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 ‘과학 선거’ 새 바람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5.0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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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선거법 따라 후보자 인식 변화 … 정치 광고도 컴퓨터 프로그램 제공 등 첨단 서비스 경쟁

달라진 선거 환경에 발맞춰 정치 광고업계가 변화를 꾀하고 있다.

 6월 27일 지방자치 4대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에게 온갖 정치 상품을 쏟아부어야 한다. 선거 전문가들은, 그 정치 상품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과정에서 약 1조원에 달하는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리라고 내다본다. 이번 4대 선거의 평균 경쟁률을 4대 1로 잡았을 때 나오는 계산이다. 출마 예상자는 2만명. 한사람이 5천원씩 쓰면 딱 1조원이다. 또한 선거라는 것이 막바지로 치달을수록 ‘예상외 지출’이 생기게 마련이고 평균 경쟁률도 유동적이어서, 실제로는 액수가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선거시장, 더 정확히 정치 광고 시장은 각 정당의 후보자 공천이 확정된 이후에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대략 3개월 동안 천문학적인 자금이 당선이라는 한 가지 목표를 향해 쏟아부어지는 것이다. 유권자 관리 컴퓨터 프로그램 업체, 앰프와 스피커 등 각종 음향기기 업체, 여론 조사 전문 기관, 각종 홍보물을 찍어내는 인쇄 업체, 후보자의 선거전략 수립에서부터 선거운동 관계 업무를 일절 대신해 주는 정치 광고 대행사에 이르기까지 벌써 지방자치 선거를 향해 뛰는 업계는 정작 당사자인 정치인보다 더 바쁘다.

 

후보자들, 상투적 광고전략에는 시큰둥

 정치 광고 시장에서 ‘살아남은’ 몇몇 선발업체를 제외한 대부분은, 오직 선거 특수를 노리고 뛰어든 축에 속한다. 선거 때만 되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가 선거가 끝나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철새 장사꾼이 유독 많은 것이 이 바닥의 특징이다. 이러한 철새 기질은 87년 대통령 선거와 88년 총선을 거치면서 생겨난 정치 광고업계의 고질이다. 이런 현상은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을 가진 일부 부유한 정치 지망생들이 부추긴 측면도 있다. 그들은 정치 광고인을 전문가가 아닌 인쇄업자나 카피라이터쯤으로 인식한다.

 영세한 업계와 수준 낮은 정치인들이 빚어낸 합작품, 이것이 오늘날 정치 광고업계의 현주소이다. 떼돈 벌어서 다른 사업을 해보자는 식으로 뛰어든 정치 광고업자라면, 그는 당선을 위해 봉사하는 자본주의의 노예에 불과하다. 이런 현실에서 정치 광고인들이 일종의 ‘선거 엔지니어’로 성장할 여지는 거의 없다. 그러나 이번 지방자치 선거에서는 조금씩 다른 면모가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 후보자들이 달라지고 있다.

 최근 업계에서는 정치 광고업계의 변화를 예고하는 한 가지 사례가 회자되고 있다. 이 바닥에서 전문가로 인정받는 한 중견 정치 광고 회사 사장 ㄱ씨가, 기초단체장 출마 희망자에게 ‘당한’일이 그것이다. 그는 국회의원급 고객을 숱하게 상대한 관록을 믿고 첫 상담에서 상대방에게 ‘기초단체장 수준에 맞는 미끼’를 던졌다. 출마 지역에서 여론 조사를 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가지 이미지를 개발해서 집중 홍보해야 한다는 상투적인 제안이 그것이었다. 중간 중간 성공 사례도 일부 곁들였다. 예전 같으면 솔깃해서 넘어오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상담을 마치고 돌아간 고객으로부터 나온 반응은 예상에서 완전히 빗나갔다. 그는 속이 후련한 상담이 아니라서 다른 업체와 계약했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 정도 정보는 이미 알고 있다는 투였다. 후보자들의 선거 경험이 부족하다고 얕잡아 볼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 선거는 지방자치 선거다. 벌써 구체화해 있는 지역구민의 요구를 누구보다 후보자 자신이 잘 알고 있다. ㄱ씨는 집에 틀어박혀 선거법 등 관계 서적을 독파한후, 다시 직업 전선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때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후보자들이 과학적인 선거에 목말라 있다는 점이다.

