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분노에 백악관은 무덤덤
  • 워싱턴.김승웅 특파원 ()
  • 승인 1994.10.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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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핵 회담’ 자세 . 속도에 불만 표시…대세에 큰 영향 못줘

김영삼 대통령이 <뉴욕 타임스>와 가진 회견을 통해 터뜨린 미국에 대한 불만은 그 파장이 수그러들지 않을 것 같다. 워싱턴 정가의 관심은 김대통령의 불만이 지니는 강도보다는 불만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쏠려 있다.

 한마디로 의도적인 불만 표출이나 아니면 우발적(또는 즉흥적)인 불만 표시이냐가 관심인 듯 싶다. 그러나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이런 관심 표명을 유보하리만큼 외교적이다. 백악관이나 국무부 관리 가운데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처신하려 노력하고, 한국의 국내 정치 상황을 감안할 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넉넉하게 봐 주는 인사도 없지 않다.

미국, 공식 반응 자제한 채 관망
 그러나 국무부는 김대통령의 발언이 지닌 취지와 성격을 알아내려고 외교 경로를 통해 계속 점검하고 있다. ‘사건’이 벌어지고 사흘이 지난 10월11일 국무부의 정례 정오 브리핑 시간에 셸리 국무부 대변인과 <시사저널> 특파원 간에 주고받은 질의응답 속에서 이같은 미국의 입장과 시각을 편린이나마 읽을 수 있다.

 특파원 : 며칠 전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이 불만을 터뜨린 요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지금 제네바에서 진행중인 미.북한 고위급 회담과 관련해 답변해 달라.

 셸리 대변인 : 그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아직껏 갖고 있지 않다. 지금 제네바에서는 토요일에 이어 어제(10일), 오늘까지 회담이 계속 진행되고 있으며, 북한 핵 문제에 관한 회담 내용과 협상 단계 하나하나를 놓고 우리는 한국 정부와 대단히 밀접한 접촉을 유지해 왔다. 그 질문에 관해서는, 모든 가용한 외교 경로를 통해 문제를 파악하는 데 힘쓰고 있다.

 특파원 : 미국이 서투르게 북한을 핸들링하는 데 대한 한국측 불만이 김대통령의 발언을 통해 터졌다고 보지는 않는가? 예컨대 미국측 갈루치 대표는 핵전문가일 뿐 북한 문제 전문가가 아니고, 따라서 북한을 제대로 다룰 줄 모른다는 것이 이홍구 통일원장관 등 한국 고위 당국자가 시각이다. 또 이를 <뉴욕 타임스>가 보도했다. 이 점에 관한 국무부의 견해를 요청한다.

 셸리 대변인 : 방금 말한 대로다. 그(갈루치)는 강인하고 경험이 많은 협상가다. 그는 또한 완벽한 정보와 판단을 지니고 문제에 접근할 줄 아는 지식과 능력을 가진 인물인데다, 상황에 대한 확고한 이해와 감수성을 골고루 지니고 있다. 협상가로서 전적으로 신뢰를 받을 만한 인물이라는 것이 우리의 일관된 평가다.

 답변의 문맥은 미국 국무부 특유의 매끄러운 외교적 수사로 일관되어 있다. 그렇다고 갈루치에 대한 두둔과 변호를 단지 국무부의 부처 이기주의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좀더 확대 해석하면, 미국이 북한과 접촉하는 태도를 놓고 한국에서는 ‘천진하다’ ‘너무 신축적이다’라고 이러쿵저러쿵 하지만,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미국 정부의 입장은 ‘완벽하고’ ‘신뢰할 만한’ 인물이 추진하는 만큼 한국측 불만이나 간섭에 좌우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김대통령의 불만이 어디서 기인했는지는 계속 외교 경로를 통해 파악하겠지만, 대북 협상에 관한 한 지금까지의 자세와 속도를 바꾸지 않겠다는 미국의 단호한 통고라고 볼 수도 있다.

 국무부 대변인의 답변 하나를 놓고 집요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답변이 김대통령의 불만토로에 관해 미국 정부가 보인 최초의 공식 반응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기사가 <뉴욕타임스>에 보도된 직후, 중동을 순방하던 크리스토퍼 미 국무장관은 서울의 한승주 외무부장관에게 전화를 건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전화 내용이 김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미국측의 놀라움과 불만을 담고 있는 것인지, 미.북한 협상이 시작된 뒤 미국 국무장관이라는 인물이 한 차례도 서울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는 서울측 불만(<뉴욕타임스>보도)에 대한 그 자신의 해명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아니면 사건 이후 백악관이나 국무부 관리들이 주미 한국대사관 외교관들에게 보인 여유를 크리스토퍼 역시 보였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클린턴 행정부가 이번 김대통령 발언에 대한 공식 반응을 자제한 채 사건 추이를 관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미국측의 이런 자제나 침묵을 주미 한국 대사관측이 자칫 외교적 성과로 오판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남는다.

