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의 단편화와 즉흥성 부추긴다”
  • 강철주(출판저널 편집부장) ()
  • 승인 1992.0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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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가 본 베스트셀러 풍속도 … 非논리 反산문 경향

라즈니쉬의《배꼽》과 이은성의《소설 동의보감》으로 두 정점을 보인 올해의 베스트셀러시장은 올해만의 특징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정확한 판매부수 산정이 거의 불가능한 현재로선 그나마 가장 믿을 만한 서울 시내 9개 대형서점의 통계를 취합해 작성된 서점영업인협의회의 베스트셀러 집계(책이름 뒤에 순위 표시)와《시사저널》이 격주로 발표하는 전국 베스트셀러 집계가 그 같은 사정을 잘 보여준다.

대충 그 목록을 일별할 때 우선 눈에 띄는 특징은《배꼽》(1위)류의 짧게 끊어 읽기 편 한 책이 두드러진 강세를 보였다는 점인데, 이는 최근 몇 년 사이의 우리 독서시장에서 꾸준히 반복되고 확대 재생산된, 상업적으로 성공한 책들의 대체적인 현상이다. 물론 이 범주에 속하는 책들이라 해서 한결같지는 않아서 가령, 아예 우주적 농담을 표방한《배꼽》에 비해《장자-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3위)는 보다 진지하다.

그러나《사랑한다는 말보다 더욱더 마음 절이는 것은 간절한 웃음이다》(11위) 같은 무명시인의 통속시집, 방송가의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모은《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14위) 등을 포함해 이 책들은 독자 사회학적 지향이라는 점에서는 대개 통일선상에 놓여 있다. 그것들은 즉흥적인 책읽기, 혹은 책읽기의 인스턴트화를 조장하면서 우리 베스트셀러시장의 지형도를 통속성 짙은 색조로 물들인다.

《배꼽》《장자》《파라독스 이솝우화》(12)위는‘깊은’생각을‘쉽게’전달한다는 애초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철학적 진리나 어떤 정신적 가치들을 그저 읽기 편한 한낱 우화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다(80년대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였던《철학 에세이》와 비교해보라). 또《사랑한다는 말보다 …》《내가 여전히 나로 …》(15위)《누군가에게 그 무엇이 되어》(16위)《친구가 화장실 갔을 때》(17위)는‘시의 시대’로 일컬어지던 지난 연대에  박노해 이해인 도종환 서정윤 등에 의해 지펴졌던 시집 대중화의 열기가 그동안 얼마나 가파른 통속화의 내리막길로 치달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정신적 불균형 위험 크다
베스트셀러의 통속성은 물론 그것 자체로 주목을 끌 만한 일이 못된다. 그것은 으레 그렇기 마련인 현상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 책들에 잠복해 있는 非논리 反산문의 경향이 우리들의 주목을 끌며, 그것이 바로 얼핏 보기엔 서로 다른 철학우화류와 통속시집을 한 부류로 묶어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예컨대 이 책들은 언제 어디서나 펼쳐볼 수 있도록 돼 있어서 책읽기의 연속성, 즉 일관된 논리로 길게 전개되는 산문적 흐름을 좇는 끈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대단히 짧은 호흡의 문장 속에서 명상과 역설이라는 초논리의 세계를, 혹은 앞뒤 문맥을 꿰맞추기 어려운 천박한 수사학적 감상주의를 드러냄으로써 사고의 단편화와 즉흥성을 조장한다. 책을 읽는 일이 언제나 진지한 것일 필요는 없지만 이 책들의 경우에는 책읽기의 진지함이 끼여들 틈이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책들은 특히 교육환경을 비롯한 제반 사회적 여건 탓에 한번도 치열한 논리를 경험치 못한 대다수 청소년 독자들(이들이 우리나라 베스트셀러 창출집단의 가장 큰 몫을 차지한다)에게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폭넓은 인문적 교양에 기초하지 않은 사회과학도서의 편식이 초래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정신적 불균형의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이 책들의 철학적 문학적 진정성이 과연 신뢰할 만한 수준인가는 물론 따로 논의해야 할 부분이다.

지난해 첫선을 보일 때부터 인기를 끌며 출판담당 기자들에 의해‘올해의 책’으로도 선정된 바 있는《소설 동의보감》(2위)의 성공은 뜻밖은 아니지만 조금은 특별한 경우에 속한다. 이 책은 소설적 재미나 등장인물의 매력이 워낙 빼어나기도 하지만, 지난해 소설부문 1위를 차지했던 박완서의《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가 주로 여성독자의 성원에 힘입은 바 큰 데 비해 그 독자분포가 연령이나 성별, 지적 수준과 무관하게 보다 광범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지금까지 어떤 한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드는 데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던 성인 남자들의 독자로서의 역할이 두드러졌다는 것인데, 이 같은 현상은 현존 인물들의 실명을 그대로 사용한 고원정의 가상정치소설《최후의 계엄령》(8위)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이는 앞으로의 베스트셀러 판도와 관련해서 이제 성인 남자들도 베스트셀러의 창출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특징적 현상으로 꼽을 만하다. 고은의 구도소설《화엄경》(20위)의 경우는 다소 예외인 것 같은데, 아마도 올 한해 동안 큰 붐을 이뤘던 일련의 동양고전 리바이벌 현상과 무관하지 않은 듯싶다.

착각 · 오해가 빚은 베스트셀러도
번역소설로는 버지니아 울프의《세월》(7위)과 헨리 밀러의《북회귀선》(18위)이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어 이색적이다. 에릭 시걸의《닥터스》(4위)와 앤 타일러의《종이시계》(6위)의 경우 그동안 국내에서도 꾸준히 인기를 끌어왔던 시드니 셸던류의 영미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게 주목을 끌 만한 것이 아닌 데 반해, 이 책들은 독자들의 폭넓은 사랑을 받을 만큼 대중적인 책이 못되는 데도 베스트셀러여서 눈길을 끈다.《세월》은 박인환의《목마와 숙녀》로 말미암아 그 작가와 작품이 이미 낯익다고 착각한 데서, 그리고《북회귀선》은 성에 대한 대담한 인식을 성에 대한 대담한 묘사로 오해한 데서 비롯된 독자들의 기대가 베스트셀러화 현상을 부른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밖에 이문열의《사색》(13위)과 신달자의《그대에게 줄 말은 연습이 필요하다》(19위) 의 경우는 80년대의‘이문열 신드롬’ ‘김용옥 신드롬’등과 맥을 잇는, 저자의 이름 자체가 일종의‘믿을 만한 상표’로 여져지던 현상의 90년대적 흔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5위)《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9위)는 판매량만으로 보면 대단하나 엄밀한 의미에서 베스트셀러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논외로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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