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인은 분통, 공무원은 고통
  • 박재권 기자 ()
  • 승인 1994.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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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 얘기가 나오면 공무원과 민원인 모두 불만이 많다. 공무원들은 "민원을 보면 한국은 아직 후진국이다. 목소리 큰 쪽이 이기는 게 우리 현실이다"라고 볼멘 소리를 한다. 반면 민원인들은 공무원들의 무사안일을 비판한다. 문제를 적극 해결하기보다는 주어진 틀 안에서 책임만 면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서울시청은 이처럼 민원인과 공무원의 입장이 부딪치는 거대한 전쟁터이다.

11월15일 오전 봉천동 아파트 주민 5백여 명이 서울시청을 항의 방문했다. 아파트 지역 지하를 통과하는 지하철 7호선 21공구 노선을 바꿔 달라는 것이 이들의 요구였다. 5개월째 항의를 계속하는 이들은, 서울시가 안전하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이를 믿지 못한다. 주민들은 신행주대교를 건설하다가 무너뜨린 ㅂ건설이 다이너마이트 발파 공법으로 아파트 단지 밑을 뚫고 지나간다는 사실을 두려워한다. 그렇지만 서울시는 이들의 요구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모든 상황을 고려해 노선을 확정했고 안전도에도 이상이 없어 번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민들이 반대한다고 노선을 변경하면 새로운 민원이 발생할 것이고, 다른 사업에까지 영향을 미치리라는 점이다. 현재 서울시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민을 설득하는 것뿐이다. 주민들은 공사중지가처분신청을 제출해 법원의 판단을 물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민들은 공사 피해가 현실화한 것이 아니어서 가처분신청을 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최근 정부는 혐오 시설을 설치할 경우 공청회 등을 통해 주민 의견을 수렴하고 시민 편의 시설을 설치하여 보상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서울시 지하철 공사의 경우는 사전에 노선을 공개하고 공청회를 개최할 수도 없는 사안이었다.

투기를 조장하는 등 심각한 사회 문제가 발생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도시 행정의 특징적인 어려움이다. 결국 당국은 공청회 없이 결정할 수밖에 없었고, 해를 입는 주민들의 반대를 피할 수 없었다. 가능한 대책은 주민의 불만을 최소화하고 설득하는 것뿐이다. 89년 이후 서울시에 제기되는 민원은 수가 점차 줄고 있다. 민원이 급증하는 것은 사회에 민주화 요구가 분출하거나 선거를 앞둔 시기이다. 87년 6.29선언으로 민원이 급증했다가 그후 점차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93년에 다시 민원이 늘어난 것은 김영삼 정부 초기에 시민들이 가진 기대감에서 비롯한 것이다. 민원은 다양한 경로를 거쳐 제기된다. 직접 시청에 제기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상부 기관이나 시의회를 통해 제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문제를 시청에 직접 가져가는 것보다 청와대.국회.언론 같은 '권력 기관'을 통하면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오랜 믿음과 관행 때문이다. 어떤 경로를 통하든 일단 제기된 민원은 행정 계통을 통해 해당 부서에 넘겨진다. 그 부서는 정해진 기간에 이를 처리하고 결과를 민원인과 감독 기관에 보고해야 한다.

민원 중에서 다수가 관련되어 있거나 중요한 정책 사안일 경우에는 부시장이 주재하는 정책회의에서 검토해 결정한다. 93년 민원 처리 결과를 보면, 민원인들의 요구를 수용하거나 차선책을 제시한 경우가 33%이고, 민원인을 설득하거나 수용할 수 없다고 처리된 것은 60%에 이른다. 나머지는 처리중이거나 다른 부서로 이첩되었다.

"民願이 民怨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민원 처리" 
 주민들 간의 이해 다툼을 가지고 민원을 제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최근 급증하는 건축.주택 관련 민원은 대부분 이런 것들이다. 서울시 공무원들은 "자기 집 주변에 건물이 들어서면 무조건 민원을 제기하는 것이 요즘 추세"라고 고충을 털어놓는다. 건물을 새로 지을 때는 택지 경계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한다. 이런 분쟁은 대개 일제 때 만든 지적도가 부정확해서 발생한다. 이런 민원은 장기 미해결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용산구.동대문구.구로구.마포구.성북구 일부 지역이 이런 문제점을 안고 있다.

다음으로 자주 제기되는 것은 신축 건물이 일조권.조망권을 해친다는 주장이다. 서울시청의 한 간부는 "조망권.일조권은 독점적인 권리도 아니고, 법적으로 보장된 것도 아니다. 이것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서울시에 신축 건물은 하나도 들어설 수 없다"라며 민원을 처리해야 하는 공무원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행정 처분이 내려지면 반드시 이익을 보는 사람과 손해를 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민원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히 손해를 보는 측이다. 이 때 공무원들은 적법성과 민원인의 요구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법대로 할 것인가, 아니면 민원인의 요구를 경청해야 할 것인가. 전에는 상대 민원이 발생하면 법 집행을 미루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공무원은 이도저도 할 수 없는 궁지에 몰리는 것이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직무유기라고 결론지었다. 당국으로부터 인.허가를 받고도 상대 민원 때문에 시행을 미루는 경우가 그에 해당한다. 따라서 공무원이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이다. 법은 현실보다 뒤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문제 해결 노력은 그만큼 긴요하다.

서울시는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민원인들의 이해를 조정하고 합의를 유도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합의에 이르지 못할 때는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민원 심사위원회에 회부하기도 한다. 서울시 임충남 민원총괄계장은 "民願이 民怨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민원 처리하는 기본 원칙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민원심사위원회는 한번밖에 열리지 않았다.

소신껏 민원을 처리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 공무원들의 태도는 흔히 복지부동이라고 비판받는다. 하지만 법규상 책임질 수 없는 일을 떠맡지 않으려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때문에 공무원들은 경직되게 법을 집행하기 마련이다. 이런 비판에 대해 시청 공무원들은 그 책임을 민원인들에게 돌린다. 불만이 있으면 무조건 집단으로 항의하고 상부 기관에 호소하면 된다는 그릇된 인식을 하루빨리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구태도 사라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91년 지방의회 의원 선거를 앞두고 장기 미해결 민원들이 한꺼번에 처리되었던 사례는 그 전형으로 꼽힌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정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민원을 담당하는 일선 공무원은 미세한 변화가 일고 있다고 말한다. 집단 민원이면 무조건 주목받던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부가 자신감을 갖고 민원을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서울시청의 양 갑 주택국장은 "시민들이 자기만 생각하는 편협한 이기주의와 떼를 쓰면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국회와 지방의회가 활성화해 주민의 요구를 신속하게 법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행정은 법을 집행하는 것이므로 공무원들의 재량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민원은 법제의 경직성과 법규 적용의 비융통성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 법제가 선도하여 민원이 발생할 소지를 줄여나가야 한다는 고참 관리의 말을 경청할 만하다.
朴在權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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