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향한 경제 한울타리 기초 마련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4.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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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EC 회의, 무역 자유화 실행 시기에는 이견…"한국의 조정자 역 중요"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의 레스터 서로 교수는 다음 세기에 일본. 미국. 유럽 간에 벌어질 무역 전쟁을 예고한 저서〈정면 충돌(Head to Head)〉에서 '21세기는 유럽의 시대'라고 단언했다. 세계 최대의 단일 시장을 가진 유럽은 북미나 환태평양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교역상의 우위를 갖고 있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그러나 그는 일본과 미국이 합세한 환태평양 경제권의 잠재력에 대해서는 시원스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역 블록화 반대'명시
 이번에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제6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각료회의(APEC)는 21세기 세계 무역 질서가 유럽연합(EU) 중심의 단독 체제로 끌려가지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오히려 세계 인구의 37%와 교역의 40%, 세계 총생산의 50%를 차지하는 아. 태 지역이 유럽연합과 함께 세계  무역 질서를 주도할 것이 분명해졌다.

 세계 무역 질서가 내년에 정식 출범할 세계무역기구(WTO)로 재편되기에 앞서 열린 이번 에이펙의 가장 중요한 의제는, 역내의 완전한 무역 자유화를 언제까지 실현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에이펙 자문기구인 저명인사그룹(EPG)은 지난 9월초에 낸 권고안에서 역내 18개 회원국(칠레 포함)이 오는 2000년까지 무역 자유화에 관한 계획을 입안해 늦어도 2020년까지는 실행에 옮기라고 주장했다. 또 역내 선진국들은 그보다 5~10년 앞서 무역 장벽을 철폐하라고 권고했다.

 이에 대해 미국. 캐나다. 호주는 이의를 달지 않았다. 미국은 캐나다. 멕시코와 맺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연장선상에서 아. 태 지역에서도 무역 자유화를 관철하는 데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를 중심으로 한 동남아국가연합(ASEAN) 회원국들의 생각은 다르다. 경제 개발 단계가 다른 만큼 선진국 기준에 맞춘 무역 자유화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들 나라는 미국이 패권주의적인 생각에서 에이펙을 제2의 북미자유무역지대로 만들려는 정치적 속셈을 갖고 있다며 강한 반발을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해 12일 폐막한 각료 회의의 공동 선언문은 의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선언문은 저명인사그룹이 제시한 권고안을 대부분 수용하면서도 무역자유화의 시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 선언문은 에이펙이 유럽연합이나 북미자유무역지대와 같은 배타적인 무역 블록을 창설하는 데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회의에서 역내 경제 동향과 현안 문제를 분석하는 비공식 그룹인 ETI(Economic Trends and Issues)를 경제위원회(EC)로 공식 기구화한 것이나, 기존 사무국을 확대 강화하기 위한 실무작업반을 설치하기로 한 데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엄밀히 말해 89년 1월 당시 봅호크 호주 총리의 제안으로 그해 11월 캔버라에서 출범한 에이펙은 처음부터 무역 블록을 염두에 둔 정치적 기구가 아니라 순수한 경제 협의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창설 6년째로 접어든 이 기구는 세계적인 무역 환경의 변화를 맞이하면서 과도적 상태에 있다. 이번 회의에서 투자 준칙 12개 항목에 관해 합의한 것이나, 무역투자위원회(CTI)가 무역 자유화를 위한 지침을 마련하도록 한 것은 이 협력체의 성격 변화를 예고한 것이다.

"한국, 친미 일변도 벗어나야"
 대다수 회원국은 아직은 이 협의체가 느슨한 형태의 경제 협력체로 유지되기를 희망한다. 특히 동남아국가연합의 핵심 회원국인 말레이시아는 미국이나 일본이 유럽연합에 대한 견제용으로 에이펙을 이용하지 않을까 경계하고 있다.

 에이펙에 관한 한 한국 정부의 입장은 적극 참여해 국익을 극대화한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의 역내 수출 의존도는 82년 59%에서 92년 70%에 이르고, 전체 수입의 63%를 역내 국가들로부터 의존하리만큼 비중이 커지고 있다. 金泳三 대통령이 지난해 시애틀 회의에 이어 이번 회의에 참석한 것은 우리 정부의 깊은 관심을 보여준 것이다.

 일부에서는 한국이 과연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역내 이해 충돌을 조정하는 역할을 해낼 수 있느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한국은 중간국(middle-power)이라는 이점 때문에 역내 주요 현안을 거중 조정할 수 있는 위치이다. 그러나 조정자 역할을 해낼 수 있기 위해서 한국은 이 지역 외교에 더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무역 자유화 문제를 포함한 주요 사안에 한국이 너무 미국에만 동조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무역 자유화 문제만 하더라도 한국 정부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여기에는 2020년께면 한국이 무역 자유화에 관한 한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경제적 고려가 깔려 있다.

 그러나 무역 자유화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중국과 일본의 속셈을 한번쯤 헤아릴 필요가 있다. 두 나라는 앞으로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라도 미국이 주도하는 무역 자유화 조기 실시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나라의 정치적 계산이 담겨 있다. 그 때문에 한국이 이같은 정치적 요인을 배제한 채 미국의 입장을 따르게 될 때 장기적으로 에이펙 내에서 조정자 역할은 물론 동남아 국가들의 지지도 확보할 수 없을지 모른다. 외교안보연구원 李東輝 박사가 "한국은 친미 일변도의 정책 기조에서 벗어나 일본. 동남아와 지역 균현 외교를 추구하지 않는 한 조정자 역을 제대로 해낼 수 없을 것이다"라고 경고한 것은 귀담아 들을 만한다.
卞昌燮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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