청와대.외무부 ‘불끄기 외교’에 진력
 <뉴욕 타임스> 보도가 있고 나서 이틀 뒤인 지난 10월10일(콜럼버스 데이로 휴일이었다) 한승수 주미대사는 대사관 정무과 소속 외교관들을 비상 소집해, 구체적인 대응 전략을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 한국측 외교관들은 백악관과 국무부를 전담한 한국 외교관들이 미국측 상대를 만나 김대통령의 발언이 <뉴욕타임스>와의 일문입답이 아니라 인터뷰 기자가 의역한 것임을 강력히 개진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이런 대응은 사건 발생 나흘이 지나서야 발언 경위를 밝힌 서울의 청와대 해명과도 상통한다는 점에서 청와대.외무부가 뒤늦게 ‘소방 외교’에 진력했음을 느끼게 한다. 한국 외교관들을 상대한 미국측 전문가들은 대체로 이해와 배려를 보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승수 주미대사는 10월12일 오후 윈스턴 로드 국무부 차관보를 만나 김대통령의 발언 경위와 배경을 설명했다. 로드 차관보를 만나기 직전 특파원과 가진 회견에서 한승수 대사는 김대통령의 발언 파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특파원 : 김대통령의 발언은 의도적이었는가. 아니면 즉흥적이었는가?

 한승수 대사 : 대통령 직에 계신 분이 어떻게 즉흥적일 수가 있겠는가. 다만 <뉴욕 타임스> 기자가 대통령의 발언을 너무 의역하여 추상화한 것 같다. 그 자리는 <뉴욕 타임스> 설즈버거 발행인이 동경지국장과 서울 특파원을 대동하고 청화대에 들어가 김대통령을 회견한 자리였다. 김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얼마 전 <뉴욕 타임스> 사설이 한국 정부 내에 있는 강경론자들의 입김 때문에 미.북한 협상이 난항을 겪는다고 한 데 대해 부당성을 지적했다. 다시 말해서, 클린턴 행정부쪽이 아니라 미국 언론의 보도 자세가 보이는 ‘천진함’과 ‘과잉 신축’을 탓했는데, <뉴욕 타임스>가 이를 클린턴 행정부 쪽으로 방향을 틀어 놓은 것이다.

 특파원 : 미국 정부가 보인 반응은?

 한승수 대사 : 일부 걱정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럴 때마다 “이봐! 이번 발언으로 오히려 북한에 대한 당신네의 입장이 더 강경하고 유리해 진 셈이야”라고 귀띔하고 있다. 사실 그렇잖은가. 또 사랑하는 부부도 어쩌다 한번 티격태격해야 금실이 더 좋아지는 법이고….

 한승수 대사의 이런 귀띔이 로드 차관보를 통해 과연 국무부와 백악관 수뇌들에게 어떻게 전달되고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또 한 가지 모를 것은 김대통령이 그토록 ‘대노’한 구체적 이유다.

 일단을 현안인 제네바 회담에서 문제의 사단을 찾는 것이 합리적일 듯 싶으나, 이 문제에 관한 한 이곳 한국대사관에는 대사의 함구령이 내려져 있다. 미국 언론들도, 국무부 대변인도 모르고 있다.

 결국 김대통령이 <뉴욕 타임스>와 회견한 지난 10월7일 직전에 제네바 회담장 주변으로 거슬러올라갈 수밖에 없는데, 유력한 용의선상에 오른 뉴스는 경수로 완공과 핵 재처리 시설 폐쇄시점이다.

 다시 말해서 특별 사찰 실시 시기를 경수로 장비가 북한땅에 발을 들이는 시점으로 하자는 한국측 요구가 경수로 완공 시점을 주장하는 북한측 요구에 밀린 데다, 미국이 이런 양보를 합의문 형식으로 만들어 북한과 교환했다는 것이 한갓 설이 아닌 사실로 판명됐을 경우를 상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은 이런 진상 규명이나 진의 탐색에 머무르리만큼 한가롭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김대통령의 직접 화법에 의한 불만 표시로 타결을 향해 치닫고 있는 제네바 회담에 제동을 걸기는 역부족이었다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金勝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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