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高銀 “지식인부터 제몫해야죠”
  • 박상기 문화부차장 ()
  • 승인 1990.12.2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열정이 시인의 식량이라면 高銀은 대단히 행복한 시인이다. 그의 삶도 문학도 열정에 떠받혀 마치 신들린 듯하다. 이미 70여권의 방대한 저작을 펴낸 그는 올해에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문학적 신명’에 지펴서 하루평균 1백여장에 달하는 시와 산문을 썼다.

 1933년 전북 군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20, 30대에 승려?거지?엿장수 등을 하며 폭음과 방랑을 일삼던 그는 한동안 ‘허무주의 시인’의 대명사로 불리었다. 그러나 70년대초부터는 사회현실 속으로 뛰어들어 민주화투쟁에 앞장서온 대표적 ‘민중시인’의 자리에 올라 있다. 83년 李相華 중앙대교수와 결혼하여 경기도 안성의 호젓한 숲속 마을에서 창작의 불꽃을 지피고 있는 그를 만나 이 시대와 우리들의 삶에 대한 예기를 들어보았다.

 

● 통일음악제, 남북영화제 등 최근에 성사된 남북문화교류를 어떻게 보십니까?

 참으로 반가운 일이죠. 그러나 문화교류의 창구를 정부가 독점하고 있는 형태는 결코 바람직스럽지 못합니다. 내가 지금 회장을 맡고 있는 민족문학작가회의도 지난해 3월 판문점에서 남북작가회담을 가지려다가 당국에 저지당했는데,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서 추진하는 민간교류에 대해 정부가 좀더 전향적인 자세를 가져주기 바랍니다. 당시 정부의 반대 논리는 남북작가회담에 참여하는 우리측 문인들을 두고 “대표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통일운동의 대표를 선거를 해서 뽑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 70년대초 이래 문인 사회참여의 구심체 역할을 해온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로 변신했지요?

 그렇습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74년 ‘자유주의적인 지식인의 문학운동’이라는 대단히 소박한 취지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정치상황에 맞서 반독재 민주화?노동3권의 보장 등 당면 사회문제를 쟁점으로 삼았습니다. 그후 유신정권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자유’와 ‘실천’의 의미 중에 ‘실천’이 더 중요한 행동개념으로 된 것이죠. 내 경우는 70,80년대의 대부분을 ‘자유실천운동’과 더불어 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민족문학작가회의는 갖은 탄압과 음해를 받으면서도 양심적 문인들의 희생으로 지켜온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발전적으로 확대된 것이지요. 87년의 6월항쟁이 지나고 사회 저변에서 통일운동이 고조되자 이를 문학의 틀안에 수용해야 한다는 인식이 높아져 자연스럽게 민족문학작가회의가 탄생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남한사회에서의 억압의 논리에 대응하는 작가들의 행동규범을 담고 있었다면, 민족문학작가회의는 이러한 문제와 더불어 남북과 해외동포들, 즉 모든 민족구성원의 문제를 끌어안아 하나로 일치시키는 문학운동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 어떤 마음가짐으로 시를 쓰십니까?

 우리의 현대문학사에는 질과 양에서 괴테나 톨스토이와 같은 문호의 작품이 없지요. 과거 식민지 시대에 우리 문인들은 대부분 술을 너무 많이 먹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 조국에 대해서 나그네처럼 살아왔습니다. 그들이 민족과 역사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가령 만주로 가서 왕성한 창작의욕으로 독립군을 위한 문화전선에 기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느낍니다. 시인은 시대의 전위이자 후열을 맡은 자입니다. 맨 앞에서 깃발이 될 때도 있지만 시대의 맨 뒤꽁무니에서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노력도 해야 하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근면한 노동자가 되어야죠. 나는 제일 일을 많이 해야 되는 것이 작가?시인의 기본원칙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 자신도 그동안 재야활동으로 인하여 창작에 전념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지금 내 나이로 보아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한 10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면 참으로 시간이 아깝습니다. 하루 빨리 세상이 평화로워져서 세상사에 나서지 않고 오로지 시만 쓰다가 죽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그는 올해 시집 6권, 평론집 2권, 산문집 2권을 출간하는 경이로운 집필력을 보이고 있다. 4부작(전8권)으로 집필중인 대서사시《백두산》은 현재 제2부 1천5백장을 탈고해서 내년초에 펴낼 계획이며, 전 30권 계획의 연작시《萬人譜》도 정열적으로 집필중이다).

