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으로 되살아난 비극의 흑백사진
  • 차형석 기자 (cha@sisapress.com)
  • 승인 2006.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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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사이공> 영국 공연 현장 취재/헬리콥터 신 장관 공간 전환 빠른 무대 화려, 노래 ‘명곡’으로 손색없어
 
흑백 사진 한 장. 사진 속에는 한 아이와 베트남 여인이 있다. 울먹이는 아이와 슬픔이 가득한 채로 굳어 있는 여인의 침묵. 좀더 나은 삶을 바라며 미군 아버지에게로 자식을 떠나보내는 어머니를 담은 이 사진 속에는 베트남 현대사가 낳은 먹먹한 슬픔이 있다. 작곡가 클로드 미셸 숀버그와 극작가 알랭 부빌은 1985년 가을, 한 잡지에 수록된 이 사진으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았다. <오페라의 유령> <레 미제라블> <캐츠>와 더불어 세계 4대 뮤지컬로 불리는 <미스 사이공>은 이 사진(오른쪽 위) 한 장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었다.

지난 4월24일 오후 7시30분(현지 시각), 영국 버밍엄 히포드롬 극장. 2천여 석에 이르는 객석이 가득 찼다. 10대에서 70대까지  연령층은 다양했다. 1989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한 이후 23개국 2백40여 도시에서 3천1백만여 명이 관람한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인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미스 사이공>은 헬리콥터 소리와 함께 막이 올랐다.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킴은 미군 병사 크리스를 만난다. 킴은 베트남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사는 크리스와 운명적인 사랑을 하게 되고, 이들의 사랑은 전쟁이 끝난 후에 킴이, 둘 사이에 태어난 톰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킴이 자살하는 장면에서는 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흘렸다.   

세계 4대 뮤지컬인데도 한국에서 공연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미스 사이공>은 그동안 풍문으로만 전해졌다. 역시 명성에는 이유가 있었다. 먼저 공간과 조명. 막이 오르기 전에 제작진의 안내로 무대와 소품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10kg에 달하는 방탄복과 플라스틱과 모래를 채운 맥주 캔, 3만5천개 구슬을 박은 의상 등 디테일은 리얼했고 꼼꼼했다. 제작진은 소품과 무대 장치 하나하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여주었다. 디테일의 세심함에서 1989년 초연 당시 미국·영국·필리핀 등에서 ‘최적의 배우’를 찾기 위해 오디션을 수없이 치렀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막이 오르고, 조명이 비치자 무대 공간은 4차원으로 변신했다. 공간 전환은 빨랐고, 무대는 화려했다. 베트남의 홍등가였던 무대는 호찌민의 거대한 흉상이 등장하자 혁명의 열기가 느껴지는 ‘광장’으로 변했다. 크리스와 아내 앨런이 있던 ‘공중 침대’와 그 아래에 있는 킴의 방. 시·공간을 압축해 보여주는 연출 기법은 놀랍기까지 했다. 킴과 앨런이 <I still believe>(나는 아직도 믿어요)를 부르는 이 대목은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무대 디자인, 조명 디자인’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압권은 크리스가 베트남을 탈출하는 장면이었다. 부대로 몰려드는 베트남인과 미군을 가로막는 쇠철망 세트는 무대를 순식간에 좌·우로, 전·후로 갈랐다. 순간순간 세트가 이동하면서 관객은 철망 안 미군이 되었다가, 철망 밖 베트남인이 되었다가, 철망 옆에서 이들을 지켜보는 관찰자가 되었다. 이윽고 굉음과 함께 등장하는 헬리콥터 신은 장중했다. 2년 전까지는 이 장면에서 무게가 4t에 달하는 모형 헬기를 띄웠으나, 최근 버전(이른바 <미스 사이공> 뉴 프로덕션)에서는 3차원(3D) 영상으로 대체되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그래서 더욱 관심이 갔던 헬리콥터 신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미스 사이공>에서 화려한 무대와 음악은 서로 상승 효과를 나타낸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작곡하기도 한 세계적 작곡가 클로드 미셸 숀버그의 저력이 드러난다. 주요 선율은 변주되고 반복되어 공연을 보고 나면 귀에 익게 된다. <Sun and moon>(당신은 햇살 나는 달빛) <I still believe>(나는 아직도 믿어요) <The last night of the world>(세상의 마지막 밤) <I’d give my life for you> (너를 위해 날 바치겠어) 등은 관객의 마음을 울리는 명곡들이었다.  

6월28일, 첫 공연 이후 17년 만에 한국 ‘상륙’

음악과 더불어 관객을 웃고 울게 만드는 것은 각 인물들의 캐릭터이다. 알랭 부빌과 클로드 미셸 숀버그는 ‘현대를 배경으로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동시에, 두 사람의 조국 간에 벌어진 전쟁과 그 전쟁을 통한 오해의 깊은 골을 반영하기 위해’ 문서보관소를 뒤지며 자료 조사를 치밀하게 했다. 베트남인인 킴과 베트콩 장교 투이가 ‘다른 언어로 다른 신에게 기도를 하지만 그들이 믿는 것과 자신(알랭 부빌)이 어린 시절부터 믿어왔던 것들은 같다’는 생각으로 극본을 쓰고 가사를 쓴 알랭 부빌은 ‘선인’과 ‘악인’의 모습은 되도록 피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의 부패와 부도덕한 사회상을 유머러스하게 표출하는 포주 ‘엔지니어’나 킴에 대한 집착으로 킴의 아들 톰을 죽이려다 도리어 킴에게 총을 맞아 죽는 베트콩 고위 장교 투이 등은 ‘전형적 악인’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뮤지컬이 끝난 후 엔지니어 역할을 맡은 배우는 남녀 주인공 이상으로 열렬한 박수 세례를 받았고, 킴이 총에 맞은 투이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 관객들이 함께 눈물을 흘린 것이다. 

 
프로듀서인 캐머런 매킨토시 씨의 말처럼, ‘베트남 전쟁과 유사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도 드디어 오는 6월28일 처음으로 무대에 오른다(6월28일~8월20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9월1일~10월1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캐머런 매킨토시 씨는 1989년에 런던에서 초연할 때부터 한국 공연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한국 공연을 위해 무려 4개월에 걸쳐 한국과 필리핀 마닐라에서 오디션이 치러졌는데, 무려 1천6백여 명이 경합을 벌였다. 연출가 로렌스 코너 등 영국 제작진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했고, 가능성 있는 주역들을 대상으로 뮤지컬 발성법을 전수하는 등 음악 지도를 병행한 오디션을 실시했다.

영국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한국에서 구입해 간 <미스 사이공>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 음반을 꺼내 들었다. 노래 한 곡 한 곡에 장면 하나 하나가 떠올랐다. <I still believe> 선율이 입 속에서 맴돌았다. 한국 공연도 감동을 나누는 자리가 될 것이리라고 ‘믿는다’. 숀버그와 부빌이 우연히 단 한 장의 흑백 사진을 발견했을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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