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문 우리가 연다”
  • 편집국 ()
  • 승인 1995.0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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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별 30대 유망주들 ‘대망의 이력서’

김승환
카오스 이론으로 과학 혁명 앞장

 김승환 교수(36·포항공대 물리학과)는 과학계의 혁명적 패러다임으로 평가되는 카오스 이론의 전문가이다. ‘비선형 동력학(Nonlinear Dynamics)'이라는 정식 명칭보다 카오스 이론이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해진 이 분야는, 그 이름을 딴 여러 가전제품 때문에 국내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다.

 카오스 이론은 대류현상, 뇌파. 지진 등 특정한 운동 법칙이 없다고 여겨왔던 자연 현상을 전혀 새로운 각도로 규명함으로써 물리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 분야에 혁명에 가까운 신선한 충격을 몰고 왔다. 프랙탈 이론에서 나타나는 신비로운 무늬는 과학의 복잡성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보여주었고, 문학·철학·예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김교수는 “공학계의 모델링이나 계측·제어 분야 등 응용쪽의 파급 효과는 4~5년 뒤에나 나타날 것”이라고 내다본다.

 김교수는 새해부터 포항제철 용광로의 슬로핑(쇳물 넘침) 현상을 예측하는 기법을 연구할 예정이다. 용광로 안의 쇳물은 초고온 상태로 불규칙하게 유동하므로 넘치는 시기를 예측할 수 없어 매우 위험할 뿐 아니라 경제적 손실도 컸다. 카오스 이론은 수많은 학문 갈래와 연계된다는 점에서 현재보다 미래가 더 기대되는 분야이다. 김교수는 “이 학문의 비전통적·미래 지향적 측면에 젊은층이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그만큼 가능성도 높다”고 말했다.

이수종
빅뱅 직후의 우주 ‘비밀의 성’ 추적

 태초 이후 10-34초까지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이수종 교수(36·서울대 물리학과)는 그처럼 극히 짧은 세계, 극히 작은 세계를 탐구한다. 현재까지 합의된 예측으로는 모든 우주 물질의 궁극적 기원은 빅뱅이후 10-34초에 담겨 있다. 그순간에는 뉴턴의 중력 이론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맞지 않는다. 빅뱅 순간의 물질을 기술하는 이론 중에서 가장 설득력을 얻는 것은 ‘초끈이론(Super String Theory)’으로, 물질의 궁극적 기본은 입자가 아니라 무한히 진동하는 끈이라는 이론이다. 이교수는 초끈이론의 정합성을 규명하려 한다.

 유럽연합이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짓고 있는 원둘레 27㎞짜리 입자가속기(LHC)나 중력파 검출기 등은 빅뱅 직후 찰나에 진행된 우주의 생명 비밀을 알고 싶어하는 인류의 열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처럼 천문학적인 돈도 설비도 없는 한국에서 이교수는 치밀한 계산을 통해 우주의 기원에 접근하려 한다. 이교수는 활발한 논문 발표로 이론 물리학 분야에서 세계적 수준에 오른 서울대 물리학과에서 새로운 활력소 역할을 하고 있다.

한일송
‘인간의 뇌’를 컴퓨터에 심는다

 학습을 통해 자기를 갱신하는 컴퓨터. 이같은 신경망 컴퓨터는, 초대형 컴퓨터조차 수행하지 못하는 문제를 미미한 신경계의 생물체가 해결할 수 있다는 착안에서 출발한다. 한일송 박사(39·한국통신연구개발원)가 개발한 신경망 칩은 지능이 파리의 뇌 수준에 불과하지만 이 분야에서는 가장 앞선 편에 든다.

 신경망 칩의 최종 목표는 물론 인간 뇌 수준에 도달하는 것이다. 고도의 병렬 분산처리 시스템으로 최첨단 컴퓨터 이상의 기능을 수행하는 인간 뇌의 수준에 도달하자면, 2㎜ 두께 A3 용지 크기의 기판에 뉴런 천억개와 연결고리 10조개를 배열해야 한다. 지렁이의 생체 신경계의 연결 수가 천개, 파리가 천만개, 벌이 10억개 정도임을 감안하면 아직은 꿈에 가깝다.

 신경망 규모를 늘리려면 학습해야 할 데이터가 방대해진다는 점, 그것을 자동 입력할 방법이 아직 없다는 점, 신경망 칩에 맞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어렵다는 점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게다가 국내 업계가 마이크로 프로세서보다 메모리 칩 생산에 치중하는 형편이어서 필요한 규격의 신경망을 만들기도 어렵다.

김명호
정보 바다의 ‘진주조개 잡이’

 데이터 베이스의 병렬 처리를 공부한 김명호 교수(36·한국과학기술원 전산학과)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가치 있는 ‘정보를 캐는(data mining)'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컴퓨터는 정보를 양산하고 쌓아두기만 할 뿐 그 가치·특성·규칙을 평가하는 것은 여전히 지식을 가진 사람의 몫이었다.

 그가 개발하려는 프로그램은 그런 면에서 일종의 지식을 생산한다고 할 수 있다. 아무런 연관성이 없이 보관되어 있는 방대한 데이터 베이스의 중요 내용을 요약하거나 상관관계·특성·규칙·공통점 따위를 스스로 종합·분석·분류함으로써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게 정보를 검색하도록 돕는 것이다.

 정보는 폭주하고, 그 중에서 원하는 정보를 가장 빠른 시간에 받겠다는 개개인의 요구는 더욱 늘어나고 있다. 김교수는 그 두 현상으로 말미암아 컴퓨터 기술도 초소형화·고기능화와 초대형화·초고속화 두 방향으로 발전해 가리라고 예측한다. 둘 사이를 유기적으로 이어주는 것은 잘 발달된 네트워크이다. “그 네트워크를 흐르는 정보의 가치와 유용성을 높여주는 것이 바로 데이터 베이스 처리 기술이다”라고 김교수는 말했다.

김동현
컴퓨터 그래픽의 국제경쟁력 보루

 컴퓨터 그래픽이나 가상현실(VR·Virtual Reality) 하면 으레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김동현 박사(38·시스템공학연구소 연구원)이다. 그가 ‘컴퓨터 그래픽·가상현실 연구실’의 실장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미리 부엌 가구의 배치 상태를 알아볼 수 있는 한샘의 시뮬레이션 시스템이나 영화 <구미호>의 3차원 그래픽 등 선보일 때마다 화제를 모은 제품이 모두 그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제주관광단지 개발 계획, 새만금 간척사업 계획 등도 그의 컴퓨터 그래픽 기술 덕을 보았다.

