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은 흔들려도 사람은 흔들리지 않았다
  • 고베·글 채명석 편집위원/사진 나명석 기자 ()
  • 승인 1995.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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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베 대지진 참사 현장/시민들 큰 혼란 없이 침착…정부 늑장 대응에도'두둔반 불평반'

고베. 신(神)이 강림하는 집(戶)으로 풀이되는 이 도시에 어떤 참극이 일어났는가.

 엄청난 땅울림이 효고 현 남부를 강타한 지 이틀 뒤인 19일, 인접 도시 니시노미야(西宮)에 들어서니 길은 이미 피난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배낭을 멘 사람, 지게를 진  사람, 머리를 붕대로 동여맨 사람….그들은 아무 표정이 없었다. 입을 열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24시간 편의점 '로손'에 들어서니 물건은 이미 동이 나 있었다. 거리의 자동판매기에도 모두 '우리키레(품절)'표시가 붙어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고베 시로 접근해 가자 길은 더욱 혼잡해졌다. 사이렌 소리가 요란해지고 소방차·구급차와 구호물자 수송차가 뒤엉켜 도로는 포화 상태였다. 그 사이로 오토바이와 자전거들이 곡예를 펼치고 있었다.

동네 모임인 '죠나이카이'가 구조 앞장

 1천2백여 희생자를 냈다는 히가시나다(東灘)구는 말 그대로 폐허였다. 철로에는 '문라이트 고치'라는 열차가 대파된 채 방치돼 있고, 빌딩과 가옥들은 폭격을 맞은 것처럼 무너져 내려 파편이 보도를 뒤엎었다.

 산쪽을 보니 아직도 불기둥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무서운 것은 지진·천둥·화재·아버지'란 일본 속담처럼 지진 뒤에 발생한 화재가 피해를 더 크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2층이 주저앉은 미가케 빌딩 앞을 지나다 '여기에 6명이 생매장되어 있음. 긴급히 구출해 주기 바람'이란 벽보를 발견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한 노인이 신문지를 깔아 놓고 앉아 있다. 7층에 사는 주민인데 한국인 교회로 피난을 가려는 길이라고 한다. 그 노인의 말에 따르면, 7층짜리 이 건물의 2층 부분이 지진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2층에 살고 있던 주민 6명이 깔려 있는데 아무리 연락해도 구조대가 와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체 발굴 현장에서도 똑같은 불평이 되풀이 된다. 1층 부분이 주저앉은 어느 담뱃가게 건물. 동네 사람 대여섯 명이 열심히 바닥을 파헤치고 있다. 얼마 되지 않아 한 노파의 시체를 끄집어 낸다. 즉사한 모양이다. 친척인 듯한 사람이 얼른 담요로 시체를 덮는다. 한 주민의 말로는, 아무리 연락해도 '바쁘다'며 구조대가 오지 않아 동네 사람들이 나섰다는 것이다.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는 그 주민의 넋두리처럼 이번 참극에서 큰 활약을 보인 것이 바로 동네 사람들의 모임인 '죠나이카이(町內會)'다. 한국의 반사회와 같은 조직인데 마을 축제등을 통해 평소부터 결속들 다져온 결과인 것 같다.

 시체를 끄집어 내놓고도 우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격진의 충격으로 울음까지 잃은 것일까. 5천여 희생자를 낸 도시 치고는 너무나 조용하다는 느낌이다. 한국 같았으면 '아이고 아이고 '하는 대성 통곡이 도시를 뒤덮었을 것이다.

 츄오(中央) 구를 관통하는 고속도로도 교각이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진도 8의 지진에도 끄덕 없도록 지었다는 최신식 도로다. 20년 전 일본도로 공단 총재가 '일본에 대지진이 일어나도 무사한건 고속도로뿐일 것이다'라고 으스댔다는 일이 생각났다. 그런 자만심은 1년 전 로스앤젤레스 지진 때와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최고조에 달했다. 일본에서는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들은 목소리를 한껏 높였었다. 그러나 일본인의 그런 안전신화는 단지 신화에 불과했다. 일본인이 자랑하던 도로·다리도 결국 직하형 지진에는 견딜 수 없음이 이번에 여지없이 드러난 것이다.

 고베 시 중심부 산노미야(三宮)는 진도가 6이라고 발표되었다가 뒤늦게 7로 판명된 지역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진도 6과7은 그 강도에서 30배 정도나 차이가 난다고 한다. 진도 7의 피해지 산노미야는 그래서인지 유독 고층 건물이 큰 해를 입었다. 고베 시청, 고베 신문사, 소고 백화점, 한큐 철도역….직하형 지진의 격진은 또 모든 건물의 층수를 바꿔 놓았다. 예를 들어 8층짜리 건물인 고베 시청은 6층 부분이 내려앉아 7층 건물로, 9층짜리 한큐 철도 역은 5층 부분이 내려앉아 8층 건물로.

