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 간성의 요람 ‘갇힌 땅’에서 ‘평화의 땅’으로
  • 광주· 김경호 주재기자 ()
  • 승인 1995.02.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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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상무대 ‘영광· 애환· 상처’의 43년사

‘갇힌 땅에서 평화의 땅으로…’. 지난 43년동안 육군 장교 교육의 요람이던 상무대(尙武臺)가 광주를 떠나 전남 장성군으로 이전한 뒤 열린 ‘상무 신도심 개발’ 기공식장에서 趙洪奎 민주당 의원이 축사를 하면서 던진 이 한마디에는 매우 함축된 의미가 담겨 있다.

상무대는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52년 초, 육군 ‘교육총감부’란 이름으로 광주광역시 서구 지정동 일대  67만평 터에 뿌리를 내렸다. 그동안 약 80만명에 이르는 장교를 배출함으로써 한국 육군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굵은 획을 남겼고,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 사이에서는 제2의 고향으로 회자되는 곳이다.

상무대에서 소위로 임관한 뒤 줄곧 이곳에서 근무한 이○○ 중령은 “우리 장교들이 군 생활을 마친 후에도 꼭 한번 와보고 싶어하는 도시가 광주이다. 상무대에서 교육받던 추억을 절대 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대다수 육군 장교에게 상무대는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상무대는 육군 초급 장교들이 자아 형성의 틀을 갖추는 공간이었다”라고 말했다.

일제 시대부터 군사보호 지역이었던 상무대 터는 군대와 오랜 인연을 맺어온 곳이다. 1910년대에는 일본 해군항공대 훈련비행대가 주둔했고, 53년 무렵에는 반공 포로수용소가 되기도 했다. 54년에는 ‘교육총본부’로, 60년에는 전투병과 ‘교육사령부’로 개편되면서 상무대는 광주를 상징하는 부대로 자리잡았다.

역대 상무대 지휘관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이 부대의 위상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건군의 주역이었던 초대 이형근 장군을 비롯해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장도영· 김종오· 최영희 장군, 청렴한 군인으로 일생을 보낸 한 신 장군, 정진권 전 합참의장, 장기오 전 총무처장관 등 한국 육군의 빛나는 인물들이 상무대와 인연을 맺은 것이다.

 

전두환씨와의 ‘악연’

특히 全斗煥 전 대통령의 경우는 이 부대 지휘관으로 근무하지는 않았지만, 상무대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다. 초창기 교육생으로서 열악한 환경을 감수해야 했던 전씨는 54년 무렵 보병학교 학생연대 구대장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80년 ‘광주 5· 18’ 당시에는 이곳을 거점으로 민주 항쟁을 무력 진압한 군부 세력의 주역으로 다시 광주와 ‘악연’을 맺었다. 전씨는, 숱한 광주 시민의 희생을 딛고 정권을 장악한 뒤 84년 3월 상무대 부지 매각 및 부대 이전을 지시함으로써 상무대와 실타래처럼 얽힌 인연을 정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상무대는 이런 역사적 상흔과 함께 숱한 애환을 광주에 남겼다. 70년대 초반,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국방을 외치며 대대적인 군사력 강화를 시도하기 전까지, 상무대 군인들은 부대 안팎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운 환경을 감내해야 했다. 대단위 군인 아파트가 없던 시절, 상근 근무자나 교육생 대부분은 부대 근처에 있는 하숙집이나 셋방에서 출퇴근하며 외롭고 고달픈 군인의 길을 걸어야 했다. 신혼의 초급 장교들은 객지 생활속에서 어린 아이들을 키우며 간성의 꿈을 실현해 나갔다.

 

상무대 장교는 일등 사윗감

그러나 어려웠던 시절이나 좋은 시절에나 상무대 인근에는 미담가화(美談佳話)가 끊이지 않았다. 광주 시민들은 남도 사람 특유의 인정으로 객지 생활을 하는 군인들에게 광주의 이미지를 깊게 심어주었고, 광주 여인네의 손끝으로 빚어진 음식맛은 다른 지역 출신 군인들의 입맛을 ‘한 차원’ 높여 주기도 했다.

이곳을 거쳐간 장교 중에서 훗날 별을 달고 옛 추억을 더듬어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수없이 많다. 중위 때 광주에서 결혼했고 상무대 지휘관을 역임한 전영진 장군은 신방을 꾸렸던 옛집을 사흘 동안이나 부인과 함께 찾아 헤맸다고 한다.