 지난 12월 초 국내 컴퓨터 그래픽 전문가·업체 등과 시작한 ‘컴퓨터 그래픽·CAD 컨소시엄’ 작업도 이 분야의 국내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몫을 담당하리라 기대된다.

신준환
생태계를 지키는 산소 같은 남자

 21세기는 다양한 생물 자원을 지닌 나라가 강대국이 되는 시대이다. 문제는 풍부한 생물 자원을 가진 나라와 첨단 생명공학 기술을 지닌 나라가 서로 다르다는 데 있다. 새로운 차원의 남·북 문제인 셈이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열린 정부간 생물 다양성 협약에 빠짐없이 참가해온 신준환 연구관(38·임업연구원 산림생태연구실장)은 이 분야에서 가장 정통한 실무자로 꼽힌다. 그는 “한국은 미국·일본 같은 환경 선진국도 아니고, 그렇다고 환경 후진국도 아닌 어정쩡한 처지이다. 협약을 통해 우리 이익을 확보할 논리를 개발하는 일이 시급하다”라고 말한다.

 생물 다양성 협약의 취지는, 기술을 무상 양여하라고 주장하는 보존국(후진국)과, 공공 부문이 아닌 민간 부문은 불가능하다고 맞서는 이용국(선진국)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91년부터 ‘훼손된 생태계의 생물 다양성 평가 및 복원 기법 개발’ 과제에도 참여하고 있는 신씨는 “생태계를 제대로 보존하려면 그 구조와 기능부터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리산 성삼재로 난 도로나 남산 순환도로처럼 산허리를 자르는 것은 생태계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행위라는 것이다. 비무장 지대의 철책도 하루빨리 없어져야 할 생태계의 장애물이다.

 “한국 생태계는 아직 건전한 편이다. 생물 서식지가 회복 불능으로 더 파편화하기 전에 생태계 지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신씨는 강조한다.

이찬진
컴퓨토피아 희망의 설계사

 이찬진 사장(30·한글과컴퓨터)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그의 머리 속은 늘 새로운 소프트웨어에 대한 그림으로 가득 차 칬다. “책상위에 잡다하게 널려 있는 메모지며 서류·명함철·달력 따위를 없애는 게 우리의 목표”라고 이씨는 자신있게 말한다. 그것은 곧 매출액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워드 프로세서 시장에 안주하지 않고 종합 소프트웨어 업체로 발돋움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국내 도스 환경에서 ‘한글’ 워드프로세서는 이미 신화다. 서울대 기계공학도 시절에 만든 한글은 태어난 지 5년 만인 94년 5월 판매량 50만개를 넘었고, 6월에 발표한 한글 2.5판도 한달 만에 5만개를 주문받는 기록을 세웠다. 물론 이는 복제본을 제외한 정품만의 기록이다. 93년 백억원, 94년 1백50억원(예상)을 올린 매출액도 국내 소프트웨어 업체로서는 전무후무한 것이다.

 이씨는 한글과컴퓨터가 분수령에 와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윈도즈 환경의 워드 프로세서 한글 3.0 개발과 함께, 사무실·가정용 소프트웨어, 컴퓨터 통신 등 다양한 새 업종을 모색하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고 위기 의식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이씨는 “아무리 빌 게이츠라 하더라도 우리보다 더 한국적인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는 없다. 앞으로도 한국의 컴퓨터 시대는 우리가 이끌어갈 것이다”라고 말한다.

강태진
‘SW의 SW' 꿈 향해 뛴다

 강태진 사장(37·나라소프트)은 앞으로 2~3년을 한국 소프트웨어 업계가 도약할 기회로 본다. “컴퓨터 사용 환경(OS)의 객체 지향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소프트웨어도 규격화·부품화가 진행돼, 소프트웨어 부품 산업이 크게 발전할 것이다. 다시 소규모·두뇌 기업에 기회가 오는 것이다.” 현대 차의 부품을 기아 차에 쓸 수 있듯이 소프트웨어 부품도 표준화·규격화하여 OS/2에서든 윈도즈95에서든 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나라소프트가 내놓은 ‘틀마름이’나 ‘나라문서관리’ 같은 소프트웨어는 워드프로세서나 개인 데이터 베이스에 장착되어 문서 편집이나 검색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그의 부품 이론에 잘 맞는다. 소프트웨어의 기본 사양이 될 수 있는 요소 기술을 개발하는 것, 말하자면 ‘소프트웨어의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

나라소프트 대표라는 직함말고도 공업진흥청 유니코드 특별위원회 회원, 국제표준화기구 한국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고 있는 강씨는, 그만큼 한글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완성형으로 결정됐던 한글코드에 조합형이 더해진 데에는 그의 힘이 컸다. 그는 또한 누구보다도 국내 소프트웨어 업계 간의 협력을 강조하는 사람이다. 윈도즈 환경의 워드프로세서 ‘파피루스’를 개발할 때 그가 한메소프트 등과 공조 체제를 갖춘 것도 ‘거대한 미국의 소프트웨어 업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단결이 필요하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안철수
V3 백신 만든 ‘컴퓨터 의사’

 안철수씨(34)는 ‘컴퓨터 의사’이다. 컴퓨터 병을 고치는 의사이기도 하고, 컴퓨터를 활용하는 진짜 의사이기도 하다. 컴퓨터 바이러스의 천적 V3 프로그램을 개발한 컴퓨터 전문가 안철수가 전기 생리학자 안철수보다 훨씬 더 유명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본업을 더 소중히 여긴다. 그래서 비영리 컴퓨터 백신 연구소 V3 연구소를 세운 다음에 유학을 떠나려던 계획이 어그러져 더욱 안타깝다. “하드웨어를 만드는 대기업은 당장 이익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응이 신통찮았고, 소프트웨어 업계는 뜻이 있어도 영세한 규모 때문에 지원이 어려웠다”고 안씨는 말한다. V3 백신을 통해 돈으로 미처 환산할 수도 없으리만큼 많은 도움을 컴퓨터업계와 사용자에게 준 그의 처지에서 보자면 그같은 반응은 퍽 실망스러웠을 듯하다.