● 지난 한해 동안 놀라운 만큼 왕성한 문학적 생산력을 보여주었는데, 그 창작의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쓰지 않으면 못견디겠어요. 무당들이 무병을 앓듯이 나는 쓰지 않으면 크게 아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쓰는 것이 늘 새로워요. 어쩌면 시인이란 매일 새로운 세계와 만나라는 신의 축복을 받은 자가 아닌가 생각해요. 이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내가 처음 쓴다는 그 자체가 신명이 되는 것이죠. 작가는 늘 처녀성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투적인 글밖에 나오지 않아요. 지금은 시간이 없어 나서지 못합니다만 나는 여행을 좋아합니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풍경과 만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영화도 참 좋아합니다. 좋은 영화는 대사 따로 듣고, 조역들의 움직임만 따로 쫒고 하느라 일곱 번씩이나 보고 그래요. 사람들에게 나는 늘 새롭게 사는 비결로 영화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영화에는 청춘이 있고, 그 청춘을 간접체험함으로써 젊음의 생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 30여년에 걸친 선생님의 시세계를 말할 때 “허무에서 역사로 나아갔다”고 평하는데, 그 변모의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삶에 눈 뜰 무렵에 남북동족상잔을 치렀습니다. 전쟁이란 비극 속에는 인간이 송두리채 없어지는 허무가 깃들어 있어요. 한국전쟁으로 도시는 폐허가 되고 산야는 초토가 되었으며, 나는 미친 듯이 폐허를 떠도는 방랑승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역사 상황이 나에게 반사된 것, 그것이 허무주의였고, 그 허무에 빠져서 끝없이 방랑하고 폭음하고 또 네 번의 자살을 시도했죠. 한번은 정릉 골짜기에서 수면제 1백60알을 소주에 타서 먹었는데, 하필 그날 기동훈련 나온 예비군들에게 발견되어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늘 죽음과 닿아 있었고 죽음을 결심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70년에 全泰一의 분신을 보게 됩니다. 내 마음 속에 나를 움직이는 규범이 효봉 스님이란 은사에서 노동자 전태일로 바뀌었지요. 그 사건은 역사의 실체가 준 충격이요 혁명이었습니다. 허무의 늪에서 벗어나 역사를 정면으로 맞받으라는 거대한 울림이었습니다. 그리고 3선 개헌에 반대하고 긴급조치?유신체제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몸에 불이 붙었고 그 불을 끌 수 없으니까 불붙은 채 앞으로 달려나올 수밖에 없었지요.

● 혹시 또 한번의 사상적 변모나 삶의 변혁을 예감하지는 않습니까?


 노자는 “진리의 언어는 반대의 언어”라고 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반대가 항상 새로운 세계를 열고 새로운 단계의 가치를 창조했다고 봅니다. 한 인간의 삶에도 변증법적인 갈등과 변화가 있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새로운 세계의 동력으로서 반대를 아주 가치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인지 청년적인 열정, 청년적인 저항의 열정은 많이 가라앉혔습니다.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민족문학도 반드시 계급모순에 입각한 노동자문학과 이것의 반대입장인 소시민적 문학으로 나뉘어서 서로 대립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발성을 함께 껴안아 수용하는 대교향악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올해 이런 점을 놓고 민중문학노선을 추구하는 젊은이들과 많은 논쟁을 했습니다. 서로가 싸울 때는 치열하게 싸우지만, 나는 싸움의 상대인 그들을 무척 사랑합니다. 왜냐면 서로의 반대논리가 부딪힘으로써 나도 새로워지고 그들에게고 내 진실이 투영되는 변증법적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 지금 집필중인 《백두산》《만인보》와 같은 대작을 쓰게 된 동기가 궁금하군요.

 모두 80년대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끌려간 육군교도소 특별감방에서 구상한 것들입니다. 그곳에는 창이 없어 불을 끄면 사진 암실같이 깜깜했지요. 그때의 분위기로 보아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구요. 그런 절망적 상황을 이겨내려면 추억과 상상이 필요합니다. 계속 무언가에 매달려 꿈꾸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 방랑시절에 본 천안삼거리의 늙은 주모 등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어요. 상상 속에서 그들과 말을 나누고 싸우기도 하고 울고웃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여기서 나가면 세상살이에서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시 한편씩을 부여해서 남기겠다는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萬人譜》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또 감옥에서 나가면 의병운동에서 독립전쟁까지의 민족항쟁을 대서사시로 쓰겠다고 다짐했는데, 그것이《백두산》입니다. 이밖에 다른 한 작품을 구상했지만 그것은 아직 시작하지 않아서 밝힐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감옥구상의 산물인 셈이지요.