부대 입구에서 10여 년간 스잔다방을 운영해 온 이종근씨는 “동생같은 교육생들이 교육을 마치고 떠난 뒤에도 업무를 보러 광주에 왔다가 ‘형님’ 하며 나타날 대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곳을 떠난 후 결혼하는 장교들이 청첩장을 보내오면 강릉같이 먼 곳까지도 찾아가 축하해 주었다”라고 군인들과 맺은 끈끈한 의리를 자랑스럽게 말했다.

상무대를 거쳐간 장교들 중에는 ‘남도 아가씨’들과 사랑을 엮은 사람도, 광주· 전남 지역에 처가를 둔 사람도 많다. 잘 알려진 대로 김복동 의원은 화순에 처가가 있고, 예편한 이준원 장군은 광주 중앙극장 소유주의 사위다.

총각 장교들이 상무대에 와서 3~4개월씩 교육 받으면서 주말과 휴일을 이용해 외로움을 달래려는 마음으로 미팅을 하고, 거기서 만난 여성과 연인이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80년 이후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상무대 장교들은 초창기부터 광주 시민들 사이에서 사윗감으로 선망의 대상이었던 만큼 결혼 성공률은 매우 높았다. 주말이나 휴일에 스잔다방을 비롯해 상무대 인근 다방이나 시내 커피숍에서 초급 장교들이 서너 명씩 어울려 미팅하는 모습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무대와 광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풍속도 가운데 하나였다.

 

상무대 비상 땐 광주 경제도 비상

거의 반세기 동안 상무대는 광주시민들에게 ‘계륵’과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상무대 일대가 군사보호지역으로 묶여 개발이 제한됨으로써 광주시의 팽창에 걸림돌이 된 것이다. 상무대 주변에는 5층 이상 건축물이 들어설 수 없었기 때문에, 광주-송정리 축의 발전은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80년대 후반에 규제가 완화됐지만, 상무대 일대는 오랜 세월 ‘광주의 섬’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거의 군(郡) 단위 인구와 비슷한 상무대 군인과 그 가족들의 호주머니에서 풀린 돈이 광주 경제에 미친 영향은 과소평가할 수 없다. ‘김신조 일당 청와대 습격’ 당시, 상무대에서 40여 일 동안 비상이 걸리면서 군인들의 외출· 외박이 금지되자 당시 전라남도와 광주시 고위 인사들이 상무대 지휘관들에게 통사정했다는 일화는, 그 무렵 광주 경제와 상무대와의 함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중의 하나이다.

20년 넘게 상무대 입구에서 나주 문우사를 운영해온 김영주씨는 “이곳에 터를 잡고 군인들을 상대로 점포를 운영한 사람 중에는 돈을 번 사람도 적지 않다. 상무대가 광주 경제의 젖줄이던 시대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옛날에는 부대에 비상이 걸리면 가게도 비상이었다. 상무대 인근 점포들이 군인들만 상대하다 보니, 군인들이 나오지 않으면 장사에 비상이 걸리는 것은 당연했다”라고 경험담을 들려 주었다.

이제 상무대는 ‘광주 신도심’으로 환골탈태하게 된다. 2000년대 광주의 새로운 도심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이다. 광주 시청을 비롯한 공공 시설과 대규모 상가, 주택단지가 들어서게 될 상무 신도심은 서남해 시대· 태평양 시대를 준비하는 광주 시민들과 전라남도도민들에게 희망의 공간이 될 전망이다.

특히 5· 18 항쟁 당사자인 광주시민들을 위해 마련되는 ‘기념공원’은, 상무대 자체 병력과는 상관 없었지만 어쨋든 이곳을 교두보 삼아 펼쳐졌던, 군부 세력의 ‘광주 살상’의 상처를 다소나마 꿰매 주는 구실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시민들이 끌려가 수용됐던 영창과 군사 법정 등 일부 건축물을 보존 건물로 지정한 것도 5· 18과 관련한 상무대의 역사적 의미를 승화시키려는 광주 시민들의 바람을 수용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즉, 망월동· 전남도청· 상무대 터를 유기적으로 연결해 ‘5월 정신’의 상징으로 삼아야 한다는 여론을 반영한 것이다.

다가오는 2000년대, 세계적으로 유명한 계획 도시들을 능가하는 아름답고 쾌적한 도심으로 모습을 드러낼 상무 신도심은, 광주 시민과 전남 도민이 과거의 아픔을 딛고 세계 속에 광주를 심는 전진 기지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 광주· 김경호 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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