 그가 볼 때 컴퓨터 바이러스를 만들어 퍼트리는 사람들은 컴퓨터 기술의 진보에만 집착해 그것의 쓰임새나 가치는 무시하는 사람들이다. 바이러스 해커들의 수준은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다. 안씨는 “국내에서는 앞으로 1~2년 동안이 컴퓨터 바이러스의 절정기일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컴퓨터 마니아들의 우상인 안씨는 유학에 앞서 한국에 책 두 권을 선물로 남긴다. <안철수의 바이러스 분석과 백신 제작> <컴퓨터 의사 안철수>가 그것이다.

허진호
정보의 세상에 다리가 되어

 허진호씨(34)가 지난해 8월 설립한 아이네트(I·NET)는 종합 정보 회사의 꿈을 착실히 키워가고 있다. 지금은 아이네트의 세 목표 가운데 하나인 인터네트(Internet)만을 나우콤으로 제공하지만 곧 종합적인(Integrated) 네트워크와 사용자들이 쉽게 쓸 수 있는 지능형(Intelligent) 네트워크도 구현할 생각이다.

 허씨가 누구보다도 발 빠르게 인터네트 상용화에 대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이 분야의 노하우를 풍부하게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는 83년 국내 첫 연구망인 SDN 설립에 참여했고, 초기 한국과학기술원-서울대-전자기술연구소 간의 접속, 미국·유럽 전산망과의 접속 등을 추진했으며, 87년에는 국내 인터네트의 전자우편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한몫했다.

 허씨는 인터네트가 지구적 커뮤니케이션 기능과 방대한 정보를 함께 지녔다는 점에서 장차 전세계를 연결하는 정보 고속도로의 기반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물론 그 이면에는 인터네트의 정보가 대부분 영어로 되어 있어 문화적 종속이나 정보의 역조 현상도 일어날 수 있다. 어씨는 이를 막기 위해서는 “한국도 인터네트에 대한 정보 기여도를 높여야 한다. 국력에 걸맞는 정보를 제공해야 네티즌 자격을 인정받는다”고 강조한다. 그는 인터네트에 제공할 한국학 관련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는 공보처의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정재성
게임 소프트웨어 한국의 자존심

 정재성씨(30·미리내 소프트웨어 대표)는 컴퓨터게임에 미친 사람이다. 중학교 때 ‘컴퓨터 운명철학’이나 ‘사랑의 별점’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 정도로 싹이 남달랐다. 경북대와 한양대 전자공학과를 다녔지만 어느 곳도 졸업하지 못했다. 게임 소프트웨어를 만드느라 너무 ‘바빳기’ 때문이다.

 컴퓨터 슈팅 게임인 <그날이 오면> 시리즈로 선풍을 일으킨 미리내 소프트웨어는 국내 게임 프로그램 업계 중 가장 탄탄한 기술력과 자금력을 자랑한다. 물론 상대적인 평가가 그렇고, 실제로는 대다수 중소기업이 그렇듯 갖가지 규제와 자금난에 시달린다. 그래도 정씨를 비롯한 20여 직원들은 ‘그저 게임이 좋아서’ 밤낮 없이 일에 몰두한다.

 그렇다고 정씨가 게임의 문화적 영향력을 모르는 것은 전혀 아니다. 게임 주인공을 한국인답게 그리고, 비명조차 ‘아야 아야’라고 입력하는 것도 나름의 사명감 때문이다. “그 나라 정서를 잘 표현해 주는 종류의 게임(역할 게임)은 비싼 제작비에 비해 수익성이 없다. 영세한 기업 규모로는 엄두조차 내기 어렵다”고 정씨는 안타까워한다.

 94년 초 집계에 따르면, 컴퓨터 게임 소프트웨어 분야의 수입 적자는 5백억원이 넘었다. 하지만 정씨는 “우리도 기술과 능력이 있기 때문에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날이 오면 5>를 비롯한 여러 제품과, 통신망을 이용한 온라인 게임 등으로 수입산 소프트웨어에 맞설 준비를 하고 있다.

장영승
한글 프로그램 ‘씨앗’을 가꾼다

 장영승 사장(32·나눔기술)은 C 언어·베이직 등 온통 외국산 프로그램 언어 일색인 국내 컴퓨터 시장에 <씨앗>으로 한글 프로그램 언어의 씨앗을 뿌렸다. 지난해 4월이었다. 장씨는 “서울대 컴퓨터 공학과를 다니던 84년 무렵 한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외국산 프로그램 언어를 보고 우리 논리로 된 시스템 언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말한다.

 그는 수익성을 바라고 <씨앗>을 개발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아이들의 창의력을 담아내는 도구로 쓰이는 데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다. <씨앗>은 실제로 여러 일선 중·고교에서 프로그램 언어로 쓰이고 있다.

 90년 설립된 나눔기술은 개인 사용자보다 한일은행·한미은행·한진해운 같은 대기업들에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주력 상품인 ‘워크플로’가 기업의 사무용 종합 소프트웨어이기 때문이다. ‘기술의 실질적 가치는 나눔에 있다’고 믿는 장씨는 국내 소프트웨어 업계들과의 기술 협력에 매우 적극적이다.

 올해가 국내 소프트웨어 업체들에 대한 커다란 분수령이 되리라는 데에는 장씨도 이견이 없다.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내놓은 것이 나눔기술의 기존 제품들을 중국·일본 등지에 판매하는 세계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이미 중국·일본 사장에 맞게 프로그램을 바꾸어 놓았다. 그는 “우리 기업 형태가 일본 기업과 흡사해 언어를 바꾸는 외에는 거의 바꿀 것이 없었다. 기능 면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김민석
유엔 사무총장 노리는 ‘운동권‘

 20대 후반 시절의 ‘화려한 좌절’을 딛고 일어서려는 30대 정치인이 있다. 지난 14대 총선 때 전국 최연소 후보로 서울 영등포 을구에 출마해 상대인 민자당 거물 정치인 나웅배 후보에게 겨우 2백59표 차로 석패했던 김민석씨(32)가 그 사람이다. 85년 서울대 학생 회장 출신으로 운동권의 간판 주자였던 그에게는 낙선이 오히려 유명 정치인 대열에 오르게 된 계기가 되었다.

 김씨는 요즘 조용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유권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김씨는 미국 하버드 대학 케네디스쿨에서 행정학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현역 지구당위원장으로는 유례 없이 장기간 지역구를 떠나 있는 그의 ‘외도’가 단지 이력서 내용을 늘리기 위해서는 아닌 듯하다. 잠시 귀국한 김씨는 자신의 변신 노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가지는 도덕성과 민주화 투쟁 경력, 민주적 품성만으로도 유권자에게 설득력을 가졌지만, 우리 세대가 역사의 주역이 될 21세기에는 전문 분야의 소양과 지적 수준이 당락을 판가름할 것이라고 본다.” 21세기에는 통일 한국과 이를 둘러싼 국제 관계가 반드시 변할 것이고, 이에 대한 비전을 마련하는 일은 지금 시작해도 늦은 감이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가 내보이는 포부는 야무지다. “21세기에는 한국 정치인 중에서 유엔 사무총장감도 배출할 수 있어야 한다.”

