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 외교정책은 합격점”
  • 정리 · 변창섭 기자 ()
  • 승인 2006.04.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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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정책 · 북방외교 새 장…‘전략’ 부족 · 한건주의 등 문제도

 

정욕석(사회) : 노태우 대통령의 업적 중에서 두드러진 것이 대외정책입니다. 외교통일 정책에서 건국 이후 40년 동안 달성하지 못했던 것을 이루어, 중국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와 관계를 정당화했고 남북한이 유엔에 가입했습니다. 이는 1948년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외교적 수확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남북분단 이후 최초로 화해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됐습니다. 적어도 문서상으로 보면 남북관계의 커다란 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남식 : 외교분야에서 역시 88년에 발표한 7 · 7선언, 즉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이 외교정책, 나아가 통일정책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고 봅니다. 이 선언 후 열린 서울올림픽은 민간외교의 개가라 할 수 있으며 여러 가지 상황이 동구구건의 변화와 맞물려 동구부터 수교가 시작돼 마침내 소련과의 수교까지 왔습니다. 소련의 한반도 정책변화도 크나 우리 정부측의 적극적인 노력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지난 8월24일 중국과 수교했는데 이는 정부의 북방정책 순서로 봐도 자연스러우며, 특히 중국 입장에서 북한을 의식하면서 우리와 수교한 것은 특기할 만합니다. 이렇게 한반도에 깊은 이해를 가진 소련, 중국과 수교했다는 것은 통일을 위한 외적조건의 개선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안병준 : 6공 외교정책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역시 북방정책을 성공리에 마친 것입니다. 북방정책은 8월24일 중국과 수교함으로써 사실상 완결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여건이 좋았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탈냉전의 흐름 속에서 공산권이 변화하기 시작했고, 88올림픽을 통해 한국의 경제력을 세계에 과시했으며 7 · 7선언을 바탕으로 진취적이고 시의적절한 북방정책이 추진됐던 것입니다.

정용석 : 북방정책의 긍정적 성과는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북방정책이 아쉬움과 부작용을 남긴 것도 사실입니다. 우선 너무 서둘렀다는 것입니다. 한국이 공산국과 외교관계를 다급히 추진하지 않았다 해도 탈냉전의 흐름 속에서 어차피 이데올로기시대가 지난 마당에 공산권과의 외교수립은 자연스럽게 이뤄졌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공산권과 수교하기 위해 지불한 경제협력 차관은 불필요한 부담으로 남는다는 지적도 있지요. 소련에 30억달러 차관 중 14억 7천만달러를 공여했으나 연체된 이자만도 9월 현재 무려 4천3백90만달러이고 금년 말까지는 7천6백만달러로 는다고 합니다. 결국 6공은 명분을 중시한 나머지 실리를 상당히 잃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균형 · 조정 부족했던 북방외교

김남식 : 7.7선언 후 대북정책이나 북방정책은 전환점을 맞았지만 이에 대해 정치권이 충분히 검토하고 합의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초당적인 합의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외교관계를 수립하려면 사전에 해결해야 할 부분이 있지요. 소련과 중국은 냉전시절 적대관계에 있었고 한국과는 불행한 일이 있었는데 이런 것에 대해 서로가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사과받을 것은 사과받아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안병준 : 저도 북방외교를 수행하는 방법에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는 데 동감입니다. 외교라는 것은 내용만큼이나 절차와 방법이 중요합니다. 지금 두 분께서 지적하신 것도 따지고 보면 외교를 공작 차원에서 다뤘기 때문입니다. 즉 외교를 국가이익보다는 당장의 정치적, 가시적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공작으로 본 것이죠. 예컨대 중국과 수교한 것은 다행스럽지만 절차 면에서 대만과의 전통적 관계를 등한시한 것은, 서둘러 일을 처리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려는 동기가 깔렸다는 인상을 줍니다. 다음으로, 외교는 균형과 조정이 중요한데 북방외교와 대미관계, 북방외교와 대일관계, 나아가 북방외교와 북한관계의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대일관계가 오늘날처럼 악하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우리가 소련과 수교하면서 사전에 이를 일본측에 알려주지 않은 데 있습니다.

