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라는 자리
  • 이흥환 기자 ()
  • 승인 2006.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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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높고 고독은 깊다



 

 1993년 2월25일 밤, 새 대통령은 대통령 관저에서 청와대의 첫날밤을 맞이한다. 한국의 14대 대통령 당선자 본인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이날 밤 청와대 새 주인의 심정을 헤아리가 어렵다.

 모든 권력이 대통령 1인에게 집중되어 있는 현행 권력구조에서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한 자연인을 철저하게 공인으로 탈바꿈시킨다. 국가의 최고 권력자라는 자리가 한 개인의 신분을 거의 완벽하게 바꾸어 놓는 것이다. 가족 친구 친인척 관계 등 극히 개인적인 사생활에서부터 사회적 지위와 명예에 이르기까지 어느것 하나 바뀌지 않는 것이 없다.

 대통령은 모든 정치인의 꿈이며 최종 목표다. 권력욕에서 비롯된 것이든 국가와 민족을 위한 애국심에서 비롯된 것이든 국가와 민족을 위한 애국심에서 비롯된 것이든 대통령이 되고 나면 가히 혁명적이랄 수 있는 신분 상승, 즉 출세를 하는 셈이다.

 군 대령이 장성으로 진급하는 경우만 보더라도 신분상의 변화는 물론 넥타이에서 리벌버 38구경 권총에 이르기까지 무려 26종이나 되는 새 군용품을 지급받으며, 지휘관으로 보직을 받으면 위관급 장교 한명이 부관으로 배속되고 2천cc 이상의 관용차가 지급되는 등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국가 원수인 대통령의 경우는 장성 진급자의 변화에 비할바가 아니다. 대통령이 거주하는 청와대와 대통령만이 사용할 수 있는 황금색 봉황 문장은 국가 최고 권력의 상징이며, 엄격하고 까다롭기 그지없는 청와대 의전과 경호 절차는 오직 대통령 한 사람만을 위해 사회제도가 창안해낸 최고 수준의 예식 규범이고 최정예의 생명 보호 수단이다.(14~15쪽 참조)

93년 2월25일 밤부터 청와대 생활

 대통령이 된 사람의 신분상 변화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우선 호칭이 바뀐다는 것이다. ‘각하’라는 호칭은 원칙적으로 청와대에서 없어진 지 오래다. 권위주의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6공화국에 들어와 이 호칭을 없애기로 한 후 청와대 비서진들은 한동안 곤혹스러웠다. 달리 대통령을 부를 마땅한 호칭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집안 식구들’(청와대 비서진과 대통령을 만나는 민자당 혹은 행정부처 인사들)끼리만 쓴다는 내부 약속에 따라 노대통령의 ‘양해’를 얻어 각하라는 호칭을 쓰고 있는데, 새 대통령에게도 예외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3급에서 장관급에 이르기까지 고위 직급자들로 구성된 대통령비서실의 50여 보좌진을 공식적으로 거느리는 것도 대통령만이 누릴 수 있는 법률상의 권한이다. 국내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보좌팀이며, 인적 구성 역시 다른 부처나 기관의 보좌진을 능가하는 엘리트로 이루어진다(13쪽 참조). 야당 당수나 여당 대표로서는 누릴 수 없는 대통령만의 권한이기도 하다.

 인사권과 정보 장악이야말로 대통령 권한을 권한답게 만드는 핵심이며, 대통령과 대통령 아닌 사람을 구분짓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이다. 총리·부총리 및 23개 행정부처의장·차관과 처장은 물론 정부투자기관장과 안기부장 등 권력 핵심인사에 대한 인사권이 사실상 모두 대통령에게 부여되어 있고, 각군 참모총장 임면에서 새로 별을 다는 장성 진급에 이르기까지 군 인사 역시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재가를 받도록 되어 있다.