김영춘
“개혁 전도사 돼 큰 정치 일구겠다”

 현 정부에서 청와대 비서관을 거친 뒤 최근 민자당 서울 성동 병 지구당위원장이 된 김영춘씨(34)는 84년 고려대 학생회장 출신이다. 그가 여당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87년 직선제 투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개헌 투쟁을 이끌던 민추협 김영삼 공동의장을 도운 것이 인연이 되어 김의장 비서로 정치에 첫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김씨는 당분간 표를 구하는 정치인이기에 앞서 30대에 걸맞는 ‘지역 운동가’로 뛰겠다는 활동 목표를 갖고 있다. 청와대 비서관으로 있으면서 수십 년간 쌓인 사회의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일 없이 개인의 의지만 가지고는 개혁이 안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는 김씨는, 지구당을 맡은 만큼 사회 저변으로 들어가 ‘개혁 전도사’ 노릇을 하겠다고 포부를 밝힌다.

 김씨는 30대가 진 시대적 짐을 이렇게 본다. “40대 이상의 기성 세대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자본주의의 보호 속에서 모범 국가를 만드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21세기에는 남북 통일이나 세계 질서 변화에서 국제 사회가 우리에게 과거처럼 보호해 주기보다는 견제와 공정한 경쟁을 요구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사고 방식이 청조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10~20년 뒤 우리 세대가 주역이 될 때는 살아남기 어렵다.”

 그의 지구당위원장 진출을 놓고 당내 보수층 일각에서는 우려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김씨는 “그 문제는 21세기를 대비한 국가 목표(세계화)를 추진하다 보면 자연히 해결될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丁喜相 기자

김석동
증권가 뒤흔들 ‘팔팔한’ 보스

 쌍용투자증권 金錫東 전무(34)는 증권산업의 세계화 작업에 첨병 구실을 하는 젊은 경영인이다.

 외국인에게 ‘밀튼 김’ 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그는 증권가에서 첫손 꼽히는 국제통이다. 한국 기업의 해외증권 발행을 주선할 때 그는 ‘로드쇼’를 실무자에게 맡기지 않는다. 스스로 전면에 나가 뛴다. 해외 투자가에게 한국을 열심히 알리는 일도 그의 몫이다.

 94년 말 영업 성과에 따라 임금을 차등 지급하는 ‘신인사 제도’를 단행했는데, 이 일은 그의 국제적 시각을 엿볼 수 있는 일면이다. 그는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세계화 시대에는 생래적 차이가 사람을 쓰는 잣대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대부분의 한국 증권사와 달리 외국인과 여성을 책임자 자리에 과감하게 발탁했다. 그는 유교식 연공서열도 거부한다. 그의 목표는 쌍용투자증권을 국내 1위가 아닌, 메릴린치 같은 세계 최고 금융 그룹으로 키우는 것이다.

 그는 미국의 명문 브라운 대학과 조지타운 대학에서 외교학을 전공했으며, 유럽 최고 경영대학원 인세드(INSEAD)에서 수학했다. 그에게는 재벌 2세라는 또 다른 이름이 따라다닌다(쌍용그룹 창업자 金成坤씨의 3남). 집안 배경으로 34세에 전무가 되었다는 외부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그가 세계화 시대로 나가야 할 한국을 만들고 있는 진취적인 젊은이인 것은 틀림없다. “안정과 고정 관념을 거부하는 팔팔한 보스가 되고 싶다”는 그는, 이미 그 희망을 상당히 달성한 사람에 속하는 것 같다. 張榮熙 기자

권구훈
통일 대비하는 러시아 경제 박사

 국제통화기금(IMF) 러시아과에 근무중인 權九勳씨(33)는 ‘한국인이 하필이면 러시아에서 근무하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국제 기구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이 몇 안되는 데다가. 러시아에 관심을 두는 이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권씨는 늘 “한국인이라서 더 러시아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대답한다. 북한은 언젠가 개혁을 할 수 밖에 없고, 그때는 러시아가 개혁한 경험에서 배울 바가 많으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가 러시아와 맺은 인연은 꽤 깊다. 87년 8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미국 하버드 대학에 유학하려고 결심했다. 80년대 초반 대학 사회에 열풍처럼 번진 체제에 대한 고민을 학문적으로 탐구해 보기 위해서였다. 93년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소련 경제의 실패 원인 분석>이라는 논문으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무렵 그는 자기가 연구한 이론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할 기회를 얻었다. 안드레이 슐라이프 지도 교수의 권유로 러시아 국유재산관리위원회에서 러시아 국유 기업의 사유화 작업에 참여한 것이다.

 그는 국제통화기금이 차관 1백20억달러를 러시아에 제공하는 문제에 매달려 있다. “한국의 경제력 위상에 걸맞게 더 많은 사람이 국제 기구에 진출해야 한다.” 서울과 워싱턴을 잇는 국제 전화를 통해 그는 경제학자들의 국제화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연명
‘복지의 칼날’로 성장의 허구 벤다

 국민생활 최저선 확보 운동(일명 National Minimum)에 착안해 사회 복지 분야에 잠재력을 일깨운 김연명 교수(35·상지대 사회복지학과)는 한국의 사회 복지 정책을 “연말 불우 이웃 돕기 수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사회 복지라는 말이 여태껏 생소하리만큼 한국은 사회 복지의 불모지나 마찬가지다. 88년 농어촌 지역에 의료보험제가 실시되면서 비로소 복지가 사회 관심사로 떠올랐고, 연금 문제가 최근 들어서야 부각됐을 정도다.

 김교수는 사회 복지 이론을 실천과 결합시키는 작업의 선두에 서있다. ‘의료보험통합 일원화와 보험적용 확대를 위한 범국민연대회의’ ‘참여민주사회와 인권을 위한 시민연대’ 등 사회 복지와 관련한 단체의 모임이나 회의장에는 반드시 그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냉전 체제가 남북한 복지에 미친 영향이라는 색다른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 분단 상황에서는 국방비와 복지비가 대체 관계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92년 사회 복지 예산 확보를 위한 공동대책위에서 정책위원장으로 일한 2년동안 그는 많은 것을 공부했다. “단순한 문제 제기는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것과 광범위한 계층의 참여 없이는 사회운동이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을 배웠다.”

