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관대할 것인가
  • 김동선 (편집부국장) ()
  • 승인 2006.04.30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권자의 심판을 두려워 않는 정치인에 대해 국민의 관대함이 지나치면 역사는 후회하기 마련이다.”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사하라 사막에 살고 있는 모르인 3명이 귀순 대가로 프랑스에 초청되어 어느날 굉장한 폭포 앞에 안내되었다. 물 한방울이 금은보화만큼이나 값진 사막에서 살고 있는 그들은 폭포를 보자마자 그 ‘장중한 신비의 전개’앞에서 입을 열지 못했다. 안내인이 그만 ej나자고 하자 그들은 꼼짝도 않은 채 “기다려야 해요”하고 말했다. 안내인이 “무얼 기다려?”하고 묻자 그들은 “끝장을”하고 대답했다. 모르인들은 그 ‘귀한 물’이 폭포에서 쏟아지는 것이 끝나는 광경을 지켜보고자 했던 것이다. 안내인이 그 폭포물은 천년도 넘게 쏟아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했을 때야 그들은 낙심한 얼굴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폭포물에 대한 모르인들의 해석이다. 알라신을 믿는 그들은 프랑스 사람들의 神은 ‘관대하다(genereux)'고 표현했다. 사하라 사막에서는 가장 가까운 우물을 찾아가려 해도 며칠씩 걸려야 하는데, 산속에서 웅장한 물줄기가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것을 보고 프랑스 사람들의 신은 ’관대하다‘고 해석한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모르인들의 신이 모르인들에게 해주는 것보다 프랑스 사람들의 신이 프랑스 사람들에게 해주는 것이 더 관대하다”

반역사성에 대한 관대함이 타성으로 굳어진 우리 사회

 《인간의 대지》가 프랑스에서 출판된 것은 1939년이고, 필자가 이 책을 읽는 것은 60년대 후반이다. 전편에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흘러넘쳐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깊은 감동을 주는 명작인데, 필자의 뇌리에는 묘하게도 요즘, 모르인들이 폭포를 보고 “프랑스 사람의 신은 관대하다”고 말한 대목이 언뜻언뜻 떠오른다. 그리고 그 ‘신의 과대함’에 대해서 우리와 비교해보기도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3·24 총선 결과가 나왔을 때부터 필자는 한국 사람들의 신은 프랑스 사람들의 신보다 훨씬 관대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자연의 혜택 차원 뿐만 아니라 신이 내리는 벌이나 응징까지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3·24 총선에서 ‘청산’대상이었던 5공 핵심 인물들이 당선되고 청문회에서 그들의 반역사성을 질타했던 소위 청문회 스타들이 낙선한 현실은 ‘신의 관대함’으로밖에 해석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느냐, 이건 신의 뜻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 사람들의 신은 벌에 관한 한 관대하지 않았다. 2차대전이 끝난 직후 나치 협력자들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숙청은 살육전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민족 배반자들을 가차없이 처단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친일협력자들이 득세하는 꼴이었으니 관대함 운운으로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러한 반역사성에 대한 관대함이 하나의 타성으로 굳어져 오늘에 이르고 잇다.

 국회의원들의 탈당 문제에 대해서도 관대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총선이 끝난 지 이제 7개월, 그동안 탈당·입당으로 당적을 바꾼 국회의원이 32명이나 된다. 유권자 앞에서 기존 정당들을 싸잡아 비난했던 무소속 인사들, 온갖 독설로 타당을 매도했던 인사들이 그 유권자가 찍은 인주도 마르기 전에 당적을 옮기기 시작하더니 그 숫자가 무려 32명이나 된 것이다.

 물론 숫자가 이만큼 된 데에는 여권의 분열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지만, 소신 없이 정파를 옮긴 국회의원도 20명을 넘는다. 이 중에는 금년에만 당적을 두 번 바꾼 인사도 있고 야당에서 얼마 전까지의 집권당으로 옮긴 국회의원도 5명이나 된다.

정치윤리 회복이 이번 대선의 중요 선택 과제

 이들은 유권자의 심판을 두려워 하지 않기 때문에 주저없이 당적을 바꾸고 있으므로 EK지고 보면 책임의 원천은 그들을 뽑은 유권자에게 있다. 그리고 그들을 맞아들이는 보스들도 비난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 유권자를 배신한 그들이 입당할 때마다 입이 헤 벌어지는 보스들의 자세가 정치 철새들을 양산시키고 있지 않을까.

 다시 앞의 모르인 얘기를 해보자. 모르인들의 폭포 구경 얘기는 우화 같은 요소가 있지만, 그 후일담은 대단히 극적이다. 극들은 귀순 대가로 부자가 되어 호사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러나 그중 한명은 어느날 밤 프랑스 장교르 사살하고 낙타와 소총을 빼앗아 자신의 불귀순 부족과 합류해버린다. 프랑스 쪽에서 보면 배반의 극치였고, 모르족 입장에서는 영웅적 행동이었다. 그는 관대한 프랑스 신보다 인색하지만 그가 절대적으로 믿는 알라 신 품으로 돌아갔다.

 작금의 우리 정치현실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어떤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는 그 모르인의 신앙과 같은 지조가 아닐까. 10·26 후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라는 말이 유행한 일도 있지만, 남아다운 기개가 아쉬운 것이 우리 정치판이다. 그래서 신의에 바탕을 둔 정치윤리의 회복이야말로 92대선의 중요한 선택과제라고 생각해본다. 국민들의 관대함이 지나치면 역사는 자꾸 자꾸 후퇴하기 마련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