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 수사가 남긴 상처와 절망
  •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4.1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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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대 ‘이적성 교재’ 사건 그후 / 내부 불신 깊어져 ‘곪아 터질’ 가능성



지난 여름을 휩쓴 공안 파동은 그후의 엄청난 부패 사건과 강력 사건, 대형사고에 파묻혀 뒷전으로 밀려난 듯싶지만 이 파동이 대학에 남긴 상처는 아주 깊다. 교양 교재 <한국사회의 이해>가 사법 당국에 이적 교재로 지목받으면서 논쟁 무대의 한가운데로 끌려나온 국립 경상대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이적성 교재 시비로 상처를 입은 쪽은 역시 교재를 집필한 당사자들이다. 검찰의 소환 요구와 ‘강제 구인’ 으름장에 줄곧 시달렸던 것이다. 또 소환 요구를 받아들인 8월30일 이후에는, 수사당국에 불려가 조사를 받느라고 연구와 강의에 쏟아야 할 시간을 빼앗겼다. 사태가 진전되는 동안 이들이 받은 심리적 고통도 말할 나위 없다.

상처를 입기는 수사 당국도 마찬가지다. 8월30일, 수사 당국은 교재 집필자의 대표 격인 정진상 · 장상환 교수에 대한 구속 영장을 청구했다가 기각당했다. 이 과정에서 검찰은 여론으로부터 ‘공안 분위기에 편승해 공권력을 남용한 검찰이 스스로 체면을 구겼다’는 달갑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적 교재 사태의 최대 피해자는 경상대이다. 직선제로 뽑은 총장이 갑자기 사퇴를 선언하는 통에 학사 행정에 공백이 생기는가 하면, 검찰 수사 과정에서 ‘교재 집ㅈ필 교수를 학교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익명 투서가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 그 사이 경상대가 심혈을 기울여 다듬은 국책 대학 꿈은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끝났다.

검찰의 익명 투서 공개로 사태 악화
이 대학 빈영효 총장이 사퇴 의사를 밝힌 때는 9월12일. 파문이 한창 달아오를 무렵인 8월 중순까지만 해도, 총장은 교재를 집필한 교수들이 사법 처리에 조속히 응하기를 ㅂ자랐다.

그러나 자기 편에 서 있다고 믿은 대다수 교수들의 의사가 정반대로 나타나자 총장은 사표를 냈다. 9월8일께 경상대 교수들은 전체 교수회 차원에서 교재 집필 교수들의 사법 처리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벌였는데, 여기에는 경상대 재직교수의 절반이 넘는 3백11명이 참여했다.

교육부에 낸 빈총장의 사표는 되돌아왔다. 사표가 반려되자 임기가 한 학기도 채 남지 않은 총장은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빈총장의 입지는 형편없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다. 경상대의 한 교수는 “총장이 정상으로 집무하지 못해 학사 행정이 사실상 공백 상태다. 일부 교수들은 벌써부터 새 총장을 뽑기 위해 총장 선출규정을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인다”라고 귀띔한다.

8월 말 검찰이 공개한 익명 투서는 경상대의 상처를 치유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학내 구성원들조차 쉬쉬해 온 교수들 간의 알력이 투서를 통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대학과 나라를 걱정하는 한 교수’가 작성한 투서의 골자는 ‘문제 교수들은 빨갱이임이 확실하므로 이번 기회에 반드시 대학 강단을 떠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투서가 공개되자 검찰 수사에 의문이 제기됐다. 검찰이 한쪽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투서를 잣대로 삼아 수사를 벌여오지 않았냐는 것이다. 교수 사회의 여론도, 투서를 보낸 쪽을 성토하는 분위기로 반전됐다. 9월 초순, 교수회 전체 입장이 교재 집필 교수의 사법 처리에 반대하는 쪽으로 선회하게 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현재 경상대 교정은 겉으로는 평온을 되찾았다. 교재 집필 교수들은 사태 진정을 위해 무리한 행동을 자제하는 편이다. 투서를 보낸 쪽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문제가 된 강의를 폐지한 대학 당국 결정에도 순순히 따르고 있다.

하지만 이적 교재 사태가 남긴 상처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안으로 곪아들 것으로 보인다. 처음부터 이 사태를 객관적으로 지켜보았다는 김중섭 교수(사회학)는 “가장 큰 상처는 학내 구성원간 신뢰가 무너진 데 있다. 12월에 새 총장을 선출하고 나면 그 상처는 다시 도질 게 뻔하다. 이 모든 불행이 공안 당국의 무리한 수사에서 비롯됐다”라고 말한다.

검찰은 아직 이적 교재 사건에 대한 재수사 결과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검찰 발표 내용에 따라 경상대의 공안 상처는 김중섭 교수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곪아 터질지 모른다.
- 朴晟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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