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복제 막아야 ‘한글’이 산다
  • 남문희 기자 ()
  • 승인 2006.04.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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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국산 소프트웨어 복제 사건… 전문가 동원 컴퓨터 수사 첫 개가


 

컴퓨터를 이용한 첨단범죄를 추적하기 위해 필요한 게 있다. 시간에 앞서야 하고 실력으로 상대를 압도해야 한다. 범죄행위를 추적하는 사람은 적어도 상대보다 빨리 정보를 입수해야 한다. 현장을 덮치기 전 5분 간의 여유로도 컴퓨터 전문가는 ‘딜리트 키(지움명령)’를 눌러 증거가 될 프로그래믕ㄹ 지워버릴 수 있다. 또한 범죄 추적자는 상대를 압도할 정도의 컴퓨터 실력으로 상대의 모순된 진술을 공박하여 범죄사실을 자인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국 규모의 ‘한글 2.0 불법복제 사건’

최근 부산 일원을 중심으로 전개됐던 ‘아래아 한글 2.0 불법복제 사건’은 이런 컴퓨터 범죄수사의 기본 요소 외에, 이 프로그램이 국산 소프트웨어 중 가장 대표적인 상품이고, 개발사인 한글과컴퓨터사(이하 한컴사)가 이 회사의 성패에 국산 소프트웨어 산업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할 정도로 컴퓨터 관계자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회사라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한컴사는 지난 89년 서울공대생 이찬진씨를 주축으로 한 20대 전후의 젊은 대학생들이 사용자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는 한글 워드프로세서 ‘아래아 한글’(이하 한글)을 발표하면서 세운 기업. 이 회사가 1년 동안 순수 개발비 4억여원을 투자해 개발한 ‘전문가용 한글 2.0’을 시장에 선보인 것은 지난 7월27일이었다. 한글 2.0은 기존 한글 워드프로세서에서는 볼 수 없는 기능들을 장착한 획기적 제품으로 평가받았다. 그중 가장 탁월한 것으로 꼽히는 철자 자동검색기능의 경우 아직 일부 미흡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동안 한글의 특성상 한글 워드프로세서에서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였던 기능을 처음 도입했다는 점에서 크게 돋보였다. 이밖에도 글자체를 자유자재로 확대할 수 있도록 한 아웃라인 폰트, 다단 편집기능 등이 새로이 추가되었다.

이런 뛰어난 기능 덕분에 한글 2.0은 발표된 지 한달반 만에 부가세 포함 27만원대의 고가인데도 약 1만3천카피 정도가 팔릴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프로그램 발표 직후부터 한컴사는 불법복제의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이 회사는 지난해 초 발표한 한글 1.51판이 불법복제돼 사실상 영업을 거의 중단해야 했던 뼈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번의 2.0판을 발표하기에 앞서 사용자들에게 “국산 소프트웨어산업의 발전을 위해 프로그램 불법복제를 자제해 줄 것”을 끊임없이 호소해왔고, 지난 5월에는 “사례를 적발하면 사법대응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하기도 했다.

복제방지 장치 제조회사가 범인

한글 2.0의 경우 원가 상승 부담을 무릅쓰고 새로이 하드웨어적인 방식으로 복제방지장치(키락)를 추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복제방지 장치가 풀렸다는 소문이 프로그램 발표 직후부터 무성하게 떠돌았다. 이런 소문이 현실로 나타난 것은 지난 9월15일 데이콤에서 운영하는 전국 컴퓨터 통신망 PC서브에 회원번호(ID) P246번 이홍석 명의로 한글 2.0 판매공고가 나면서부터. “북제방지 장치가 풀린 전문가용 한글 2.0을 싼값에 판매한다”는 내용의 이러한 판매공고는 며칠 후 또다른 컴퓨터 통신망인 하이텔에도 등장했다. 또 부산지역의 한 사용자는 부산의 사설 BBS인 ‘지구촌BBS’를 운영하는 이홍석이라는 자가 역시 싼값으로 프로그램을 판매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하고 있으니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는 정보를 제공해 오기도 했다.

대개의 소포트웨어 불법복제가 개인과 개인 사이에 은밀히 이루어지는 데 비해 이번 경우는 전국적인 통신망을 이용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놀라운 것이었다. 그만큼 파급 효과도 곧바로 나타났다. 시가 27만원 상당의 프로그램을 10만원대에 판매하겠다고 나섰으니 정품 구입자가 현격하게 줄어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달에 1만 카피 이상 판매되던 프로그램 판매량이 3백~4백카피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한컴사의 입장으로서는 회사의 존립을 위해서라도 정면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컴퓨터통신을 이용해 이홍석에게 접근하는 방법으로 그의 거주지가 부산이라는 점과 은행지로번호와 전화번호까지 파악해낸 한컴측은 9월27일 이홍석을 부산지검에 컴퓨터프로그램 보호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이 사건을 담당한 부산지검 조사부의 정진섭 검사는 사건 접수 후 이 사건이 정보ㅗ하 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새롭게 등장한 첨단범죄이고, 또한 국산 소프트웨어 산업의 운명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건이라는 점 때문에 신중하게 사건을 추적해갔다. 특히 사건 수사과정에서 컴퓨터 전문지식이 가장 중요한 요체가 될 것이라는 점을 깨달은 그는 국내 유수의 컴퓨터 전문가 4명을 초빙해 수사팀을 강화했다.

