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냥 지나친 한국언론 자기반성 필요하다
  • 이 (미 클리블랜드주립대 교수 · 언론학) ()
  • 승인 1990.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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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측 유연, 북한은 수세 몰렸다” 아전인수 삼가야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지난 10월8일자호에서 한국의 고려대학 ‘타임클럽’을 소개했다.  학생들이 모여 《타임》을 읽으면서 세계정세를 이해하고, 겸하여 시사영어를 습득하고 있다는 발행인 명의의 글이었다.

대학생들로 구성된 ‘타임클럽’이 고려대학이외에도 50여군데나 있다는 설명이니 한국의 대학생층에 그 잡지가 어느 정도의 영향은 끼치고 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언론자유를 충분히 누리고 있는 나라의 간행물이므로 기사의 객관성과 보도의 신빙성이 높게 평가를 받을 것으로도 짐작된다.

《타임》을 읽으면서 시사영어를 배운다든지, ‘미국의 국내 실정’ 혹은 ‘미국의 입장에서 본 세계정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는 대학생다운 과외활동으로 간주될 것이다.  그런데 혹시 그 잡지의 국제보도를 세계정세 자체로 동일시하는 경향은 없는지….

미국 본토의 국내판과 해외에 배부하는 국제판이 항상 같지는 않지만, 《타임》은 근본적으로 미국의 시사주간지이다.  그러므로 그 잡지의 국제보도는 미국을 구심점으로 삼고 관조한 세계관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미국의 관심사에 초점을 두게 마련이며 미국의 이해사항에 민감한 보도로 귀착된다.

같은 시사주간지이지만 영국에서 발행되는 《이코노미스트》를 보면 세상에는 미국 이외에 아프리카도 있고, 아시아도 있고, 남미대륙도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된다.  한반도에서 근자에 전개되고 있는 대북한 관계, 북한과 일본과의 관계개선 조짐 같은 뉴스도 《이코노미스트》를 보아야 만날 수 있다. 《타임》의 세계는 북미대륙과 유럽 위주의 세상이다.  반면에 《이코노미스트》의 보도는 지구를, ‘지리시간에 배워 익숙한 모습’으로 드러내보인다.

‘국제적 언론매체’란 존재하기 힘들다.  언론매체는 영리를 추구하는 사업체로서 자기네 독자권에 연관시켜 매체를 제작하므로 보도방향은 토착지에 귀의하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서울에서 발행되는 한국의 일간지를 보면 세상만사가 마치 여당총무나 야당당수를 정점으로 움직인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여야의 이야기에 정신을 팔다보면 지금 이 시각에도 창원공단 같은 곳에서는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수출품을 조립하고 있다는 현실을 잊기 십상인 것이 문제이다.  중앙지의 정치 위주 보도행태는 어느 한계를 넘어 직업정치인의 도구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봄직하다.

《타임》도 마찬가지여서 근래의 논조를 보면, 백악관이나 국무부ㆍ국방부가 따로 홍보책자를 낼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다.  현재의 중동사태 보도에서 전쟁만이 유일한 수단이고, 전쟁발발은 시간문제라고 계속 쓰고 있다.  분쟁과 같은 국제문제는 상대편이 엄연히 있는데도 상대편은 경시되고 있다.

포클랜드전쟁 때 영국방송공사(BBC) 기자는 ‘아군’이나 ‘적군’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영국군은’ ‘아르헨티나군은’ 하는 식으로 보도했다.  물론 대처 총리로부터 ‘비애국적’이라는 불평을 듣긴 했지만 그러한 BBC의 보도행태는 전쟁보도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기에 BBC의 보도는 분쟁지역에서 항상 신뢰받고 있다.

남의 나라 이야기를 타산지석으로 삼고, 근자의 남북대화와 관련, 서울의 일부 중앙지들이 보인 보도행태를 되새겨보자.  북한측의 주장을 평형되게 게재한 것은 진일보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보도의 기본태도는 여전히 아전인수격이었다.  북한은 못살고 남한은 잘산다는 것, 북한은 외교ㆍ경제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 남한측 대표들은 ‘유연한 자세’를 취했고 북한측은 시종 ‘수세에 몰렸다’는 것 등등.  통일의 길을 모색하자는 남북한 총리회담이 웅변대회였다면 걸맞는 태도일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 기자에게 ‘달동네’ 보여줬으면

9월초 서울에서 열린 남북총리회담시 서울의 어느 기자는 북한측 대표단의 세탁물까지 점검하는 열성을 보였는데, 그러한 취재는 자유언론의 속성이라기보다는 ‘프라이버시’ 침해였다.  국제회의에 참석한 인사의 세탁물을 조사하는 언론은 아마 서울의 신문밖엔 없을 성싶다.  북한측 보도진의 연령이 높다는 것을 보도했으면, 남한의 언론에서는 어찌하여 흰머리가 되도록 일선에서 활약하는 기자의 수가 적게 되었는가를 자문했어야 옳을 것이다.

북한측 기자들이 “서울은 온통 외국어로 된 이름이 많다”고 불평했다는데, 이것이 마치 무식의 소치인 양 보도되었다.  사실 나의 경우 올림픽 개막 직전 인터콘티넨탈 호텔 개관식 때 한국식 이름은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가 ‘무식한 질문’이 되고 만 적이 있었다.  무엇이든 생기기만 하면 외국풍 이름을 붙이기 좋아하는 서울의 모습을 자성하여 보는 태도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북한측 보도진이 서울의 어두운 면과 일부감옥에 있는 인사들에게 관심을 갖는다고 꼬집기도 했다.  서울의 언론매체가 평양에 가면 차려주는 음식만 먹고 보라는 것만 보고 보도를 할 것인지…. 인터콘티넨탈 호텔이 보통한국인의 일상적 숙소가 아니라면, 북측 기자들이 그렇게 보고 싶어한 달동네를 보여주었다면 자유로운 사회의 자유언론의 진가가 드러났을 것이다.

남북협상과 회담 보도에서 한국 신문들이 한국 정부측을 줄곧 ‘우리측’이라고 쓰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언론매체가 한국 정부의 기관지라면 탓할 일이 아니지만, 북한대표단을 ‘북측’이라고 지칭한다면 ‘우리측’이라는 표현은 평형감각을 결여하고 있다.  ‘우리’라는 말은 통일을 갈구하는 한민족을 지칭할 때 쓰는 것이 좋다.

국적없는 언론매체가 없듯, 언론매체는 소속 사회의 속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도가 지나쳐서 국경선을 보도규범의 틀로 삼는다면 그러한 보도는 일방적인 보도에 불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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