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백두산 설화에서 찾는 한민족의 원형
  • 박상기 문화부차장 ()
  • 승인 1990.1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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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예술계에 관심 고조‥·고려대 民硏 학술회의 열어 연변의 신화·전설 등 정리

우리 민족의 성산으로 받들어지는 백두산에 대한 학계 예술계의 관심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 최근 단기간이나마 연변 일대와 백두산을 직접 답사하고 온 인사들이 늘어남에 따라 그동안 간헐적으로 입수한 자료에 의존하던 백두산 관련 학·예술 활동에 생기가 돌고 있다.

 지난 15일 고려대 부설 민족문화연구소(소장 鄭在皓교수)는 ‘한민족에 있어서 백두산 설화의 의미’라는 주제로 학술회의를 열고 백두산에 관한 국내와 연변의 신화 전설 등을 정리해보였다. 또한 김기창 서세옥 민경갑 송수남 등 우리 화단의 중진화가 12명은 지난 여름 백두산정에 올라 스케치한 작품을 완성하여 서울 롯데미술관에서 ‘백두산 가는 길’기획전(11월14~26일)을 갖고 있다.

 

민족의 정시사적 뿌리를 찾는다

 조회웅(국민대) 서대석(서울대) 최래옥(한양대) 최인학(인하대) 교수가 주제발표한 고려대 학술회의는 백두사이 갖는 의미와 비중을 새롭게 조명하여 민족의 정신사적 뿌리를 찾아보았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정재호 교수는 발제강영에서 “백두산 주변에서는 숙신족 읍루족 물길족 말갈족 여진족 만주족 등 여러 민족이 발생했고, 우리 민족도 부여 고구려 발해 등 여러 왕조가 백두산에 발상을 두고 있다”며 예로부터 동북아의 여러 민족들은 한결같이 백두산을 성산으로 숭배하면서 신격화해왔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백두산 주변에서 홍기했던 다른 민족들은 거의 실종상태이나 우리 민족만이 반만년 역사에 살아남아 백두산 민족으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민족통일을 열망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백두산은 不咸山 개마대산 도태산 태백산 장백산 백사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어왔는데, 문헌에 나타난 최초의 이름은 ‘불함산’으로 중국의 고서 ≪山海經≫에 “넓은 황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불함이라 이름하며 숙신땅에 속한다”고 쓰여 있다. 단군신화, 고구려의 동명왕 설화, 발해의 건국설화 등에도 백두산이 등장하지만 “우리 민족이 백두산을 본격적으로 숭배한 것은 고려시대부터”라고 밝힌 정교수는 그 예로 고려 태조 왕건의 탄생설화를 들었다. 왕건의 아버지가 백두산 곡령에서 당시 유명한 승려인 도선을 만나 왕자를 낳을 명단을 점지받음으로써 왕건을 낳아 고려를 개국했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왕조의 형성과정을 신성시하기 위해 백두산을 ‘신의 뜻’을 접수한 장소로 떠받드는 것은 金·淸 나라를 세운 만주족도 마찬가지였다. 금은 1172년 백두사을 산신으로 봉하여 영웅왕이라 하였고 1193년에는 開天荊聖宰 로 책봉하였다. 청나라는 한술 더 떠서 한반도와 만주의 모든 산은 물론 중국의 종산인 태산도 백두산 줄기가 뻗어간 지맥이라는 설을 유포시키며, 그들이 중원을 차지하여 천하를 제패한 것은 풍수지리상 백두산의 정기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신화와 만주족의 신화에는 차이점이 발견된다. <백두산과 민족신화>를 발표한 徐大錫 교수는 단군신화와 청태조 누르하치 탄생신화를 비교 분석하여 “우리 신화는 山神 신화이고 天神 신화인데 비해 만주족 신화는 江神 신화이고 水神 신화”라고 규정했다. 만주족 신화는 다음과 같다. 천녀 셋이 장백산 연못에서 목욕을 하는데 神?(까치)이 붉은 과일을 막내 옷에 떨어뜨렸다. 막내가 이를 입에 넣자 홀연 임신이 되어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한 남자아이를 낳게 된다. 이 아이가 장성하자 어머니는 출생배경을 설명해주고 성과 이름을 지어준 다음 “하늘이 너를 탄생시킨 것은 난국을 평정해서 다스리도록 함이니 너는 물흐름을 따라가라”며 작은 배에 태워보낸 뒤 자신은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이 아이가 나중에 청태조 누르하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만주족의 영웅설화인 ‘女眞定水’는 완달과 여진이라는 부부가 힘을 합쳐 흑룡 백룡 청룡의 3마리 악룡을 물리치고 흑룡강을 진정시켜 살기좋은 마을을 만들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대비되는 우리의 ‘천지신화’는 불칼을 휘둘러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흑룡을 백장수가 물리쳤는데, 싸움 중에 백장수가 파서 던진 흙더미가 백두산의 16봉우리가 되었고 움푹 파인 흙구덩은 물이 솟아 천지가 되었다는 것이다(리천록 수집《백두산 전설》연변인민출판사). 두 설화는 악룡을 퇴치하는 영웅적 활약을 담고 있는 점에서는 같으나‘여진정수’는 물을 다스린 것이고 ‘천지시화’는 백두산의 불을 다스린 것으로 두 민족신화의 지향점이 다름을 보여준다.

 

“백두산은 연변교포의 정신적 지주”

 또한 연변일대 교포사회의 설화를 조사하여 <설화에 나타난 이주 한국인이 보는 백수산>을 발표한 崔仁鶴교수는 “산 하나를 두고 연변쪽에만 2백여개의 설화가 있는 것은 놀라운 일로서 백두산이 곧 그들의 정신적 지주이며 생활의 보고”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연변대학 김동훈 교수의 학설을 소개했는데, “백두산 전설은 여진과 그 후예들에 의해 만들어진 만주족 전설, 근대조선 이주민에 의해 만들어진 만주족 전설, 근대조선 이주민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족 전설, 청조말이후 산동 이민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한족 전설로 구분되지만 그후 민족의 이동이나 동화로 인해 지금은 공통설화적 성격이 농후하여 민족별로 분류하기가 어렵다”고 전했다.

 崔來沃교수는 남한지방의 전래설화와 백두산설화를 비교했는데 “연변측의 백두산설화 중에는 병든 짐승이 찾은 온천발견 설화, 견우직녀 설화, 나뭇꾼과 선녀 이야기 등 남쪽의 전실ㅇ 그 장소를 백두산으로 바꿔 약간씩 변형된 것들도 있다”며, 이는 백두산을 정점으로 민족적 정서를 끌어모으려는 이향민의 의지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또 연변설화에는 설화내용이 사회주의적 시각에서 윤색된 것들도 발견된다. “옛날 장백산 아래의 임금이 해마다 동네 처녀를 요구하는데, 이를 피해 누이동생을 데리고 도망가던 오빠는 붙잡혀 사형당하고 누이는 복수의 일념을 불태운다. 죽은 오빠의 넋이 진달래꽃이 되었다”는 유형의 설화에는 계급투쟁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어 주목을 받았다.

 백두산 설화를 통해서 우리 민족의 원형을 찾고자 한 이번 학술회의는 나름대로 그 의미가 컸다. 그러나 북한지역의 설화를 다루지 못했고 참가학자들도 국내 교수로 한정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참가자들도 하나같이 연변 및 북한학계와 연계성을 갖고 공동으로 백두산에 관한 신화 전설 민담 등을 수집, 연구하는 기회가 오기를 고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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