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이슈로 떠오르는 포스트모더니즘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0.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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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즘계열의 문제제기로 문학 · 예술계 논의 다시 활발

 “포스트모더니즘은 중요하지 않다. 포스트모던한 현실이 중요한 것이다.”80년대 후반 포스트모더니즘(탈/후기 현대주의)의 개념과 그 정체에 대한 논란들로 떠들썩했던 문학 · 예술계에 다시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주로 영미문학자들에 의해 80년대 초반부터 우리 문학계에 ‘도입’되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기피와 냉소로 인해 리얼리즘 계열에서는 거의 무시되어왔다. 그러나 일부 모더니즘 계열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수용, 최근의 시와 소설을 탐색하기 시작했으며, 미술 무용계 등에서도 같은 움직임이 일어났다.

 오는 27일 민족문학작가회의(회장 高 銀)가 서울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개최하는 심포지엄 ‘민족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은 그간 무시(혹은 무지)로 일관해온 리얼리즘 진영의 반성과 그 극복을 모색하는 계기로 작용할 것 같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이론가 가운데 한사람인 프레데릭 제임슨을 국내에 소개하면서, 우리 앞에 현실로 나타난 포스트모던 세계를 인정하되, “포스트모던이란 것은 극복되어야 할 생산양식”이란 견해를 밝힌 바 있는 문학평론가 白樂晴 교수(서울대 · 영문학)의 사회로 열리는 이 심포지엄에서는 都正一 교수(경희대 · 영문학)가 주제발표를 하고 姜來熙 교수(중앙대 · 영문학)와 시인 黃芝雨씨가 토론자로 나선다.

 아직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불릴 만한 작품이 국내에는 없으며, 따라서 이에 대한 논의는 우리의 문화적 주체를 부정하는 외래사조 숭배현상이라고 비판해온 강교수와 자신의 문학관과는 관계없이 포스트모더니즘 작가에 편입돼 있는 황지우씨의 토론을 거쳐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체와 이제까지 거론돼왔던 쟁점들이 거칠게나마 정리될 것으로 보여 문학 · 예술계와 학계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도교수는 탈중심주의 탈역사주의 등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예술양식)에만 매달리다가는 아무런 성과도 얻어낼 수 없다고 지적하고, 백교수의 지적처럼포스트모던 세계를 극복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주장, 이즈음 포스트모더니즘의 불투명한 소용돌이를 정리하고 있다. 도교수는 포스트모더니즘 이해에 대한 혼란은 이를 철학적 사조의 차원과 예술양식의 차원을 혼동하는 데서 비롯한다고 풀이한다.

 

“포스트모던 세계를 극복해야 한다”

이제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은 프랑스 후기구조주의 및 해체론이 미국 포스트모더니즘에 영향을 주며 진행돼왔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도교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미국 포스트모더니즘은 예술양식으로서의 그것일 뿐 이론적 토대가 매우 부실하고, 프랑스에서 료타르 · 보드리야르에 의해 주창된 포스트모더니즘은 유럽 이성중심주의가 낳은 야수성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라는 것이다.

 예술양식으로서의 미국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작가들에 의해 바닥나버린 주제와 기법실험을 ‘극단적으로 혁신’시킨 것이다. 미국작가들은 늘 부담감을 느껴왔는데, 2차대전 이후 기술(테크놀러지)선진국으로 떠오른 미국을 대표할 만한 작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비평가들의 비판이 그것이었다. 테크놀러지의 예술화와 충격주의가 미국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후기산업사회로 접어든 미국에서 문학 · 예술이 살아남기 위한 안간힘(생존양식)이었다고 도교수는 분석한다. 즉 그것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자생적’ 예술양식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현실 인식능력의 부재”라는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철학사조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프랑스‘태생’으로 80년대 초반에 나타난다. 도교수의 주제발표에 따르면, 자크 데리다의 해체론과 미셸 푸코의 후기구조주의가 건드리지 않은 부분을 발전시켜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명명했다는 것이다. 양차대전을 겪은 서유럽 지식인들은 문명의 중심으로 자부했던 서유럽에서 어떻게 가장 반문명적 야수성이 가능했는가를 반성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그 결과 과거와의 단절을 내세웠다. 그 과거는, 야수성을 낳은 이성중심주의의 세계였으며 인간중심주의였고 선과 악, 이성과 감정 등의 이항대립(구조주의)이었다. 료타르 · 보드리야르의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중심주의를 거부하고 인간까지도 해체한다.

 료타르는 자본주의나 마르크시즘 같은 이데올로기가 유토피아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허깨비’라고 규정, 언어게임(규칙)론을 내세우며 거대한 규칙에 지배되지 않는 사회를 상정한다

 “역사는 끝났다. 생산도 끝났다. 노동도 끝났다”는 보드리야르의 선언은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을 요약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는 생산양식이 변화한 세계다. 인간 대신 기계가 생산하며 고부가가치 시대이고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기호와 정보에 의해 규정되는 사회이다. 도교수는 “포스트모던 세계를 가장 대표하는 특징이 컴퓨터사회”라고 말한다.