 이 산노미야를 지나면 재일교포 만여 명이 밀집 거주하고 있는 나가다(長田)구가 나온다. 진도가 다른 지역보다 컸던 데다 뒤이어 일어난 화재로 구 전체가 초토로 변한 지역이다.

“한인 학생 이틀 지나도 구조 안돼”

 이곳에서 30년째 살고 있다는 재일교포 김성식(53)씨의 말에 의하면, 이곳 교포들의 생업은 주로 신발 가공업을 영세 공장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대부분 이번 지진 때문에 집뿐 아니라 공장까지 큰 해를 입었다. 지진 보험에 가입한 사람도 없어 복구 자금을 어떻게 염출해야 할지 모두 걱정이 태산이었다.

 다행이 이 지역 교포들에 대한 지원의 손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일본 전국의 민단 지부로부터 먹을 것 입을 것이 계속 답지하고 있고, 청년부를 중심을 지원부대가 파견돼 복구 작업을 돕고 있다.

 한국인 유학생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한 중국인 유학생의 말에 따르면, 자기가 사는 3층짜리 아파트의 1·2층 부문이 무너졌는데, 1층에는 한국인 유학생 부부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경찰과 소방서에 수 차례 이 사실을 알렸으나 바쁘다는 이유로 지진 발생 3일째에도 구조대가 얼씬 하지 않았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이번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의 90%는 사인이 압박사다. 또 절반이 60세 이상이다. 이같은 결과는 사망자가 거의 낡은 아파트나 주택에 살다 변을 당했음을 말해준다. 한국인 유학생들 역시 방세 때문에 값싼 아파트에 살다 큰 해를 입은 것 같다.

 프레스 룸이 설치된 고베 시 의회 건물로 들어서니 한 텔레비전 방송이, 고베 시민의 질서 정연한 행동을 외국 언론들이 크게 보도했다고 전하고 있었다. 분명 이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들어오는 다섯 시간동안 교통 체증을 제외하고는 큰 혼란을 겪지 못했다.

 피난민이 운집해 있는 한 중학교 교정. 자동차와 가설 텐트로 발디딜 틈이 없었으나 이곳에도 아귀다툼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물 한 컵을 받아 먹기 위해 공회당 앞에 몇 시간씩 줄을 서는 사람도 많았다. 또 화재 현장에 꼭 나타난다는 '가지바 도로보(화재 도둑)'도 이번에는 없었다. 그래서 일본의 한 작가는 '피난민'이 아니라 '피난한 시민'이라고 그들을 추켜세운다.

“피난민이 아니라 피난한 시민”

 이런 여유는 어디서 비롯한 것일까. 고베 시의회 건물에 피난해 있던 한 50대 여성에게 구호물자 도착이 너무 지연되고 있지 않느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고베에는 헬리콥터가 도착할 장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또 구호물자를 분류하고 있던 고베 시 직원은 자위대 출동이 너무 늦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자위대는 이런 사태에 대비해 훈련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모두 상대를 감싸는 답변이다. 앞서 말한 '죠나이카이'처럼 책임을 공유한다는 일본인들의 습관이 이번 재난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된 것이다. 실제로 자위대의 출동은 많이 지연되었다. 자위대가 재해지역에 본격 출동한 것은 17일 오후 2시. 고베 시 일대가 불바다가 되고 있는데도 효고 현이 출동 요청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방위청에는 “외국의 평화유지활동(PKO)에는 서둘러 나가면서 왜 고베는 왜면하고 있느냐”는 항의 전화가 빗발치듯 걸려 왔다고 한다. 그날 러시아의 한 텔레비전도 “자위대의 헬리콥터가 재해 지역에 한 대도 뜨지 않았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일이다”는 논평을 내보냈다고 한다.

 <쇼군>이란 소설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지진이 일어난 다음날 눈을 떠보니 마을이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복구되어 있었다.' 일본인들이 근면한 것은 지진과 태풍이 많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있다.

 기자는 고베 시 복구 작업이 본격 시작된 20일 저녁 배로 포트 아일랜드를 벗어났다. '천만달러 야경'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고베 시민들이 '피난민'이 아니라 '피난한 시민'으로서 긍지를 잃지 않기를 기대하면서. 또 그들의 재앙이 이번 한번으로 끝나기를 기원하면서 고베 부두를 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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