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가격 올려야 한다
  • 정우진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 ()
  • 승인 1995.02.1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금은 한강 다리의 안전점검을 위해 서울시가 2월부터 5월까지 한시적으로 승용차 10부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에너지 절약을 위한 10부제는 그전부터 있었다. 어쩌다 10부제 해당일에 공공 기관에 차를 타고 들어가려다 제지 당해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렇게 곤란을 겪은 사람들조차도 석유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에너지 절약을 실천하지 않은 데 대한 죄의식 때문에 10부제라는 불편한 시책에 불평하지 않았다.

정부는 10부제를 통해 에너지 절약에 대해 지속적으로 홍보하여 국민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면서도, 정작 에너지 가격에 대해서는 저가 정책을 취함으로써 에너지 낭비를 부추기고 있다. 전기 요금을 예로 들어 보자. 82년부터 93년까지 물가는 84% 올랐는데 전기 요금은 21% 내렸다. 물가를 자극하지 않고 국내 산업체들의 경쟁력을 높이려고 전기 요금 인상을 억제해 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정이나 산업체에서 전기 요금은 얼마나 큰 부담이 될까. 93년에 한국 제조업체의 생산 원가 중 전력 비용은 1.8%에 불과했다. 도시 가구가 전기 요금으로 지출한 금액은 전체 가계지출비의 1.4%에 지나지 않았다. 콜라나 사이다 같은 음료수에 지출되는 가계비(1%)와 큰 차이가 없다. 이같은 상황이라면 전기 요금이 물가나 국제 경쟁력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한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에너지 소비 증가율 세계 최고

국내 에너지 가격도 다른 나라에 비해서 낮다. 휘발유의 국내 가격을 100이라 할 때 일본은 168, 프랑스는 128, 독일은 116 수준이다(93년 기준). 전기 요금도 국내 가격을 100으로 볼 때 일본은 281, 프랑스 136, 영국 110 수준이다. 한국의 에너지 가격은 미국을 제외한 주요 선진국보다 싼 편에 속한다. 높은 에너지 수입 의존도(95%)와 산유국과의 긴 수송 거리 등을 고려한다면 국내 가격이 외국에 비해 비싸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소비자들은 에너지 저가정책의 혜택을 톡톡히 받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낮은 에너지 가격 체제에서는 사명감을 갖지 않는 한 에너지 절약을 위해 자발적으로 불편을 감수하기 어렵다.

정부는 한 해 1천4백억원이 넘는 재원을 에너지 절약을 위해 투입했고 매년 11월을 ‘에너지 절약의 달’로 정해 대대적인 사업도 벌이고 있다. 93년부터는 가전제품이나 승용차에 에너지 효율등급 표시제를 도입해 소비자들이 에너지 효율이 높은 상품을 고르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에너지 가격을 낮게 묶어두는 한 이러한 정책들이 실효를 거두기는 어렵다. 실제로 가전제품을 고를 때 에너지 효율을 고려하는 소비자는 드물며, 아예 에너지 효율등급제라는 것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많다.

정부의 에너지 소비 억제책에도 불구하고 지난 4년 동안 한국의 석유 소비는 해마다 20% 이상 늘어나 소비증가율 세계 최고라는 ‘명예’를 얻었으며, 전력 소비도 10년 후에는 현재의 발전소 규모만큼 새로운 발전소를 더 건설해야 할 정도로 급증하고 있다.

 

환경 비용 고려해 에너지 가격 매겨야

값을 올려서 에너지 소비를 억제하고 절약을 유도해야 한다는 데는 많은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국제 원유 가격은 86년 이후 배럴당 25~28달러 수준에서 지금은 16~18달러로 계속 하향 안정세를 보여왔고, 석탄 · 가스 등 석유 이외의 에너지 가격들도 과거에 비해 내렸다. 따라서 국제 에너지 가격이 이렇게 싼데 에너지 절약이라는 명분으로 굳이 국내 에너지 가격을 올릴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반론이 나올 법하다. 그러나 환경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면서 에너지를 구입하는 비용보다 에너지를 사용할 때 발생하는 환경 오염과 환경 파괴를 막는 비용이 점차 커지고 있다. 그러므로 에너지 가격을 결정할 때는 국제 에너지 시세 이외에도 환경 비용을 중요한 요인으로 고려해야 한다.

환경 문제 부각과 환경 비용 상승은 에너지 문제를 공급 측면에서 소비 측면으로 전환시키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90년대 에너지 정책의 초점은, 에너지 소비로 인하여 날로 심각해지는 환경 문제와 이에 대한 국제적인 제약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맞추어져 있다.

에너지를 소비함으로써 배출되는 이산화탄소 등 이른바 온실가스(green house gas)는 지구 온난화 현상을 일으켜 환경을 파괴한다. 지구 온난화는 에너지를 소비하는 곳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를 타고 국경을 넘나들기 때문에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닌 범지구적인 현상으로 파급된다. 그래서 선진국들은 높은 환경 비용을 부담하여 생산한 상품과 그렇지 않은 상품이 아무런 차별 없이 교역되는 것은 형평에 어긋난다며, 환경에 투입된 비용 차이를 관세로 흡수하기 위해 환경 상계관세 제도를 만들자고 주장하고 있다.