정용석 : 6공의 안보정책은 어떻습니까. 제 생각으론 공산권과 관계를 개선하면서도 한 · 미 안보유대에는 이상이 없도록 한 것으로 보아 균형적인 안보정책을 추진했다고 보는데요. 특히 중 · 소와 수교함으로써 한국의 안보상황이 한국전쟁 이후 어느 때보다 개선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습니다.

김남식 : 탈냉전 시대에 접어들면서 국제사회가 재편되는 과정이지만 동북아 지역에서는 전반적으로 냉전적 요소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과의 관계를 안보의 축이라고 말하면서 6개국 안보협의체를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고르바초프의 집단안보 개념을 계승한 동북아지역에서의 안보체제개념, 일본이 주창하고 있는 집단안보 개념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6공은 이에 대한 대처방안이나 나름의 뚜렷한 연구가 부족했습니다.

안병준 : 북방정책 제1의 목표는 안보에 있었다고 봅니다. 경제적으로 실리가 없어도 소련 및 중국과 수교한 것은 상당히 우리 안보에 기여한 것이 사실입니다. 우선 소련이 북한에 대한 무기공급을 중단했지요. 또 중국과 수교함으로써 북한이 전면남침을 감행하거나 종래의 경직된 태도를 취하는 것을 중국이 먼저 반대할 것입니다. 따라서 북방정책의 성공은 한반도의 안보와 평화에 기여했다고 봅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미국과 안보관계도 재조정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정용석 : 한반도에서의 안보상황이 개선되면서 주한미군의 철수가 촉진될 수밖에 없는 것도 하나의 현실입니다. 이와 함께 우리의 방위비 분담율도 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우리의 내년도 주한미국 분담액은 2억2천만달러로서 올해보다 무려 22%나 늘어난 액수입니다. 이런 비율 급증은 미국경제의 어려움과 우리 경제성장에 따른 결과이고 북방정책의 성공과 냉전의 붕괴에 따른 대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중 · 소와 선린우호 관계로 발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의 한 · 미 한 · 일 관계는 오히려 소원해진 느낌마저 듭니다. 한국은 4강에 의한 안전보장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 · 일 관계가 소원해지고 중 · 소와 불안정한 관계가 이루어져 있다는 게 냉엄한 현실이지요.

 

남북화해 시대의 기틀 마련

김남식 : 남북관계가 진전되는 과정에 있다고 볼 때 냉전시대 우방과의 안보체제는 통일시대에 들어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느냐 하는 차원에서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일본과의 군사협력 문제가 간혹 나오고 있는데 아무리 일본이 우방이라도 우리의 민족감정을 생각해서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고 봅니다. 냉전시대에 한 · 미 · 일 3각체제의 안보개념이 과연 지속되는 것이 좋으냐 재검토될 필요가 있습니다.

안병준 : 안보는 주변환경과 북한의 요소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신중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는 역시 세력균형 체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유럽은 시민사회가 부활하고 시장이 통합되는 등 안보개념이 희석되고 있지만 동아시아는 중국 러시아 일본이 있기 때문에 미국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만일 주한미군이 완전히 철수하게 되면 그 공백을 일본이 메울 수 있지요. 이에 대비해 중장기적으로 미국과의 안보관계를 강화하는 방안이 나와야 합니다. 다만 미국도 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서면 이 지역 미국을 대폭 감축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 미 상호조약을 보완할 수 있는 다변적인 안보포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북한의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집단적인 안보포럼의 필요성은 절실합니다. 또한 탈냉전의 안보개념은 국가의 경쟁력을 담보할 수 있고 나아가 정치적 안정과 도덕성까지 아우를 수 있는 포괄적 개념으로 재정립돼야 합니다.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보면 북한에 대한 우리의 경각심이 다소 해이해지지 않았나 우려됩니다.

정용석 : 6공은 통일정책에서도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6공에 들어서 새로운 통일문화가 만들어졌다는 점입니다. 반공과 대립에 기초한 종래의 통일분화를 화합과 협력교류의 통일문화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고 봅니다. 저는 이를 민족화합통일문화로 지칭하고 싶습니다.

