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지리아 · 강태서] 시장개척의 ‘꾼’
  • 글 조용준 특파원 ()
  • 승인 1990.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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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뜨거운 적도의 태양이 지면서 나이지리아의 수도 라고스에 어둠이 깔린다. 라고스 동쪽 끝 한 창고단지. 눈이 유난히도 빛나는 40대 초반의 한 남자가 8명의 현지인 인부를 부리며 타이어 하역 작업을 벌이고 있다. 태동물산의 姜泰書(43) 사장이다.

 저녁식사까지 거른 채 일을 하고 있지만 콘테이너 3대분의 타이어를 다 풀려면 오늘도 밤 10시는 넘겨야 한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찝찔한 빵을 씹으며 김 빠진 콜라로 목을 축인다. 오후 늦게야 통관을 마친 타이어 1천5백개를 5백평 남짓한 창고에 가지런히 쌓자면 어쩔 수 없다. 일을 끝내고 창고를 떠나기 전 그는 기관총을 소지한 경비원에게 경비를 철저히 하도록 여러번 당부한다.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일에만 몰두

 사무실 겸 거처로 쓰는 시내 아파트로 향하기 전에 강사장은 돌아볼 곳이 또 한군데 있다. 올 2월부터 가동에 들어간 비닐봉지 공장이다. 야간근무조 남녀 20여명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작업을 준비한다.

 한국인 공장장과 생산일정을 점검한 그는 금요일의 회교도 휴일과 독립기념일인 월요일에는 근무를 않기로 했다. 나이지리아에는 교파가 많은 만큼 휴일도 많은데, 휴일만 되면 일을 하지 않으려는 현지인들을 생산라인에 앉히려고 설득하는 데도 이젠 이골이 났다. 장사를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이번의 연휴만큼은 일 욕심 많은 강사장도 푹 쉴 작정이다.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계속되는 그의 하루는 서울에 전화를 거는 것으로 시작된다. 오전에는 라고스시장 골목을 돌아다니며 거래선을 만난다. 오후에는 은행에 들러 융자문제등을 상담하고, 때로는 나이지리아 정부 고관들과도 접촉을 가져야 한다. 물품대금도 직접 수금해야 한다.

 강사장은 대학공부를 마치자마자 사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전기부품을 납품하는 사업에 손을 대 몇달 안되어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 그 다음에 눈을 돌린 곳이 해외시장. 그는 우선 오일달러로 흥청대던 중동을 찾았다. 그가 중동을 택한 것은 그곳에서 날아온 거래편지마다 빠짐없이 “우리는 기름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수입에 의존한다”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중동을 돌아본 그에겐 해외시장 개척 욕심이 더욱 솟구쳤다. “돈이 떨어지면 중국집 종업원으로 일을 해서라도 비행기표를 마련할 각오”로 아프리카를 향해 날아갔다.

 

신혼 아내는 남편 생사 몰라 눈물로 지새

 이집트 리비아 튀니스 모로코 등 회교권의 북아프리카를 들른 그는 내친 김에 세네갈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코트디부아르 가나 나이지리아로 내달렸다. 당시 여러나라가 통신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 아직 신혼의 새댁이었던 그의 부인은 남편의 생사를 알지 못한 채 옷장에 걸려 있는 그의 옷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6년 전 이렇게 의욕 하나만 믿고 중동과 아프리카에 뛰어든 강사장은 섬유제품으로부터 전자제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품목을 팔아, 많을 때는 하루에 10만달러의 순이익을 올렸다. “아직도 아내와 두 딸과 떨어져 살면서도 이 생활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같은 사업의 짜릿한 매력을 잊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의 아파트 정문과 창문에는 온통 두터운 창살이 덮어 씌워져 있다. 은행에 예금하려면 보관료조로 오히려 돈을 내야 하는 것이 이곳 사정이다. 정변이 잦은 이 도시는 어느날 갑자기 방화와 약탈의 도시로 둔갑할지 모르는 험악한 곳이다. 올해초 불발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그는 맨 먼저 공장과 창고로 달려가 문단속부터 했다. 태동물산의 1년 매출규모는 9백만달러에 육박한다. 그는 몇년 전 한국에서 온 취재기자를 만난 뒤 서울 세무서로부터 세금을 더 내라는 요청을 받았다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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