 최근 복지와 관련한 공익 소송을 제기하는 새로운 운동 방법을 추진하는 그는 앞으로 10년 간은 투자 기간이라고 다짐한다.

김은희
현장에서 뛰는 노동과 건강 지킴이

 산업 재해·사회 재활·산업 의학·보건 의료. 한국에서는 아직도 낯선 단어들이다. 88년 3월에 창립한 ‘노동과건강연구회’라는 단체의 이름 역시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회원제로 운영하는 노동과건강연구회와 이 모임 회장 김은희씨(38)가 사회 복지 분야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독특하다.

 노동자의 보건·의료 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면서 88년 출발한 노동과건강연구회는 이제 노동부나 대기업의 동반자 대열에 들어섰다. 과격한 노동운동 단체로만 인식되거나 노동부 산하 기관쯤으로 알려진 초기와는 천양지차로 위상이 높아졌다.

 서울대학병원에서 5년 동안 간호사로 근무한 김씨는 병원 재직중 노동자를 위한 주말 진료팀에서 일한 것이 계기가 돼 아예 서울 구로동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인생 행로를 바꿔 사회 복지 현장으로 뛰어든 것이다. 노동자를 위한 회원제 의료기관인 구로의원을 거쳐 노동과건강연구회장을 맡은 것은 92년부터다. 지금은 서울대 보건대학원에 재학중이다. 그는 “우리 복지 정책 중 그나마 산업 재해 분야가 가장 형편이 나은 편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숙제는 쌓여 있다. 정책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정도로 전문성도 확보해야 하고, 문제점을 여론화하는 방법도 개발해야 한다. 현장을 발로만 뛰어다니던 초기와는 양상이 달라진 것이다. 시민 의식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쉽지 않으리라는 것이 현장을 지켜온 그가 한국 사회 복지 분야를 전망하며 내리는 진단이다.

김진석
새롭게 역사 읽는 ‘포월’의 철학자

 92년에 상재한 <탈형이상학과 탈변증법> 이후 소장 철학자 김진석 교수(37·인하대 철학과)는 94년 두 권의 역저를 펴냈다. <초월에서 포월로>와 <니체에서 셰르까지>(솔)가 그것인데, 이 두 저서에서 김교수는 ‘포월론(匍越論)’을 주창한다.

 초월이 아니라 ‘기어가면서 넘어간다’는 그의 포월론에 대한 학계의 시선은 둘로 나뉜다. 전통적인 학계에서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평가하는가 하면 학계·문화계 일각에서는 ’대단한 문제 제기다‘라고 높이 평가한다. 포월론은 그동안의 서양 사상사에 대한 반성이자 도전이기 때문이다.

 해체적 관점을 수용해 동서양 사상의 맥락을 ‘탈’이라는 한국어로 개념화한 김교수는, 포월론에서 서양 사상사를 뒤집으면서 새로운 역사와 시간과 실존을 제안한다. 초월은 차안과 피안이라는 경계를 전제로 하지만, 포월은 기존의 경계로서는 이해되지 않는다. 시간도 마찬가지여서, 그물처럼 사방으로 연결되는 비선형적 시간을 말한다. 이것이 포월의 벙법론이라면, 포월의 내용은 변증법적인 소외의 지양을 극복하는 새로운 개념인 ‘소내(疎內)’ 즉 ‘내부로 성기게 하기’로 채워질 예정이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독일 프라이브르크 대학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니체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계간 <문학과 사회>편집 동인으로 활약하다가 지난해부터 문화·사상 전문지인 <그물코> 편집의원으로 있다. 문명사의 대전환기를 이끌어갈 문화운동의 이론적 진지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김교수는 포월과 소내를 통해 동양사상사도 조명할 계획이다.

이영준
“출판은 첨단 미래 산업”

 컴퓨터가 사회와 개인의 모든 부문을 파고 들면서, 특히 활자 문화가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성급한 예견이 들려오고 있다. 30대 출판 편집자의 선두에 있는 이영준씨(37·민음사 주간)는 위와 같은 진단을 한마디로 부정한다. 오히려 출판은 첨단 미래 산업일 수 있다는 것이다.

 “뉴미디어가 등장하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책의 본질적 속성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이영준 주간은 말한다. 그는 3천년 넘게 인간과 함께해 온 활자 문화가 컴퓨터와 행복하게 만날 수 있다고 본다. 그 좋은 예가 컴퓨터 게임 해설서이다. 이는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모니터는 인간을 수동적이게 한다는 한 증거이다.

 연세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86년 민음사에 입사한 그는 90년부터 주간을 맡고 있다. 그가 기획하고 편집한 책으로는 <당시전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문열의 <삼국지>등이 꼽힌다. 하일지·심상대 같은 젊은 작가도 발굴했다.

 출판 편집자의 역할은 날로 증대되고 있다. 지식·문화·정보는 출판 편집을 통해 정리·유통되는 갓이다. 이주간은 “출판 편집자는 지식총합체이며 다원화·전문화 시대의 각 권역을 연결하는 링커”라고 규정한다.

은병수
“감동적 디자인이 지구를 지배한다”

 디자인 전문회사‘212디자인’ 대표 은병수씨(36)는 국내 최초 기록을 몇 가지 가지고 있다. 92년 미국 모토로라의 무선호출기 프로젝트를 수주하면서 국내 최초로 우리 디자인을 수출했으며, 89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디자인 전문 회사를 차린 것이다.

 예술과 과학과 기술이 만나는 지점이 디자인이라고 말하는 은병수 사장은, 세계 시장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소비자가 국제화함에 따라 디자인도 ‘글로벌 디자인’으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서울대 미대 공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그는, 미국 프렛 인스티튜트에 유학해 산업디자인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난 5년간 국내 60여 회사로부터 1백50여 가지 프로젝트를 수주한 212디자인은, 그 사이에 모델과 시제품을 제작하는 ‘212엔지니어링’을 설립하고, 미국에 조사 전문회사인 ‘212아메리카’를 열어, 기획·조사·디자인에서 시제품 생산에 이르는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했다.

 “기능성·편리성·아름다움만으로는 완벽한 디자인이 될 수 없다. 이제는 감동을 추가해야 한다”고 은병수 사장은 말한다. 세계 최고보다 앞서가는 길은, 감동적인 디자인이라는 것이다.

