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수수께끼 고조선 논쟁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4.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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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내현 교수, 기존 통설 또다시 뒤엎어

한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 연대·강역 등에 대해 학계는 아직 분명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데다, 고고학 발굴이 ‘설’을 확실하게 뒷받침할 만큼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80년대에 일었던 고대사에 대한 국사 교과서 파동은 바로 여기에 연유하는 것이다. 그 파동과 더불어 이른바 ‘재야 사학자’와 ‘강단 사학자’ 들 사이에 논란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 尹乃鉉 교수(단국대 · 사학)가 펴낸 〈고조선연구〉는 한국 역사학계의 묵은 과제를 다시 한번 논쟁의 한가운데로 끌어내고 있다. 〈고조선연구〉는 고조선, 나아가 고대사에 관한 한국 역사학계의 통설을 대부분 뒤엎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商周史 전공자인 윤교수는 80년대 초부터 고조선 연구에 몰두해 왔는데, 최근에 펴낸 〈고조선연구〉는 고조선에 대한 나름의 주장을 일관되게 펼쳐온 윤교수가 그동안의 연구 결과를 모은 9백5쪽 분량의 방대한 책이다. 고조선에 대한 윤교수의 주장은 역사학계의 통설을 대부분 부정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것은 고조선의 연대와 강역, 위만조선 · 한사군과 관련한 부분이다.

핵심은 건국 연대와 영토
 윤교수에 따르면, 고조선은 한국사에 처음 등장한 국가로 서기전 2500년께 건국해 2천3백여 년간 존속했다. 고조선은 후대의 국가와 같은 중앙집권제 국가가 아니라 여러 거수국(제후국)을 거느린 체제였다. 그 때문이 단군이 통치 능력을 상실했다고 해서 바로 다른 왕조가 출현한 것이 아니라, 상당 기간은 가장 강한 거수국이 단군을 받들고 그를 대신해 사회 질서를 유지했으리라고 윤교수는 본다. 건국 연대를 청동기 시대가 시작된 서기전 10세기 전후로 보는 기존 통설에 비하면 무려 1천5백년이나 거슬러올라가는 것이다.

 윤교수가 그렇게 추론하는 근거의 하나는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가 서기전 25세기를 전후해 시작되었음을 입증하는 유적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경기도 양평균 양수리와 전남 영암군 장천리 주거지 유역에서 발견된 청동기 고인돌 유적이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 그 시기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윤교수는 “그런데도 발굴자들은 이 연대가 지나치게 높게 나와 이용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과학적인 연대를 얻어놓고도 비과학적인 관념에 사로잡혀 있어야 할 것인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윤교수에 따르면, 고조선의 강역은 북경 근처 난하 유역에서부터 북쪽으로는 흑룡강 유역, 남쪽으로는 한반도 남해안에까지 이르렀다. 윤교수가 주장하는 강역은 기존 통설과 비교하면 큰 차이를 드러낸다. 고조선이 전성기에도 서쪽으로는 난하에 훨씬 못미친 大?河 유역에서 東胡와 만나고, 남쪽으로는 대동강 유역을 경계로 辰國과 이웃하며, 북쪽과 동쪽으로는 예맥 · 부여 · 진번 · 임둔 · 숙신과 접하는 것으로 본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다. 윤교수는 고조선의 영토가 한반도 남쪽 해안에까지 이르른 근거로 고조선 시대 유물인 비파형동검이 남부 지역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을 들고 있다. “통설에는 비파형동검이 교역을 통해 들어왔다고 하지만 그것은 무기의 성격을 몰라서 하는 얘기다. 당시의 비파형동검은 권력 유지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어서, 오늘날 핵무기와 마찬가지로 절대로 팔 수 없는 무기이다”라고 윤교수는 강조했다.

