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주고 뺨 맞은’ 러시아 외교
  • 김방희 기자 ()
  • 승인 2006.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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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상품 즐비, 한국은 광고판만 ‘독점’…투자혜택 없이 차관 더 요구



세레메치예바공항에서 모스크바 시내로 들어가는 도로변에는 대형 간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영문으로 쓰인 이 간판들은 대부분 현대 대우 삼성 선경을 비롯한 한국 회사 일색이다. 이 간판들은 옛 소련 지역에 불고 있는 ‘한국열풍’의 상징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항이나 호텔 등에 있는 외국상품 전시장 어디에도 한국 상품은 보이지 않는다. 모스크바나 성 페테르부르그, 심지어는 한국 기업이 많이 진출한 하바로프스크와 같은 큰 도시의 거리에도 한국 자동차는 없다. 지원에 인색하다고 비난받는 일본 상품이나 자동차가 넘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정신문화연구원 安擇源 교수는 이를 두고 “모스크바인들은 한국이 제공한 돈으로 자신들이 싫어하는 일본 상품을 사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한국의 모스크바 열풍은 있어도 모스크바의 한국 상품 열풍은 없는 셈이다.

 6공 최대의 치적으로 평가받는 북방정책의 빛을 바래게 하는 후유증이 잇따르고 있다. 후유증은 북방정책 수행의 최대 고비였던 옛 소련에 집중되고 있어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최초의 증상은 돈 문제로 나타났다. 옛 소련과 관계 정상화를 하는 대가인 30억달러의 경제협력 자금 가운데 이미 지급한 자금에 대한 이자 지급은 늦춰졌다. 소련연방의 해체로 원금을 돌려 받는다는 확신도 사라졌다. 그런데도 러시아정부는 남은 경협 자금을 달라고 계속 조르고 있다(보조 기사 참조).

 최근에는 헝가리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가 89년 수교 당시 한국 정부가 약속한 차관 지원을 빨리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이두 나라에 대해 한국 정부는 각각 6억5천만 달러와 4억5천만달러에 이르는 경제협력 약속을 한 바 있다. 약속에 차질이 생긴 것은 예상했던만큼 국내 기업이 현지에 진출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돈 문제는 경제협력의 본질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합작투자 분야에서 생긴 문제에 비하면 사소한 것일 수 있다. 금년 6월까지 한국 기업의 대소련 투자 사업은 17건에 2천5백만달러에 이른다. 이 가운데 가장 큰 합작 사업은 현대그룹의 스베틀라야산림 개발사업으로 1천6백만달러 규모이다.

 현대그룹은 “1천6백만달러의 초기 투자를 포함해 약5천만달러가 투자돼 사실상 옛 소련이 외국과 벌인 합작투자 가운데 최대 규모”라고 말한다. 대소 경협의 상징인 이 사업은 현재 큰 난관에 봉착했다. 국내의 일부 언론은 국제 환경단체의 반대로 이 사업이 어려움에 처한 것으로 보도했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 사업을 주관하는 (주)현대자원개발은 “환경단체의 반대는 오히려 사소하게 보일 정도”라고 밝힌다.

 

차관 이자ㆍ지급보증에는 ‘오리발’

 스베틀라야산림 개발이 더 어려워진 요인은 러시아 정부가 수출세를 신설한 데 있다. 벌채한 원목을 수출할 경우 수출세를 내도록 한 것이다. 수출세는 원목 판매가의 30%에 달한다. 게다가 스베틀라야지역에서 생산되는 것과 같은 북양재의 값은 작년에 비해 절반으로 떨어졌다. 거기에 주요 수입국인 일본에서 제품에 대한 클레임이 끊이지 않았다. 산림 개발사업의 수지타산이 안맞을 수밖에 없다. 현대그룹은 이지역 원목을 대부분 소화하는 일본이 한ㆍ소 합작투자 사업을 시샘해 일부러 클레임을 자주 제기하고 있다고 짐작한다.

 또 러시아 정부는 올해초부터 원목을 벨벌구를 지정해주지 않고 있다. 합작 당시 계약에 따르면 매년 1백만㎡씩 벌구를 허가해 주어야 한다. 스베틀라야지역 주정부는 벌구허가가 지연되는 이유로 국가생태학감정위원회의 명령을 내세우고 있다. 지난해 3월에 발급하고 올해 9월에야 한국측에 전달된 이 기관의 공문은 2년 전에 작성된 기술 평가가 잘못되어 있으니  벌채를 즉각 중단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합작 계약에 따르면 소련측 계약 당사자인 옛 소련 정부가  벌구 허가를 책임져야 하나, 러시아 정부는 수수방관하고 있다. 현재 현대는 이미 허가를 받아 놓은 일부지역에 대한 벌채만을 계속하고 있다.

 그린피스와 지구의친구들과 같은 국제적인 환경단체는 산림 개발이 멸종 위기에 처한 시베리아호랑이의 서식지를 빼앗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반대하고 있다 올해 벌구 허가가 날 지역으로 예상되던 포잘스키에는 시베리아호랑이가 네 마리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는 연해주지방 원목 벌채량의 5%도 안되는 지역에 대해서만 문제를 삼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북방정책 초기에 선두에 섰던 현대그룹 실무자들은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려고 안달이면서도 만사에 책임을 회피하는 러시아 정부의 진의를 파악하기조차 힘들다고 말한다.

 안택원 교수는 한국 정부가 어려움을 자초했다고 판단한다. 미국이나 일본의 대소련 정책이 길들인 뒤 교류하는 방식이라면, 한국 정책은 북방 국가에 대해 비위를 맞추면서 교류하는 방식을 채택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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