박종원
인간 속성 캐는 영상의 승부사

 영화 <영원한 제국> 개봉을 앞둔 박종원 감독(37)은 지난해 일본 매스컴으로부터 집중적으로 눈길을 받았다. 12월8일 일본 NHK-TV는 45분짜리 특집물을 마련해 박감독과 그의 영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일본 언론들이 박감독에게 관심을 쏟는 까닭은, 현재 일본에는 박감독처럼 사회성 짙은 주제를 영상화하는 감독이 없기 때문이다.

 박감독은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한국 영화는 발전할 가능성이 많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 영화가 일본에 견주어 주제를 분명히할 수 있으며, 중국에 비해서는 자본주의 경험이 풍부하다는 장점이 있다고 분석한다.

 그가 즐겨 다루는 주제는 집단과 개인이 부딪칠 때 드러나는 인간의 감추어진 속성이다. 박감독의 미덕은 이같은 주제 의식에다 ‘세밀함에서 승부가 난다’고 믿는 치밀한 연출력과 완성도 높은 화면 구성에 있다.

 한양대 연극영화학과와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한 박감독은 88년 <구로아리랑>으로 데뷔했고 92년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크고 작은 외국 영화제에서 찬사를 받았다. 박감독은 “최근 국내 대기업들이 영화산업에 참여하고 있지만, 한국 자본은 한계가 있다. 외국 자본과도 손을 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종호·양남철
세계를 건축하는 ‘작은 거인

 메타건축의 이종호(38)씨와 양남철(37)씨는 늘 함께 작업한다. 두 사람의 팀워크는 89년부터 시작됐는데, 그 자체만으로도 건축계에서는 경이로운 일이다.

 두 건축가의 가장 최근 작품은 서울 방배동의 바른손 사옥. 이 건물은, 기업 이미지를 살리면서 주변 환경과 대화를 시도함으로써 ‘도시와 기술’이라는 주제를 잘 드러냈다. 이보다 앞서 이들은 강원도 지역에 율전·신포·춘천 교회 등 시골 교회 시리즈를 완성해 눈길을 모았다. 이 시리즈는 건축가협회상을 수상하면서 건축계의 상업주의와 유행주의에 반성할 계기를 주었다.

 고 김수근씨의 마지막 제자인 두 사람은 특히 ‘모던은 아직 유효하다’는 선언에서 다른 건축가들과 구별된다. 모더니즘의 폐해를 경계하면서도 모더니즘이 지닌 ‘변화를 향한 의지’와 ‘좀더 자유로운 발전에 대한 이상’을 주목하는 것이다.

 두 건축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들을 껴안으면서 새로움을 추구한다. 이들의 건축관은 정조(情操)로 요약된다. 정조는, 문화공동체 안에서 공유되면서 동시에 새로운 자극이 될 수 있는 정서·표현·가치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지난해부터 국제 무대를 노크하고 있는 두 사람은, 서울이라는 대도시를 잘 읽어내면 아시아의 모든 대도시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정치용
예술과 교육 위한 지휘봉의 이중주

 ‘지휘자의 곡 해석은 지휘자의 일상적 삶에서 나온다’ 젊은 지휘자 정치용 교수(38·한국예술종합학교 지휘과)의 지휘자로서의 화두는 주관적 해석과 객관적 틀과의 조화이다.

 지휘자인 그에게 거는 음악계의 기대는 예술가와 교육자 양쪽에 걸쳐 있다. 서울대 음대에서 작곡을 전공하다가 동년배들을 규합해 소규모 관현악단을 이끌어가면서 지휘를 ‘독학’하다가, 갈증을 못이겨 84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국립음대로 유학해 지휘를 정식으로 공부한 이력(그는 이 음대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오스트리아 국립방송국이 주최한 콩쿠르에서 1의를 차지했다)을 보면, 그에게 지휘자와 교육자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93년 한국종합예술학교가 문을 열면서 개설된 이 학교 지휘과는 국내에서 유일하다. 국내 제자들을 탁월한 지휘자로 배출해내는 일이 좋은 연주 못지 않게 그에게는 중요한 임무이다.

 지난해 열린 윤이상 음악제에서 윤이상의 오페라를 지휘해 호평을 받은 그는 외형적으로 화려한 연주에는 관심이 없다. “연주자와 내면이 통하는 것이 관건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지휘자 이전에 좋은 음악인이고 싶다는 그의 가장 큰 꿈 가운데 하나는 우리 작곡가의 음악을 지휘하는 것이다.

백혜선
피아노와 함께 전진하는 삶

 지난해 6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1위 없는 3위로 입상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떠오른 백혜선씨(30)는 15년 동안의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곧 귀국한다. 올 봄부터 서울대 음대 교수로 강단에 서는 것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한 그는 서울 예원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보스턴 뉴잉글랜드 음악원을 나온 뒤 대학원에서 전문 연주자 과정을 마쳤다. 24세 때부터 1년에 한번꼴로 국제 콩쿠르에 도전해온 그는 91년 6월 퀸 엘리자베스 국제 콩쿠르에서 은상을 수상하면서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라자베르만은 그의 연주를 “불과 물이 뒤섞인 듯한 훌륭한 연주”라고 극찬했다.

 자난 한 해는 그에게 뜻깊은 한 해였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입상했고, 고국의 강단에 서게 됐으며, 국내 4개 도시 순회 연주회와 독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연말에 ‘94 음악동아 대상’을 수상하는 것으로 한 해를 마감했다. 미국·일본·러시아 등지에서 연주와 녹음 제의도 들어오고 있다.

 그의 예술가 정신은 단단하다. 연주가는 30대로 접어들면서부터 기교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 그는, 최근 발표한 글에서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을 이렇게 밝혔다. ‘예술가란 유명한 연주가와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끊임없는 투쟁이자 앞만 보고 전진하는 삶도 배웠다’

장정일
우물 안이 싫은 ‘신세대 작가’

 올 여름이면 작가 장정일씨(33)는 한국에 없다. 안 5년 머무를 요량으로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지난해 <숨어있기 좋은 방>을 출간하여 작가로 등단한 아내 신이현씨와 함께 간다. “내 소설의 무대를 세계로 넓히고 싶다.” 그가 이 땅을 떠나는 이유이다.

 작가라는 호칭이 장정일씨만큼 잘 어울리는 경우도 드물다. 84년 시인으로 데뷔해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고, 88년 소설가로 나섰으며, 소설가가 되기 한 해 전에는 희곡 작가로 등단했다. 이후 희곡·소설·시나리오·비평문 등 전통적인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글쓰기에 전념했다.

