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교인 죽이면 한달에 6달러, 어린애 도 무차별 총살”
  • 부다페스트·김성진 통신원 ()
  • 승인 2006.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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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청소’ 가담, 강간 살인 일삼은 세르비아 병사의 고백

 

 

 올해 21살의 세르비아 출신 병사인 보리슬라브 헤라크. 그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역에 사는 크로아티아인과 회교인을 한사람도 남기지 않고 없애려는 세르비아 군대의 ‘인종청소’ 작전에 직접 참여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8차례의 아녀자 강간살인을 포함해 모두 29명의 회교인을 죽인 혐의로 체포되어 현재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뉴욕 타임스〉의 존 번스 기자는 최근 그를 만나 장장 7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갖고 ‘인종청소’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도했다. 다음은 그가 번스 기자에게 털어놓은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편집자〉

 초등학교만 나온 나는 지난 6월 세르비아 민병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사라예보의 한 섬유공장 앞에 노점을 차리고 생계를 꾸려나가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크로아티아인과 회교인이 세르비아인과 함께 모여 사는 보스니아의 포팔리치란 조그만 마을이었다. 6개월 전 이른바 ‘인종청소’가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웃끼리 사이좋게 지냈다. 그러던 지난 5월 하순 사라예보를 관통하는 밀자카 강의 건너편에 있는 세르비아 병사들에게 빵을 가져다주는 일을 시작하면서 내 운명은 바뀌었다.

 당시 세르비아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는 회교인이 세르비아에 위협적인 존재라는 방송이 계속 흘러나왔다. 나이든 병사들은 중세에 오토만 투르크 제국의 치하에서 세르비아인이 학대당했다는 민담을 즐겨 얘기하기도 했다. 4백40만 보스니아 인구 중 44%를 차지하는 회교인이 내년 4월까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회교공화국’으로 선포해 유고연방에서 탈퇴할 것이라는 세르비아 정치지도자들의 말을 듣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되면 앞으로 세르비아 어린이는 회교복장을 하고 다녀야 할 것이라는 얘기도 들렸다. 사람들은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모든 회교인을 보스니아로부터 몰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인종청소’를 하자는 얘기였다.

 내가 인종청소 작전에 참여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로선 구경하기도 힘든 텔레비전과 비디오, 외국 화폐 등 무엇이든 회교인으로부터 탈취해도 좋다는 민병대 지휘관들의 말에 솔깃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회교 여자를 건드려도 좋다는 말까지 나왔다.

 지난 6월 하순 어느날, 나와 두명의 동료는 회교인이 모여 사는 보스니아 서북부의 아하토비치 마을로 갔다. 한 회교인 집에 들어가자 지하실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보니 노파 두사람이 있었는데 그중 한 노파가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고 말했다. 내가 총 개머리판으로 노파의 머리를 쳐 떠밀고 옷장을 열어보니 5백 마르크의 외화, 순금으로 된 목걸이, 팔찌, 귀고리, 반지 등이 들어 있었다. 집안에는 모두 10명이 있었다. 그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들은 당시 보스니아 지역에 사는 회교인에 대한 학살 소식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들은 막상, 우리가 죽이려는 것을 알자 태연했다. 다만 회교병사인 오스만은 달랐다. 그는 “아내와 두 자녀가 있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열 번이나 애원했다. 나는 단 2초 만에 14cm 길이의 사냥칼로 그의 목을 베었다. 나는 65살 먹은 한 늙은 세르비아 병사로부터 목을 베는 기술을 배웠다. 6월 어느 날 그는 나와 다른 세명의 세르비아 병사를 어디론가 데려가더니 돼지 여러마리를 상대로 어떻게 목을 따 죽이는가를 보여주었다. 그는 자기가 사로잡은 보스니아 병사들을 그런 식으로 죽였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강간한 뒤에는 죽여라”

 우리는 나머지 사람을 집밖으로 끌어냈다. 나는 그들에게 무서워 말고 벽에 기대라고 명령했다. 10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애는 무서웠던지 할머니 뒤로 숨으려 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동료와 함께 30발이 장전된 총을 난사했다. 우리로부터 불과 10걸음 앞에 떨어져 있던 그들은 한순간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세르비아 민병대 지휘관들은 아하토비치 마을의 회교도인을 죽이는 대가로 한 달에 미화 6달러50센트(약 5천원)를 지불했다. 그들은 이 마을이 전략거점이기 때문에 마을의 누구 한사람도 살려서는 안되며 집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6월 초순 나는 들판을 지나가다가 세르비아 ‘특별수사대’란 단체가 1백20명 가량의 회교인을 학살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덤프트럭을 이용해 사라예보 근처의 한 철도 야적장으로 시체를 운반했다. 병사들은 야적장에 구덩이를 파 시체를 묻은 후 휘발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7월 어느날 보스니아 북부 보고스카시에서 서북쪽으로 3마일(약 5km) 떨어진 회교마을에서 나는 세르비아 병사들이 30명의 회교인을 학살해 그 시체를 근처의 제철소 용광로에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 용광로에 던져질 때 몇사람은 아직 살아 있었다.

 7월 초 나는 사라예보에서 자그레브로 가는 길목의 음식점을 겸한 여관에 들어갔다. 그 여관은 회교 여성만을 수용하는 교도소로 바뀌어져 있었는데 미로 부코비치라는 세르비아인 병사가 책임자였다. 부코비치는 회교 여성을 강간한 후에는 반드시 죽이도록 하는 일종의 규칙을 만들어놓았다. 그는 회교 여성을 강간하는 것이 병사의 사기를 올리는 데 아주 좋다고 말했다.

 나는 수많은 여자를 강간한 후 죽였다. 에미나, 사비나, 아멜라, 파티마…아직도 생생히 떠오르는 이름이다. 개중에는 10대도 있었고 많게는 35살 먹은 여자도 있었다. 부코비치는 내게 “여자들에 대한 처리는 알아서 해라. 일단 여관에서 끌고 나간 후엔 다시 데리고 오지 말라”고 말했다. 나는 30세 가량의 파티마라는 여인을 강간한 후 총으로 위협해 차에 태워 근처 야산으로 끌고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산으로 가는 도중에 총살해버렸다.

 나는 일주일에 서너번 꼴로 모텔에 갔다. 회교여성은 거의 매일 강간당하고 죽어갔지만 늘 넘칠 정도로 수가 많았다. 따라서 맘에 내키면 언제든 열쇠를 가지고 방안에 들어가 아무 여자나 닥치는 대로 고르면 그만이었다.

 내가 지난 6개월 동안 저지른 짓은 분명히 잘못한 일이다. 요즘도 밤이면 내가 죽인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라 식은땀이 흐른다. 잊으려고 애를 써보아도 자꾸만 떠오르는 오스만과 할머니 뒤로 숨던 빨간 옷을 입은 꼬마소녀의 모습은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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