 윤교수의 주장 가운데 또 하나 통설과 상치하는 부분은 위만조선과 한사군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현행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따르면, 중국의 진 · 한 교체기에 무리 천여명을 이끌고 온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단군의 고조선을 계승했다. 뿐만 아니라 고조선은 서기전 108년에 한나라 군대에게 멸망했고, 한은 고조선의 일부 지역에 군현을 설치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윤교수는 이와 같은 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위만은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있던 기자의 후손 준왕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난하에서 대능하에 이르는 지역만 차지했을 뿐이며, 한사군도 바로 여기에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고조선은 위만조선이 아니라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부여 · 고구려 · 옥저 · 최씨 낙랑국·동예·한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에 멸망한 낙랑군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아니라 부여·읍루·옥저 등과 함께 있던 최씨낙랑국이다”라고 윤교수는 주장한다.

 “지배 계층의 착취가 심했던 중국과 달리 고조선의 지배 계층은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고 신분성 차별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토록 오랜 기간 존속이 가능했다. 고조선은 한국사의 실질적 출발점이며 한민족 문화의 원형이므로 그 실체를 반드시 복원해야 한다”고 윤교수는 말했다.

교과서가 앞뒤 안 맞는 역사 가르쳐
 고조선에 대한 윤교수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李基東 교수(동국대 · 사학)는 “근거 없이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역사의 신비화로 빠져드는 첫걸음이다”라고 비판한다. 이교수는 윤교수가 활용한 문헌이나 자료에 새로운 것이 없고, 다만 자료에 대한 접근 방식이 다르다고 말했다. “고조선처럼 초기 상태를 밝힐 수 있는 자료가 단편적이고 모호한 경우에는 비교적 전후 관계가 명백하게 드러나는 고조선 말기의 자료를 갖고 앞선 시기로 차츰 거슬러올라가면서 구명해가는 것이 옳은 방법이다. 아주 모호한 자료에 의지해 국경선을 결정해 놓고 그와 상치하는 자료가 나오면 전부 잘못된 것이라고 무시하는 것은 방법론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교수는 처음부터 고조선에 큰 세력이었다는 윤교수의 주장은 난센스라고 지적한다. 만주와 한반도에 작은 성읍 국가가 수백개 있었고, 고조선은 주변의 성읍국가들을 차례로 복속시키면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고조선이 그토록 강대했다면 국경선인 난하를 넘어 도시 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중국에는 왜 한 발짝도 가지 못했는가 하는 점이 미심쩍다면서 “상고사에 대한 미화 작업이 민족 주체성을 확보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사가나 자기 나라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연구하지만 애정과 미화작업은 엄연히 다르고”고 비판한다. 당시 정보·통신도 없는 상태에서 고조선이 한반도 남해에서 발해만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2천3백년이나 통치했다는 것은 상식 선에서 생각해 보더라도 납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고조선사에 대한 가장 확실한 최초의 자료인 〈위략〉에 연나라 秦開의 원정으로 고조선이 뒤로 후퇴했다는 사실이 있는데, 전후 관계가 명백한 이같은 자료를 부정하면서 그보다 더 불확실한 것을 사실로 단정하는 것은 조리가 맞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양에 있지 않았다는 주장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25개 현에서 낙랑군에 보내는 진흙 상자인 封泥가 2백여점 발견되었다. 한무제가 정복하면서 설치한 낙랑군과 낙랑국은 같은 위치에 있었다. 한사군은 군의 명칭을 토착 사회의 집단 이름에다 붙인 것이며, 지금도 평양 대동강 남쪽에 그 명칭이 남아 있다.” 이교수는 윤교수가 모호한 자료를 가지고 강역을 확대한 뒤 그 잘못을 합리화하기 위해 스스로의 고증 과정을 통해 수습할 수 없으리만큼 강역을 확대·증폭하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80년대 초반부터 제기되어온 고대사에 대한 이와 같은 논란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모호하게 만들어놓았다. 국사 교과서는 국가가 출현하는 시기인 청동기가 한반도에서 서기전 10세기께 시작되었다면서도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서기전 2333년으로 표기해 놓은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학생들 모두 ‘앞뒤가 맞지 않는 역사’를 역사책에서 배우고 있는 셈이다.    ■
成宇濟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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