 이외에도 포스트모더니즘 쟁점들은 그 발생지가 미국이냐 아니냐, 탈모더니즘이냐 후기모더니즘이냐를 두고 견해 차이가 있어왔으며, 세계적 현상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논의도 있었다. 이 가운데 앞의 두 쟁점은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권에 대한 논의는, 리얼리즘 계열에서는 포스트모던 현상은 세계적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적이지 않다는 시각을 보이고 있는 반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세계적 현상으로 보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긍정론자들은 물론이고 리얼리즘 계열에서도 우리 사회는 이미 포스트모던 사회로 진입했다고 판단한다. 물론 정치적인 부분은 제외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그러나 리얼리즘쪽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이 아예 없거나, 그런 징후가 발견된다 해도 관심을 내비치지 않는 실정이다. 반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최근들어 우리 현대시와 소설을 포스트모더니즘의 그물로 건져올리고 있다.

 

“김수영 후기시도 이 계열”

 계간 《현대시사상》가을호는 특집 ‘우리시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마련, 한국 현대시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에서 본격적으로 조감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나 리얼리즘의 객관적인 비판이 아니라 그 모두를 ‘감싸면서 초월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시인 李昇薰 교수(한양대 · 국문학)는 “우리 현대시사에 모더니즘이 존재했으므로 당연히 포스트모더니즘은 가능하고 그 작품들도 존재한다”고 명백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시인 朴尙培 교수(한양대 · 독문학)도 같은 견해로, 60년대말 김수영 시인의 후기시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를 감지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 특집에서 문학평론가 김준오 교수(부산대 · 국문학)는 “오늘날 지배적이고 문제적인 공간은 도시”라고 전제하고 80년대 후반 등장한 오규원 최승호 이윤택 하재봉 장정일등의 도시시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에서 분석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의 현실과 도시시의 본질을 진단하는 데 유효한 눈을 제공한다”고 밝히고 있다. 80년대 한국의 해체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전개과정을 찾는 박상배교수는 이윤택과 장정 일의 일상시가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큰 길잡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소설분야에서는 문학평론가 권택영 교수(경희대 · 영문학)가 지난해 윤후명의 단편을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분석하며, 일관된 관심을 기울여왔다. 권교수는 최근 계간 《현대시세계》에서 황지우 이성복 박남철 시인의 80년대 작품들에서 각각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인 콜라주, 미로에 갇힌 언어, 깨어진 거울에 반영하기를 읽어내고 있다. 권교수는 “80년대 초반의 우리 시는 신기하리만치 포스트모던적”이라고 파악한다. 이외에도 작가 이인성 박인흥 최수철 김수경 장정일 등의 작품들도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로 해석되고 있다.

 최근들어 문학계가 포스트모더니즘 열기에 휩싸인 반면, 73년 홍신자씨의 <제의> 공연으로 일찍이 포스트모더니즘을 경험한 국내무용계는, 무용평론가 金敬愛씨에 따르면 모더니즘 무용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먼저 소개되는 기현상이 나타났었다. 80년대 중반 이후 이정희 남정호씨는 최초로 포스트모던 댄스를 선보였다. 그러나 일상동작이 곧 춤이라는 주장이 무용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인 테크닉을 증발시키고 말았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예술 자체의 탄력성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파악하는 미술평론가 서성록씨는, 국내 미술계에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를 촉발시킨 계기가 85년, 모더니즘을 극복하자는 일단의 흐름을 형성한 ‘메타복스’그룹과 ‘난지도’ 동인 그리고 팝 아트와 연결되는 ‘현 · 상’동인의 전시회들이라고 본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이라고 단정할 만한 작품은 아직 없고 다만 그 특징의 일부를 반영한 작가들로, 조각가 김영원 문인수, 화가 한만영 이석주 임철순 등을 꼽는다. 연극이나 음악분야에서는 아직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없고 영화계는 젊은 영화평론가들 사이에서 주로 미국 할리우드 영화의 역기능을 지적하는 데 포스트모더니즘을 차용하고 있는 것 같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두 얼굴’

 문단을 중심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최근의 쟁점과 비평들을 살펴보면, 예술양식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보다는, 포스트모던한 사회를 분석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리얼리즘 진영의 논의는 옮아갈 전망이다. ‘경직된 리얼리즘’으로는 더이상 이 세계사적 대변혁을 감당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리얼리즘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식론의 일부에 관심을 갖고 문제제기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

 ‘민족문학과 포스트모더니즘’심포지엄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적 특성들 가운데 탈역사주의 탈제국주의 등 ‘보이지 않는 얼굴’에 유념할 것 같다. 탈역사주의는 인간의 사회적 목표를 상실하게 하며, 결과적으로 현존하는 문제들을 인정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제3세계를 인정하는 듯한 탈제국주의에의 동조는 오히려 정치적 제국주의가 아닌 기업제국주의(다국적기업)의 ‘강력한 자본의 논리’의 수중에 들어갈 우려가 있으며, 상대주의는 비판 부재를 불러와 새로운 보수주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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