 업계에 따르면, 요즘 출마 희망자들은 정치 광고업자에게 과학적인 ‘토털 서비스’를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4대 선거에서 평균 경쟁율을 5대 1로 잡으면, 유권자 한 사람이 무려 후보자 20명치 홍보물을 받아보게 된다. 유권자 1명이 후보자 4명을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후보자는 자신을 알리는 과정에서 사실상 실질 경쟁률보다 4배나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유권자들에게 자신을 알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후보자 처지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알려야 한다. 자연히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현행 선거법에서 후보자가 마음껏 뿌릴 수 있는 유일한 인쇄물인 명함을 만들더라도 유권자의 눈이 번쩍 뜨이도록 기막힌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후보자들이 정치 광고업자들에게 ‘과학적인’ 분석과 서비스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후보자들의 이러한 변화를 부추기는 요인은 또 있다. 지난해 8월 2일 보궐선거에서 처음으로 시험 적용되었던 통합선거법이 이번 선거에서 전면 적용된다는 점이다. 통합선거법은 ‘돈은 묶고 입은 풀었다’는 점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제 옛날 방식으로 선거를 치르는 시대는 지났다. 여당의 돈 선거와 야당의 바람 선거는 통하지 않는다. 특히 선거법을 위반하면 당선 무효가 되는데, 선거법 지키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개인 연설을 무제한 허용한 반면, 선거 운동에 관한 제한이 엄격하고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유권자의 정서가 달라졌다. 특히 단체장의 경우는 정치인이라기보다는 행정가에 가깝다. 유권자는 ‘우리 동네’살림을 꾸려나갈 사람을 뽑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동안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유권자들이 정치력보다 행정 경험이나 전문 지식을 갖고 있는 후보자를 선호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더구나 지방자치 선거이기 때문에 지역구민의 요구는 매우 구체적이다. 더 이상 충격 요법은 먹혀들지 않는다. 정책과 공약 개발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커졌다.

 

선거 관련 컴퓨터 소프트웨어 홍수

 과학적인 선거운동에 대한 후보자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것은 선거 관련 컴퓨터 소프트웨어 상품이 이중에 범람하는 현상이다. 이 분야에서는 태종컴퓨터의 ‘위너’, 오름정보의 ‘오름선거참모’, 한승정보 시스템의 ‘마패 1.0’, 예일컴퓨터의 ‘위너스’, 한별정보의 ‘제갈공명 2.0’, 현대전자의 ‘당선확실’ 등이 최소 2백억 시장을 향해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다. 이쪽 업계에 따르면, 적어도 광역단체장 출마 희망자들만큼은 이미 자신에게 맞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갖춰 놓았다고 한다.

 광역단체장 출마 희망자 5명에게 프로그램을 팔았다는 한 업체 관계자는 “아직 정당 공천이 확실하지 않아서인지 문의 전화가 쇄도하고 있다. 그 때문에 전화 회선을 많이 늘려야 했다”고 말한다. 전화로 궁금한 것을 물어오는 사람은 대개 기초단체장이나 광역 의회 출마 희망자들이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새 선거법을 고스란히 반영해서, 후보자에게 회계 관리에서부터 일정, 지역구 민원 관리에 이르기까지 온갖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품도 나와 있다. 컴퓨터가 지시하는 대로 따르면, 선거법에 저촉될 리도 없고 효율적인 선거운동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대한 후보자들의 이러한 관심은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업계에서는 이를 선거운동이 점차 과학화하는 반증이라고 받아들인다.

 정치 광고업계 역시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려 애쓰고 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객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거래를 전제로 제공하던 선거운동 지침서 등 구체적인 정보를, 요즘에는 책자로 만들어 무료로 서비스한다. 기본적인 노하우는 그냥 건네주고, 대신 지역 분석에 더 파고든다는 전략이다. 바가지 씌우는 식으로 장사할 수 없다는 것을 이쪽 사람들도 깨닫고 있다.” 한 선거 상담자의 말이다. 유권자와 후보자가 변하는 쪽으로 쫓아가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 광고 전문화 전환점 될 듯

 그리고 이들이 선거 엔지니어로서 생존할 수 있는 조건도 과거에 비해 나아졌다. 우선 선거를 자주 치르게 됐다. 이번 지방자치 선거 이후에 내년 총선, 내후년 대선이 차례로 기다리고 있다. 정치 광고업자들이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환경이 마련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 광고업에 종사하는 정치 지망생이 정치인과 전근대적 계약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이쪽 업계도 이제는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근대적 계약 관계로 전환하고 있다.

 이들에게 이번 선거는 정치 광고 전문가로 자리잡을 수 있는 기회이다. 과학적인 선거운동이란 법이 정한 선거 비용을 적절하게 배분해서 최대의 효과를 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거의 과학화’는 어쩌면 통합선거법에 대한 적응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지 모른다. 새 선거법은 이미 지난해 8월 2일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그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무보수 자원봉사 요원 확보, 설득력 있는 정견과 정책 개발, 금품 제공보다 유권자가 필요로 하는 신상 정보 제공, 새로운 선거 기법 개발 등 어느 것 하나 후보자에게 전략적인 사고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없다. 더구나 선거 비용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러나 후보자가 여론조사를 하고, 광고 회사와 상담하고, 선거 전략을 수립하는데 드는 돈은 선거 비용에 포함되지 않는다. 새 선거법이 입은 풀고 돈은 묶었다고 하지만, 선거의 과학화쪽으로는 숨통을 터준 것이다. 후보자나 광고업자나 다같이 과학적인 선거 전략을 개발하는 데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吳民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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