 대통령은 재임 기간 동안 청와대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 신분 격상에 따르는 변화의 하나임은 물론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토로한 청와대 입주 후 6개월 간의 생활 모습은 권력의 뒷모습을 잘 보여준다. “청와대는 자유가 완전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여기 와서 처음 6개월은 미칠 것 같았어요. 2층으로 퇴청하면 살림 거들어 주는 분이 저녁에 퇴근하면서 셔터를 내려버립니다. 저녁에 출출해도 뭘 먹을 길이 없어요. 밤 10시 지나면 못얻어 먹으니 인권 침해입니다”(《전두환 육성증언》 304쪽)

권력 핵심은 ‘인사권’과 ‘정보’ 장악

 6공에 들어와 청와대는 새단장을 했다. 본관과 대통령 관저를 신축했고, 출입기자를 위한 춘추관이 세워졌다. 그러나 춘추관이 생긴 후 출입기자들은 불만이 부쩍 늘었다. 이전에는 비서실과 기자실이 같은 건물에 있었으나 춘추관이 생긴 뒤로 비서실 담 밖으로 밀려났기 때문에 비서관을 만나려면 일일이 비서실의 확인 전화를 받아 면회실을 통과해야만 한다. 대통령과 기자의 거리가 이전보다 훨씬 더 멀어진 것이다.

 춘추관 지하에는 8평 규모의 자그마한 목욕실이 하나 있다. “기자들이 야근한 뒤 쉬지도 못할 테니 목욕실을 하나 만들라”는 노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만든 것인데 기자뿐만 아니라 청와대 수석비서관들도 애용한다. 이곳은 盧在鳳 전 총리나 현 金學俊 대변인이 단골 고객으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 당선자는 취임식장에서 연미복 차림으로 오른손을 들고 취임선서를 하는 순간부터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한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86년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공보수석비서관을 지낸 李鍾律씨는 “대통령은 선택적이라는 단서가 붙긴 하지만 하고자 마음먹으면 못할 일이 없다”고 말한다. 최고의 인재와 조직, 자금을 적시에 동원해 일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대통령은 재임 기간 국가 경영에 무한책임을 진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대한민국 영토와 영해 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대통령은 “나는 모르겠다”고 발뺌할 수 없다. 국가의 최고 권력을 한손에 쥐는 대신 ‘모른다’는 단어의 표현권은 빼앗기는 셈이다.

 5공화국 때인 83년부터 89년까지 청와대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통치사료 담당 비서관으로 일하면서 ‘대통령 전두환’의 일거수 일투족을 가장 가까이서 관찰한 金聲翊씨는 “대통령은 자기 자신을 국가 운명과 동일시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 그의 저서《전두환의 육성 증언》서문에서 “대통령은 권력의 맨 꼭대기에 있고 정책결정 과정의 제일 마지막 자리에 있으며,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 중에서 맨앞에 있다”고 말한다. 전두환씨는 88년초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를 지칭해 “노태우씨가 내 친구이긴 하지만 인간 전두환은 잘 알아도 대통령 전두환은 이해 못한다. 대통령 당선자도 대통령의 고충은 알 수 없다”는 말도 했다.

 의식 구조의 변화야말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 겪게 되는 가장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이종률씨는 “대통령이 되고 나면 사고방식이 바뀌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국가경영을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대통령은 국가 이익에 철저하지 않으면 안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냉혹해야 하는데, 대통령 자리에 앉으면 자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청와대 사람들이나 한때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 국정을 수행할 때 가장 먼저 ‘開眼’하게 되는 것은 안보분야라고 지적한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정보 취득 상태에 있다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많이 배우게 되는 것이 국방과 외교 통일 등 안보 분야라는 것이다.

대통령 되면 ‘안보’부터 배우게 돼

 다분히 1인 집중적이고 폐쇄적이며, 철저한 통제가 절대 권위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현실에서 국가 목표의 우선 순위를 정하는 대통령의 국정 구상을 국민이 읽을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대통령의 생각은 연두기자회견이나 국회연설 등 극히 제한된 기회를 통해서만 표출된다. 관료들은 대통령의 ‘말’과 ‘선언’을 기준 삼아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한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곧 국가 정책이 되는 셈이다.