 그는 최근 재즈 음악의 특성을 소설에 대입해 문장의 통사 구조와 문맥, 시간, 그리고 마침내는 소설과 세계의 진실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장편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미학사)를 펴냈다. 그는 비평가들로부터는 ‘신세대 작가’로 분류되지만, 스스로는 현실의 신세대 문화와는 어느 정도 간격이 있다고 본다. 현실 속의 신세대인 20대 작가들의 새로운 언어와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92년 일본에서 열린 한·일 작가 교류 회의에 참가했을 때, 장씨는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우물 안 개구리’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지나친 자기 검열, 외부 세계에 대한 두려움, 작가의 역사적·사회적 역할에 대한 부담감, 곳곳에 널려 있는 금기 등 한국의 작가들은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꼈다.

 장씨의 눈에는 이 땅의 문학이 지나치게 느리고, 답답하고, 왜소한 것이다. 장정일씨는 “앞으로 작가는 더 이상 사상가가 될 수 없다. 순수한 작가로 칩거하든, 연예인이 되든 둘 중의 하나”라고 말한다.

이용배
애니메이션으로 한민족 뿌리 찾기

 애니메이션은 영화보다 훨씬 뛰어난 국제 언어이다. 한국 영화는 배우가 유색 인종이라는 근본적인 한계를 뛰어넘을 수가 없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에는 배우는 물론이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도 없다. 애니메이션은 무한한 상상력을 받아들인다. 애니메이션 감독 이용배씨(36·영프러덕션)는 “애니메이션(이감독은 만화 영화라는 용어는 부적절하다고 지적한다)의 해외 진출은 우리의 의무이고 또 권리이다”라고 말한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30년에 가깝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의 하청 작업이어서 세부 테크닉에만 능할 뿐 기획·감독·창작 분야는 아직 발아기이다. 그러나 이용배 감독은 자신감에 차 있다. “세계적으로 애니메이션에 손댈 수 있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우리는 충분한 제작 노하우와 인력을 갖고 있다.”

 대학에서 조경학을 전공한 뒤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90년 애니메이션 창작 모임을 만든 이용배 감독은, 91년 단편 <와불>을 시작으로 <고깨비> <빌보드 사인> 등 단편 애니메이션을 세 편 발표했다. 첫 작품인 <와불>은 제18회 앙시 페스티벌(프랑스)에서 ‘주목할 만한 시네마’로 뽑히는 성과를 올렸다.

 현재 45분짜리 애니메이션 <소년병 바우>를 연출하고 있는 그는, 앞으로 한민족의 연원과 이동사를 애니메이션으로 복원하고 싶어한다.

김종엽
“억압과 투쟁하며 대중 문화 읽는다”

 80년대가 정치경제학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문화론의 시대이다. <문화과학> <상상> <리뷰>와 같은 문화 연구 계간지들이 나오고, ‘현실문화연구’ ‘새물결’ 같은 이 문화를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는 새로운 이론가들은 자본·권력·역사 등 세계의 하드웨어가 문화 현실을 가동시키면서 그 문화 현실의 배후에 숨어 있다고 지적한다.

 문화 비평가 김종엽씨(32·<리뷰> 편집위원)는 “생존 차원을 벗어나면 모든 것이 문화”라고 규정한다. 그리하여 문화 연구는 그 대상이 무궁무진하다. 이 무궁무진함이 문화를 연구하는 매력이지만, 아직 이론과 분석틀이 정착되지 않아 문화 연구는 모호해 보일 때도 있다. 김씨는 지난해 여름에 펴낸 <웃음의 해석학, 행복의 정치학>에서 문화 연구의 불분명함은, 접근 대상인 문화에 대한 문제 설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김종엽씨는 웃음·사랑·죽음·슬픔과 같은 존재론적인 주제를 통해 대중 문화의 세계를 해석해 낸다. 그는 앞으로 현대성을 탐구하는 비교적 긴 비평을 책으로 묶을 생각이다. 죽음·자동차·스포츠·보험·시간과 공간을 단서로 삼을 예정인데, 개개인의 일상성 속에 얼마나 커다란 역사와 삶의 양식들이 자리잡고 있는지를 드러낼 참이다.

 서울대 사회학과를 나와 서울대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있는 그는 “인간과 세계가 합리적·제도적으로 개선되는 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면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힘과 싸울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을 발견해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李文宰 기자

이경원
패션계 이방인 반항의 뜨개질

 한국 패션계에 30대 중심의 새로운 물결이 일어나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 하나 있었다. ‘뉴 웨이브 인 서울 컬렉션’이라는 패션 디자이너 모임이 93년 4월 첫 작품전을 열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뉴 웨이브…’ 등장과 더불어 그동안 묻혀 있던 한 디자이너에게도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니트의 이방인’이라는 별명이 따라 붙으면서 패션계에서 화제의 인물로 떠오른 이경원씨(35·가원기획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패션 디자이너의 명함이나 마찬가지인 자기 상표(브랜드)를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 패션 디자이너의 성지라 할 만한 파리에도 가본 일이 없다. “파리? 돈이 없어서 못 간다.” 그러나 그는 주목받는 디자이너이다. 니트가 그의 전문분야이다. “나는 옷을 만드는 사람이고, 니트는 내 장기일 뿐이다.”

 그는 ‘뉴 웨이브…’의 첫 컬렉션 때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해 보았다‘라고 말했다. 반항이었다. “니트는 곧 스웨터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표현 방법이 무궁무진하고 다릴 필요가 없어 실용적이며 얼마든지 멋도 낼 수 있지 않은가.”

 그는, 94년 10월 일본 간사이 공항 오픈 행사의 하나로 열렸던 오사카 패션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처음으로 외국에서 자신의 작품을 선보였다. 그가 만들고 싶어하는 것은 ‘값싸도 재미있고 입기 편한 옷’이다. 李興煥 차장대우

김규환
“새로운 것이 좋다” CF계의 스필버그

 CF 감독 김규환씨(35·유레카필름 프로덕션 대표)는 끊임없이 집착하며 훈련한다. 그는 88년 스물여덟살에 최연소 CF 감독이 되었다. 그때 그의 무기는 대학과 군 시절에 갈고 닦은 디자인 실력 하나뿐이었다. 거기에 카메라의 영상이 가세하자 그의 작품은 무명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다. ‘어린 재주꾼’의 작품은 틀에 박힌 기법에 변화를 가했다. 뮤직 비디오에서 스토리텔링(논노), 영화 컬트적인 영상(에스콰이어), 다큐멘터리(소말리아), 그리고 광고와 영화(아이스 맥주)를 한데 묶었다. 그 다음이 무엇이 될지는 김감독도 모른다. 다만 CF가 인간에 대한 관심에서 행복과 아름다움을 그리는 작업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은 틀림없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환자’인 김감독은 아프리카에서 ‘무섭도록 아름다운 인간’을 보았다. 추하고 비참한 소말리아인들의 표정을 카메라로 봤을 때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아름다움으로 비쳤다. “그들은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가르쳤줬다”라고 김감독은 회상한다.