김남식 : 6공의 대북 교류협력에서 특히 인적 · 물적 교류가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89년부터 91년 말까지 주민접촉만 봐도 2백74건에 1천4백89명이 평양을 방문했거나 이북사람을 접촉했고 북한측에선 21건에 8백87명이 남한을 방문했습니다. 물적교류도 88년부터 91년 말까지 2억3천만달러를 초과하고 있습니다. 또 고위급회담이 90년 9월 1차회의를 시작으로 금년 8차까지 열렸는데 여기서 기본합의서가 채택되고 발효하게 됐습니다. 그에 따른 분과위원회, 공동위원회가 마련돼 남북화해 불가침 시대로 갈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한 것이지요. 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해 한반도의 핵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기틀도 마련했습니다. 6공정부의 한민족 통일방안은 과거 어느 방안보다도 현실을 감안한 합리적인 것으로 북한이 내놓은 통일안과 협상 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든 것도 평가할 만합니다.

 

외무부 등 각 부처 제 기능 찾아야

안병준 : 동감입니다. 6공은 새로운 통일방안을 내놓아 통일로 가는 중간단계를 설정했지요. 그 뒤 남북관계는 과정으로서의 통일과 평화를 수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입니다. 비핵화 공동선언이나 비핵합의서는 긴 안목에서 보자면 통일로 가는 과정을 제도화하고 우리 문제를 우리 스스로 풀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정용석 : 그러나 통일정책을 추진하는 데 아쉬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요. 이를테면 북한의 대남적화혁명노선을 포기하도록 하는 데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얻지 못했지요. 바로 이 점이 한반도의 정세를 유동적으로 만들고 불안정하게 하는 요소입니다. 다음으론 우리가 적극적으로 통일정책을 추진한 나머지 너무 북한에 질질 끌려다니지 않았느냐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북한은 회담중에 언제든 자기 멋대로였지요. 이는 북한을 반드시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우리측의 절박한 사정이 깊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해도 때에 따라 대북정책과 관련해 단호한 입장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는 점에서 아쉽습니다.

김남식 : 남북고위급 회담 진행 과정에서 정치권의 합의절차도 필요했지요. 기본합의서가 나라와 나라간의 조약은 아니더라도 남북관계를 새롭게 진전시킬 문서이기 때문에 적어도 국회에서 충분히 심의되고 실천방향도 제시됐어야 했습니다. 다음으로, 남북대화의 추진기구에 문제가 생기거나 실천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으면 기동성있게 재편하거나 재조정해야 했습니다. 세 번째는 핵정책과 기본합의서를 중심으로 한 남북대화의 추진에 일관성이 없다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원래 핵문제는 핵문제대로, 기본합의서는 기본합의서대로 별도로 추진키로 했다가 어느 순간에 핵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남북관계에 진전도 없다는 식으로 일이 벌어져 뭔가 뚜렷하게 일관성 있는 정책은 미흡했습니다. 비핵화 공동선언도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 핵주권을 포기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게 됐습니다. 한심스러운 것은 정치권은 물론 일반 국민들도 합의서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래서야 어떻게 실천과정으로 넘어가겠습니까. 정부차원의 홍보대책이 너무 소홀했죠.

안병준 : 제 느낌으로는 통일이건 안보건 외교건 간에 국가차원의 전략이 부족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중앙에서 잘 조정한 지침 없이 너무 한건 한건 위주로 처리돼 왔다는 것이지요. 남북관계만 해도 지나치게 의인화, 개인위주로 일이 진행돼 왔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남북이 합의한 것은 새로운 형식의 합의이지 내용의 합의는 별로 없습니다. 따라서 앞으론 내용을 충실히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국가차원에서 확고한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정용석 : 결론으로 6공의 외교 · 안보 · 통일 정책은 역대 어느 정부보다 두드러진 성과를 거뒀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점수를 매긴다면 88점을 드리겠습니다. 다만, 6공의 대외정책이 한건주의에 바탕해 임기 안에 뭔가 이뤄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진행돼 왔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남식 : 외교를 흔히 내치의 연장이라고 말합니다. 국내정치가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에서 북방외교를 서둘렀기 때문에 그 성과가 내치와 조화롭게 연결되지 못했습니다. 다만, 남북 기본합의서를 끌어낸 것은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거둔 중요한 업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총체적으로 80점 정도 줄 수 있겠습니다.

안병준 : 6공의 업적은 역시 북방정책으로 90점 정도를 주고 싶군요. 다만, 앞으론 외교정책의 파편화, 의인화를 지양하고 이제는 외무부를 포함한 각 부처가 제 기능을 찾아 정책기능이 제도화의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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