● 77년 민주구국헌장사건으로 투옥된 이래 지금까지 네차례의 수감생활을 겪으셨는데 수감생활에 대한 글은 쓰지 않으십니까?

 가능하면 감옥을 팔지 않으려고 합니다. 재야운동하다가 감옥에 갔다온 사람이 어디 한둘입니까. 우리 사회에서는 특수한 체험도 아니고 자랑할 것도 못됩니다. 내 경우는 감옥시절을 그냥 묻어두고 싶은 작은 무덤으로 여깁니다. 한번은 대구교도소에 있을 때인데, 국어사전을 구해서 우리말을 공부하느라 성냥개비로 인주를 묻혀서 낯선 단어에 표시를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준집필행위’에 해당된다며 사전을 빼앗아갑디다. 그걸 다시 찾느라고 단식투쟁을 했습니다만, 우리의 교도소는 너무 살벌하고 삭막합니다.

● ‘시인은 사회의 체온계’라는 말이 있는데 ‘90년 한국’을 느끼는 선생님의 체감을 말씀해주십시오.

 사회학자처럼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6공의 중반기는 사회진행이 정체되고 모든 사회적 가능성이 해체되고 있는 심각한 위기국면이라고 봅니다. 경제정책의 실패, 시국사범의 증가, 관료의 부패 등 부정적 징후가 짙어지고 있고,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도 구조적으로 자꾸 강해져가고 있습니다. 탄압이 강해진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탄압으로밖에는 그 체제가 유지될 수 없다는 논리로 귀착되거든요. 우리의 역대 정권을 보더라도 탄압하면 반드시 깨어지게 되어 있다는 교훈을 생각해야 합니다.

● 우리 사회의 부정적 현상을 지배체제 탓으로 돌리기 전에, 개개인의 삶과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습니까?

 그게 참 중요한 문제입니다. 오늘의 사람들을 보면 폭탄을 하나씩 끌어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걸핏하면 그 폭탄을 폭파시켜 버리는, 거의 전쟁분위기나 다름없이 사람들의 성품이 아주 사나워져 있어요. 사회가 이렇게 된 책임을 지배층에게만 돌릴 게 아닙니다. 국민 전부가, 사회구성원 전체가 함께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헌걸찬 문화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문인?지식인들이 앞장서서 ‘인간이 없는 시대’로부터 ‘인간이 있는 시대’를 창출해내야 되겠다는 점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죠.


● 선생님의 작품에선 그런 인간화의 의지가 어떻게 표현되고 있습니까?

 인간은 문학의 영원한 주제이니까 나 역시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인간으로서 삶을 완성하는 문제를 성찰하고 있죠.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에 갇혀 있으므로 민족문학이 지향하고 있는 ‘민족’과 문학일반에서 말하는 ‘인간’을 일치된 개념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통일이 되어서 민족문제가 해결된다면, 자연스럽게 민족문학이라는 이념성이 약화되면서 다시 인가존재의 문제를 추구하는 문학으로 나가게 되겠지만….

● 머지않아 다시 한해를 맞게될텐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하는지요.

 사회 각계 각 분야에서 모두가 자기 몫의 역할을 잘 해내야 합니다. 특히 대단히 중요한 것은 창조적 소수로서의 문화계층 사람들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가서 그들의 따뜻한 벗이 되고 그들의 상처를 감싸주고 꽃을 피워주는 일을 해야죠.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나라를 ‘꽃다운 강산’이라고 표현했는데, 나는 우리나라 사람을 ‘꽃다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를 들면 시인은 시집을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를 낭송하는 일을 많이 해야지요. 거리에서나 무대에서나 공장에서나 동시대인의 아픔 용기 사랑이 깃든 시로 대중과 만나야지요. 또 사회과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학문을 쉽게 풀어서 대중에게 알려야 과학적인 정신이 길러집니다. 문화와 예술, 과학정신의 체험을 널리 확산시켜야 우리 사회가 인간다운 사회, 합리적인 사회로 다져질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에 사막을 안고 살거나 폭탄을 안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좀더 깊이 있는 인간, 자신의 사고를 꾸준히 발전시켜나가서 마침내 정신의 꽃을 피우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