 대통령이 참석하는 모든 행사에는 공보비서실에서 사전에 작성한 대통령의 ‘말씀자료’가 반드시 준비된다. 일반 시민을 청와대로 초청해 점심을 하는 자리에서도 대통령은 미리 준비된 ‘말씀자료’에 기초해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노대통령은 연설문에 대해 매우 엄격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다. 연설문의 품위와 격조에 각별히 신경을 쓰며,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는 미래지향적인 내용의 연설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공보비서실 내에 통치사료 담당자를 따로 두어 ‘대통령의 말’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5공의 전두환 전 대통령 때부터다. 첫 기록 담당비서관이었던 김성익씨는 통치사료를 기록한 목적은 두가지였다고 말한다. “첫째는 대통령이 퇴임 후 회고록을 집필할 때 자료로 쓰기 위해서이고, 둘째는 순수한 기록 차원에서다.”

 문제는 국가 최고 통치권자의 말이 기록되어 있는 이 자료가 누구의 소유냐 하는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식 비공식 대화자료는 박근혜씨가 일부 소유하고 있고, 5공 사료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성익씨는 “대통령의 개인 소유냐 아니냐 하는 것을 가릴 만한 확립된 관례가 없다. 대통령이 서명한 결재서류나 공식 문건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임기말부터 정부기록보존소에 넘겨졌다”고 말한다.

14대 대통령 ‘민주적 통치권’ 명심해야

 기독교방송의 워싱턴특파원인 李廷湜씨는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의 경험을 글로 쓴 《기사로 안 쓴 대통령 이야기》라는 책에서 대통령을 ‘고뇌하는 정치인’과 ‘화려한 연기자’라는 두 측면에서 관찰하고 있다. 로버트 레드포드가 한때 상원의원 배역을 연기했지만 이제는 반대로 상원의원들이 레드포드식 연기를 한다는 말이 있듯이, 대통령이 고뇌하는 정치인임에는 틀림없지만 또한 화려한 연기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씨는, 기자들과 청와대 관계자들이 가끔 “노대통령은 대통령 그만두면 방송 앵커나 사회자 하면 좋겠다”고 농담할 정도로 노대통령은 연기자적인 소양이 상당히 있어 보인다고 평하면서, 노대통령 자신도 연기자일 수밖에 없음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고 쓰고 있다. 노대통령이 언젠가는 연예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나도 텔레비젼에 자주 나가니 어떤 면에서는 여러분과 동업자”라고 말해 좌중을 웃기기도 했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선택과 결단을 강요받는 자리다. 전두환씨는 최종 결정권자로서 겪어야 하는 대통령의 번민을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대통령은 인내와 고독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해요. 치열하게 자기와의 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대통령의 고뇌를 비교적 솔직하게 토로했다면 노태우 대통령은 ‘홀로 참고 견디는’ 쪽을 택한 대통령이다. 정치굴곡이 심했던 6공 내내 ‘노심’의 당사자였던 노대통령은 ‘참고 용서하고 기다린다’는 뜻의 ‘참용기 대통령’으로 불렸고, 그때마다 노대통령은 “너무 참는다, 약하다 하고 비판을 하는데 강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다”라고 응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정식씨는 이를 두고 “스스로 그런 말을 해야 하는 대통령의 깊은 속마음은 과연 어떠했겠느냐”고 술회한다.

 김성익씨는 “대통령에게 씌워진 신비나 환상의 껍질을 벗기고 대통령을 있는 그대로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여전히 대통령과 청와대는 ‘신비’이며 ‘환상’으로 남아 있다. 최근들어 5공 시절의 청와대 내부 이야기를 전하는 기록들이 조금씩 선보이고 있으나 청와대는 아직도 굳게 닫혀 있고 대통령은 여전히 국민에겐 ‘이방인’이다.

 청와대의 폐쇄성은 청와대 출입기자가 출입금을 받기 전에 서명하는 서약서 내용을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본인은 청와대 출입과정에서 지득한 대통령과 그 가족의 동정 및 경내 모든 기밀사항이 국가안전보장과 직결됨을 인식하고, 이를 누설하였을 시는 동기 여하를 막론하고 그 결과가 국가이익을 저해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청와대 보안규정을 철저히 준수한 것을 서약합니다.”

 14대 대통령 당선자는 당선일로부터 68일후면 대통령 취임선서를 한다. 그리고 신분상승뿐만 아니라 인사권과 정보를 독점한 최고 통치권자로 변신하게 된다. 새로 탄생한 대통령의 헌법상 권한은 현실과 역사를 책임지기 위한 통치권이며, 한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급변하는 시대에 부응하기 위한 ‘민주적’ 통치권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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