴하고 있으며 이 둘이 함께 발 딛고 있는 산업문명·기계문명이 몰락의 위기를 맞고 있다. 문명의 중심이 동아시아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명백한 대세이고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문명의 먼동이 터오리라는 예언도 무성하다. 이 변화를 타고 한반도 주변 열강은 모두 저 나름대로 어제의 ‘아니다’에서 오늘의 ‘그렇다’로, 어제의 ‘그렇다’에서 오늘의 ‘아니다’로 현란하게 변모하고 있다. 이 복잡한 변모 속에서 남한은 자본주의체제를 고수하면서도 평등사회에로의 구조변혁의 강한 요구에 부딛히고 있고 북한은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면서도 개방과 자유화의 강한 요구에 밀리고 있다. 찢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희생의 조짐인가. 이 또한 사상의 문제다.

 민족은 자칫하면 지나간 분단시대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복잡한 이중구조 속에 사로잡힐 수 있으며 민중은 까딱하면 극단적인 집단적 정신분열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이 위태로운 분열과 변화 속에 참다운 분단의 처방, 참다운 통일의 전망이 숨어 있다. 이것을 식별해내는 것, 이것이 바로 사상의 문제다.

 백범 김구 선생은 일찍이 “통일에는 통일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통일의 철학이란 무엇일까. 민족은 개인과 마찬가지로 한 생명은 ‘이것’ 또는 ‘저것’, ‘아니다’ 또는 ‘그렇다’를 양자택일하도록 강요당한다. 그러나 ‘이것’을 택해도 고통, ‘저것’을 택해도 고통, ‘아니다’ 해도 처벌, ‘그렇다’ 해도 처벌이다. 생명은 분열해버린다. 이제 알 수 있다. 생명은 본디 ‘이것’이면서 ‘저것’이요 ‘아니다’이면서 ‘그렇다’이다. 살아있는 생명은 개체와 전체, 자유와 평등, 인정과 변화를 함께 요구하고 함께 구현한다. 이러한 살아있는 삶의 컨텍스트를 논리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분명 불연속이다. 그러나 주체적으로 통합된 삶의 경험으로서는 불연속적 연속이다. 민중은 바로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이중구속의 민족분단에 대한 처방은 이러한 불연속적 연속의 모순적 메시지일 수밖에 없으며 참된 민중의 삶에서 이 메시지는 드러난다. 우리가 세계사와 주변 열강의 숨막히는 변화 속에서 남북의 평화적 공존을 추구할 경우, 그 공존의 컨텍스트는 개체와 전체, 자유와 평등, 통제와 경쟁, 주체와 외세 등에 관한 ‘아니다·그렇다’의 역동적 체계일 수밖에 없으며 더욱 넓은 메타컨텍스트가 내제하는데 이 둘 사이의 연관 또한 ‘아니다·그렇다’의 관계가 된다. 이른바, 논리계형이다. 그러면 남북 공존의 메타컨텍스트는 무엇일까.

 그것은 공존을 질서지우면서도 공존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또한 넘어서는 완전통일, 새 문명을 건설하는 창조적 통일의 전망이다. 분단과 공존, 공존과 통일의 관계 안에서 산업문명·기계문명에 위해 분열된 인간과 우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을 ‘아니다·그렇다’의 불연속 연속으로 통합하여 정신분열·노동소외·환경오염 함께 극복할 참다운 민족 주체의 보편적 세계관, 곧 통일의 철학이 드러난다. 그것은 창조적인 질적 확장 진화사상이다. 완전통일이 아니라도 공존만 할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같은 창조적 통일의 전망과 그 견인력이 없다면 급변하는 세계관계속에서 공존 그 자체가 위태롭다. 그래서 고 장준하 선생은 “우리의 민족통일은 통일이 이상이다” 라는 말을 남긴 것이다.

 여기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될 일이 한 가지 있다. 백여년 전, 동양문명의 해체와 서세동점   사이의 그 엄혹한 분열의 시대에 수운 최제우 선생이 ‘아니다·그렇다’(不然基然)라는 창조적 진화사상을 남긴 것과, 해월 최시형 선생이 “궁을이 문명을 되돌린다”(弓乙回文明·궁을은 ‘아니다·그렇다’의 이치를 압축한 동학의 상징이다)라는 의미심장한 글귀를 남겼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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