“불법복제 불감증 너무 깊다”

정검사의 요청으로 사건 수사에 참여한 법무부 연구위원 정 완 박사는 컴퓨터 사용자로서는 국내 정상급 수준. 그는 사건 수사과정에서 주로 사용자 입장에서 프로그램 사용실태를 점검했다. 또 컴퓨터통신 관련 국내 최고의 전문가라고 알려진 이모씨와, 부산에서 컴퓨터를 가장 먼저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이모 교사는 주로 사설 BBS의 운영실태를 분석해 범행의 증거인 무단복제품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컴퓨터 사용자들 사이에 ‘해커 중의 해커’로 소문이 나 있는 모씨는 한글 2.0에 장치돼 있던 복제방지 장치가 풀리게 된 과정을 추적했다. 무엇보다 이 전문가들은 혐의자들이 붙잡힐 때마다 그들의 진술을 이론적으로 공방함으로써 수사의 맥을 잡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사건 수사 결과 불법복제품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주범인 이홍석은 부산지역의 사설BBS인 지구촌BBS의 실질적인 운영자로, 놀랍게도 모 중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14세 소년이었다. 아까운 재능을 빗나간 방향으로 악용한 사례이다. 이군을 검거한 후 유통단계를 거꾸로 추적하는 방식으로 수사를 전개해 이홍석에게 불법복제본 3만원을 받고 판매한 지하BBS 운영자 안민구씨와 그의 친구인 김중호시, 김씨에게 프로그램을 판매한 컴퓨터 주변기기 판매원 박영수시 등을 검거했다. 또 박에게 복제품을 판매한 김영석이라는 인물이 서울 소재 CMT코리아라는 회사의 영업사원이라는 점이 밝혀지면서 수사는 서울로 확대됐다. 결국 이 사건의 최초 진원지인 해커는 CMT코리아라는 회사의 기획실장 지용익씨라는 것이 밝혀졌다.

지씨는 한글과컴퓨터측에서 제품을 출시한 지 2주도 채 되지 않은 8월9일 정품을 구입해 이 회사에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H대 복학생 한 모씨와 이 모씨에게 복자방지장치인 키락을 풀게 한 후 이곳저곳으로 은밀히 배포해온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지씨가 근무하고 있는 CMT코리아사는 복제방지장치 전문 제조회사이면서 전문지식을 이용해 남의 회사의 영업을 방해하는 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이다.

이 사건은 첨단 신종범죄에 대해 검찰이 컴퓨터 전문가의 지원을 받아 체계적으로 대응한 사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더 큰 소득은 소프트웨어 무단복제의 심각성이 분명하게 제기됐다는 점이다. 한컴사를 대표해 사건의 전개 과정이 깊이 개입해온 박홍오 실장은 “불법복제에 대한 불감증이 너무나 뿌리깊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한다. 현행 컴퓨터 프로그램 보호법에 따르면 남이 개발한 프로그램을 무단복제해 배포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과 3백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게 돼 있다. 또 민사소송법에 의해 영업상의 불이익에 대한 손해배상도 청구할 수 있다. 이와 관련 게임기기 전문 수입업체인 동서산업개발사가 이 회사의 프로그램을 무단복제해 판매하다가 최근 징역 8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권모씨에게 8천만원 상당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한 사례도 있다.

제도 보완해 국내 SW산업 육성해야

엄연한 실정법 위반인 불법복제 문제가 그동안 근절되지 않은 이유의 하나는 저렴한 가격의 복제품 유포가 컴퓨터 문화 확산을 위해 불가피한 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국산 소프트웨어 개발사들이 무단복제에 시달려 개발의욕을 상실하고 있는 상황에서 외국산, 특히 미국산 소프트웨어들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정보산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 산업을 미국 기업들에게 송두리째 넘겨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미 국내 소프트웨어산업은 한글의 문자적 특성에 의존하고 있는 워드프로세서 분야를 제외하면 거의 미국산 소프트웨어에 장악돼 있는 실정이다. 절박한 문제는 마지막 남은 워드프로세서 분야도 넘겨줄 것인가 아니면 일부라도 지킬 수 잇는가 하는 절박한 문제이다. 이미 이 분야에도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최근 ‘한글워드’라는 제품으로 국내시장에 진출했고, 미국의 세계적 기업인 워드퍼펙사가 시장 진출을 본격화할 예정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한컴사의 ‘아래아 한글’ 시리즈는 외국 기업들의 워드프로세서이 맞설 국내 유일한 워드프로세서인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 보듯 일부 컴퓨터 전문가 및 사용자의 무책임한 행동에 의해 이 회사마저 쓰러진다면 “앞으로 비싼 돈을 주고 미국 기업들이 제공한 한글을 사서 써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컴퓨터 관계자들은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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