 “나가서 이기는 것만이 국제 경쟁력이 아니다. 밀려들어오는 외국 상품으로부터 한국의 정서를 지키는 것도 국제화라고 본다.” 91년 뉴욕에서 광고를 찍다가 미국의 유명한 광고 프로듀서의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친 ‘한국 CF계의 스필버그’ 김규환 감독의 국제화에 관한 생각이다.

노재령
여성 큐레이터의 ‘세계화’ 안내

 이화여대 서양화과 1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에 있는 아메리카 대학과 대학원에서 서양화 실기를 전공한 노재령씨(32·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는 90년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로 들어간 이듬해 다시 3년간 유학을 다녀왔다. 뉴욕 대학에서 미술 이론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지난해 돌아온 것이다.

 “서양화 실기 경험이 큰 도움이 된다”고 노재령씨는 말한다. 80년대 중반부터 국내에 그 역할이 알려지기 시작한 큐레이터는 아직 정착 단계는 아니다. 화단 한쪽에서는 아직 국내에 진정한 큐레이터가 없다는 소리도 내놓는데, 이 지적에는 비판보다는 큐레이터 역할의 시급함이 깃들어 있다.

 큐레이터는 한 나리의 미술사를 정리하는 매개 역할을 하면서, 기획과 전시를 통해 작품과 감상자를 이어주고 동시에 미술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교육 기능까지 담당한다.

 “외국에 견주어 우리 큐레이터의 현재 수준은 떨어지지만 전망은 밝다”고 말하는 노씨는, 국내 작가들의 해외 진출을 도울 생각이다. 자기 작품을 해외에 알리고 싶어하는 화가들은 많지만 이를 뒷받침해줄 국내 미술관은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테크놀로지와 미디어, 그리고 새로운 경제 질서가 이루는 커다란 환경과 미술은 서로 독립될 수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는 노재령씨는, 이 같은 시야를 가져야 한국 미술이 국제화·세계화로 나갈 수 있다고 진단한다.

김태영
다큐멘터리에 미친 집 없는 떠돌이

 텔레비전 프로덕션은 작은 방송사다. 독립 텔레비전 프로덕션인 인디컴의 수석 프로듀서이자 대표인 김태영씨(38)가 늘 주장하는 말이다. 93·94년 이태 동안 그는 괄목할 만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두 편을 제작해 KBS의 공중파에 띄웠다. <베트남 전쟁, 그 후 17년>과 <카리브해의 고도, 쿠바>라는 작품이다. 그는 이 두 작품으로 백상예술대상과 한국방송대상 등 3개의 상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인디컴이라는 이름의 방송·문화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남이 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우리는 절벽 끝에서 절벽 끝으로 뛰어넘는 기분으로 일했다’ ‘텔레비전 방송국의 돈을 받아 제작하는 하청 작업은 한번도 한 적이 없다’. 93년 2월에 설립되어 화제의 ‘외인구단’이 되어온 인디컴이 그동안 뿌려놓은 어록들이다. 일에 미친 프로듀서 1명이 꾸려나가는 인디컴과 더불어 김태영씨는 어느 사이엔가 다큐멘터리의 장인(匠人)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주위 사람들은 차세대 선두 주자로 김태영이라는 이름 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지난해 12월16일, 그는 쿠바에 있었다. 쿠바 관광청과 프로그램 제작 계약을 맺고 들뜬 기분으로 호텔에 돌아온 그에게 한국에서 전문이 하나 날아와 있었다. ‘감독님 집이 전소됐습니다.’ 서울 아현동 가스 폭발 사고로 그의 집과 10년 동안 모아온 귀중한 자료가 한 순간에 날아간 것이다. 그날은 그의 생일이기도 했다.

 떠돌이가 된 그의 손에는 지금 2년 동안 준비해온 30부작 대형 다큐멘터리 ‘세계 영화 기행’ 기획서가 들려 있다.

김창환
“김건모 노래 유럽에 필겠다”

 김창환씨(32·라인기획 기획이사)는 국내에서 유일한 대중음악 PD이다. 90년 가수 신승훈을 데뷔시키면서 그 자신도 음악 PD로 나섰다.

 음악 PD는 신인 가수 발굴은 물론, 한 가수의 음반 제작 전과정을 관리한다. 기획에서 작사·작곡·녹음에 이르기까지 총지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대중 음악의 국내외적인 흐름과 대중의 정서를 객관적으로 읽어내는 감식안이 필수이다. “가수나 작곡가는 자신의 주관에 빠지거나 전체를 보는 안목이 떨어지기 쉽다”고 김씨는 말한다.

 김씨는 마이클 잭슨을 키워낸 퀸시 존스, 마돈나를 스타로 만든 젤리 빈 등 미국의 음악 PD들에게서 영향을 받는다. 미국 대중 음악은 6명의 음악PD에 의해 움직여진다고 하리만큼 음악 PD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81년 경희대 공예과를 다니다가 3개월 만에 음악을 하려고 자퇴한 그는, 음악 PD가 되기 전까지 그룹 사운드에 참여하고 DJ로 나서기도 하면서 작사·작곡에 전념했다.

 김건모·신승훈·노이즈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그는 올 봄에 ‘김건모 팝 앤드 라이브’라는 영어 가사 앨범으로 동남아 시장에 첫발을 내디뎠다. 김씨는 한국 대중 음악이 일본이나 동남아 국가들보다 앞선다고 판단한다. 심의 제도 같은 내부의 장애만 해소된다면 일본·중국·동남아 시장은 물론 유럽까지도 넘볼 수 있다고 김씨는 자신하고 있다.

 “대중 음악은 폭발적인 문화 상품이다. 그러나 당국은 물론이고 일반인도 대중 음악이 갖고 있는 엄청난 경쟁력을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김씨는 안타까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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