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정 살인'둘러싼 파워 게임
  • 이세용(영화 평론가) ()
  • 승인 1995.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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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작 <영원한 제국>영화평/2백년 전'보혁 대립'왕과 신하의 하루 싸움으로 표현

 
임금(정조)이 퍼즐 문제를 내놓고 낱말 하나를 던진다.'금등지사'.임금의 할아버지인 영조의 비밀 문서가 보관돼 있다는 이 금등 속에는 도대체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가. 아니, 금등이 있기는 있는가.

 영화는 정조 24년의 어느날(서기 1800년 1월16일)새벽, 왕실 문서가 보관된 규장각의 검서관인 장종오의 의문사에서 시작된다. 대궐의 긴 회랑을 지나고, 마당을 가로질러서 다시 회랑으로 접어드는 미로를 돌아가면 한 주검이 있고, 이 주검을 둘러싼 의혹은 시시각각 숨가쁘게 증폭된다. 내시 이경출이 죽고, 천주학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던 선비 채이숙이 죽고, 채이숙의 임종을 지킨 규장각 이속 현승헌이 죽는다.

 대궐에서 하루에 4명이 잇달아 의문의 죽음을 맞으면서, 영화는 우발적인 듯이 보이는 사건이 실제로는 임금이 내놓은 퀴즈 때문에 서로 얽혀 있음을 드러낸다. 왕은 당대의 실세이던 노론을 제압하기 위해 교묘한 함정을 파놓았는데, 내막을 모르는 세력들이 궁중 살인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사건의 전모가 규장각 대교 이인몽(조재현)의 회상으로 전개되는 <영원한 제국>은, 당대 지배 계급의 각기 다른 이데올로기가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과는 달리 사적인 욕망과 소원 성취에서 비롯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따라서 박종원 감독은 어느 쪽도 일방적으로 편들지 않는다. 이런 객관적인 시각은 노론과 소론의 균형 있는 묘사뿐만 아니라 고정된 카메라 위치에서도 느껴진다. 마치 눈을 깜박거리지 않고 어떤 사건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듯한 카메라는 대칭적인 구도를 잡으면서 화면에 무게를 얹는다.

 대칭이 우리 신체 구조에서 비롯되는 타고난 균형 감각에 기초를 둔 보편적인 관념이라면, 이를 구체화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한식 건축물 구조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이 작품의 화면은 매우 괄목할 만하다. 체제공 집에 모인 노론과 소론을 한 프레임으로 잡은 장면이 좋은 예인데, 이 쇼트는 화면 구도에 의해 인물들의 대립과 드라마의 성격을 나타낸다.

 화면 중앙에 기둥이 있고, 왼쪽에 진보파의 거두인 채제공이, 오른쪽에는 보수파 우두머리인 심환지가 대칭을 이루며 앉아있다. 바로 이 장면에서, 가운데 있는 기둥이 왕의 입장처럼 느껴지는 순간 <영원한 제국>은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의 정치권으로 이어진다. 2백년 전에 안고 있던 좌우 대립 혹은 보수(노론)와 개혁(남인), 또는 여당(노론)과 야당(남인)이 버티는 막무가내의 대결을 통해 감독은 역사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다는 냉철한 인식을 드러낸다.

 박종원 감독은 전작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군중과 권력의 관계를 파헤쳤는데 이 작품 역시 '군중과 권력'의 관계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교실을 무대로 하여 2년 간에 걸친 권력의 행사와 힘에 길들여진 아이들을 그려낸다면, <영원한 제국>은 왕실을 무대로 삼아 군중(신하들)을 길들이려는 권력(왕)의 이야기를 '하루'로 압축한다. 물론 이 영화의 군중은 <우리들의…>와 달리 권력(왕)을 길들이려는 힘을 가진 자들이지만, 두 작품은 군중과 권력의 관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짝을 이룬다.

 의상과 고증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완성도를 높인 이 작품은, 임금 역의 안성기와 심환지 역의 최종원, 정약용 역의 김명곤이 돋보이는데 비해, 하급관리로 나오는 배우들의 명료하지 못한 대사가 귀에 거슬린다. 보는 즐거움만큼의 듣는 즐거움이 아쉬운 영화 <영원한 제국>은, 즐기면서 이해할 수 있는 후반부에 비해 이해함으로써 즐겨야 하는 전반부의 복잡한 구성이 불만이지만, 근래 보기 드물게 품격있는 작품이다.

李世龍(영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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