92년 브라질 리우데자이네루에서는 한국을 포함해 세계 1백50여 나라 대표들이 모여 2000년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90년 수준으로 동결하는 기후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을 준수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소비량을 90년 수준으로 감소시키든가 아니면 이산화탄소 배출을 억제하는 기술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현 시점에서 기술 발전에 의한 온실가스 배출 억제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판명되고 있어, 유일한 해결책은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길밖에 없다.

 

낮은 에너지 가격은 국제 경쟁력 약화 초래

그러나 경제 성장과 에너지 소비는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에 에너지 소비 감축은 곧 경제 퇴보를 의미한다. 아직은 각 나라의 이해가 엇갈려 이행 계획과 협약 위반시 규제책이 구체화하지는 못했지만 올 3월로 예정된 베를린 총회에서는 환경 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제약이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환경 문제와 결부된 에너지 정책은 10부제와 같은 획일적이고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어렵다. 환경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에너지 소비 증가를 억제하면서도 경제 성장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효율을 향상시켜야 한다.

같은 양의 에너지로 더 많은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에너지 효율 향상이다. 에너지 효율이 향상되면 경제 성장을 그대로 지속시키면서도 에너지 소비를 낮추고 공해를 줄여 쾌적한 생활 환경을 확보할 수 있다. 또 에너지 비용이나 환경 치유 비용도 절감시키며, 다음 세대에 더 많은 자원을 물려줄 수도 있다. 그러나 에너지 효율 향상은 기술력의 향상 없이는 이루지 못하며, 기술 향상은 이에 대한 투자 없이는 실현할 수 없다.

지금과 같이 낮은 에너지 가격 아래서는 에너지 효율 향상을 위한 투자를 기대하기 힘들다. 산업은행의 설비투자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제조업 설비투자액 중 에너지 절약 투자 비율은 에너지 가격이 한창 높았던 80년대 초 5%대에서 93년에는 1.8%로 낮아졌다. 기업들이 에너지 절약이나 효율 향상을 등한히 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 결과 에너지 효율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제조업에서 백만원의 부가가치 생산에 필요한 에너지는 85는 0.7t(석유 기준)에서 93년 0.9t으로 거의 30%나 늘어났다. 이것은 에너지 가격을 30% 하락시켜도 상품 생산에 투입하는 에너지 비용이 낮아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한국의 산업생산 구조가 저효율, 에너지 다소비 구조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에너지 가격이 안정되고 환경 규제가 초기 단계에 있는 지금 이러한 산업 구조의 맹점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국제 유가가 뛰고 국제적 환경 규제가 심해질 때 에너지 취약형 경제가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나 크다. 국제 경쟁력 강화를 노린 에너지 저가 정책이 오히려 국제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실책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다.

 

값 올리고 에너지 효율 높여야

에너지 저가 정책을 포기하는 것은 정부나 국민 모두에게 내키지 않는 일이다. 더구나 금년 물가를 5% 내로 안정시킬 것을 천명한 행정 당국으로서는 국제 유가도 안정된 지금 에너지 가격을 올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정부나 국민이 다 함께 인식해야 할 것은, 지금의 낮은 에너지 가격은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즉 에너지로 야기되는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물론이고 늘어나는 에너지 수요에 맞추어 확장해야 할 공급시설에 대한 투자비조차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가격이다. 가격 인상이라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미래를 대비하는 것과, 미래가 불안한 가운데 현재의 낮은 에너지 가격을 향유하는 것 중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에너지 가격 인상이 곧 에너지 비용 상승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값이 오르더라도 에너지 효율이 그보다 더 높아지면 비용은 낮아진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에너지 가격 정책은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반대로 가격이 내리더라도 에너지 효율이 나빠지면 에너지 비용은 더 올라갈 수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택한 에너지 저가 정책의 결과는 후자 쪽에서 방향을 잡고 있다.

정부는 가격 인상을 피하면서도 에너지 절약을 유도하기 위해 에너지 설비의 효율 기준과 절약 투자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대대적인 국민 홍보도 전개하고 있으나, 가격이 에너지 절약에 대한 투자 마인드를 자극하지 않는 한 실효성 있는 정책 수단으로 정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에너지 가격이 안정세를 보이고 국제적인 환경 규제가 아직은 구체적으로 시행되지 못하는 이 시기를 에너지 절약에 투자할 적기로 활용해, 에너지 효율 기술 개발에 적극 투자함으로써 다가올 환경 압력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 국제적 환경 규제가 높으면 높을수록 에너지 효율 기술 자체가 고부가가치 수출 상품이 된다. 한 해에 소비하는 에너지의 95%를 해외에서 수입해야 하는 처지에서 한국은 에너지 절약을 하나의 고부가가치 전략산업으로 육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은 에너지 저가 정책은 지양해야 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