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측 증인’의 애매한 증언
  • 부산· 소성민 기자 ()
  • 승인 1995.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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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강양 사건’재판에 이정빈 교수 ‘들것 출두’

부산 강주영양 유괴 살인 사건의 최종 심리가 전개된 부산고등법원 214호 재판정. 본법정은 103호이지만 검찰측 증인으로 출두한 이정빈 교수(서울대 법의학 교실)를 위해 잠시 자리를 옮겼다. 최근 척추 수술을 받아 거동조차 불편한 이교수가 들것에 실린 채 출두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사건에서 그의 증언이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그는 한시간 반에 걸쳐 거의 내내 누운 채 증언했다.

 이 날 심리는 황적준 교수(고려대 법의학 교실)가 변호인측 증인으로 나서서 국내 법의학계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는 두 사람이 벌일 공방전에 큰 관심이 모아져 있던 터였다. 이교수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오대양 사건의 시체 부검을 맡았던 법의학 권위자이고, 황교수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때 부검을 맡았었다.

 

“증거채택 여부는 재판부 결정사항”

 공방의 초점은 이교수가 2월4일 검찰에 통보했던 유전자 감식 결과가 유·무죄의 증거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모아졌다. 이교수는 범행에 사용됐다는 차량에서 수집한 머리카락 32개를 숨진 강양의 부검 때 채취한 머리카락과 비교한 결과 DNA염기 배열 순서가 일부(2백70개) 일치하는 것이 13개 나왔다고 감정 결과를 증언했다. 그러나 이교수는 최초에 통보한 2백70개의 염기 배열 중 15개에 대해서는 분석이 불가능하다는 뜻의 ‘N’으로 표시했다. 황적준 교수는 이처럼 분석이 되지 않은 배열 순서로는 증거 효력을 갖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원종성 피고인의 변호인 박근수 변호사는, 황교수의 이같은 증언에 힘입어 이교수의 보고서를 무책임한 것이라고 통박했다.

 반면 이교수는, 자신은 의뢰받은 분석 사항에 대해 보고할 만하다는 결론에 도달해 검찰에 알렸을 뿐 증거 채택 여부는 재판부가 결정할 일이라고 응수했다. 결국 재판부의 증거 채택 여부에 따라 어느 한쪽의 권위가 손상될 뿐 아니라 유·무죄도 결정되는 셈이다.

 이 사건은 지나해 9, 10월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지존파·온보현 사건이 터진 직후에 발생했다. 단돈 2백만원을 뜯어내려고 사촌 동생을 유괴 살인했다는 경찰의 발표는 온 국민을 또 한 차례 경악케 했다. 피의자들의 부친이 시의회 부의장과 기업체 간부를 지내고 있는 유복한 환경이어서 더욱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검찰이 제시한 공소 사실에 따른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피고인 이현숙(여·19) 원종성(23) 남해경(여·19) 옥영민(26) 등 4명은 94년 10월9일 오후 4시께 부산 남포동 ㅍ커피숍에서 이씨의 사촌동생인 강주영양(8)을 유괴하기로 공모했다. 다음날 오후 1시30분께 이씨가 데려온 강양을 원종성의 친구 김○○씨 소유의 프라이드 승용차에 태우고 가던 중, 강양의 손발을 묶고 입에 테이프를 붙여 뒷좌석 발판 위에 두고, 오후 4시께 강양의 어머니 김씨에게 원씨가 전화하여 돈 2백만원을 요구했다.

 그러고 난 뒤 남포동에 있는 한 커피숍에 모여 강양을 살해하기로 결의하고, 오후 5시10분부터 30분 사이에 부평동 2가 부산은행 부평동 지점 옆 골목에서 원씨가 강양을 목졸라 살해했다. 그 뒤 피고인 원종성·이현숙·남해경은 11일 오후 4시께 ㅍ커피숍에서 강주영의 시체를 처리할 것을 모의한 다음, 오후 4시께 이현숙의 집 옥상 물탱크 옆에 이를 은닉했다.

 이같은 검찰의 공소 사실은 당시 피의자 4명이 경찰과 검찰에서 모두 시인한 사실이다. 또 범행에 사용했다는 승용차나 노끈·테이프 등 관련 증거물까지 확보된 상태였다. 사건은 의심할 여지 없이 4명의 공범에 의한 유괴 살인으로 일단락 되는 듯했다.

 

재판 진행할수록 반전 거듭

 그러나 사건은 곧 반전되었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범행을 계속 시인하고 있는 강주영양의  이종사촌 언니 이씨를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들의 알리바이를 제시하는 증인들이 30명이나 나타났다. 피고인들이 검거되던 당시 이들의 알리바이를 댔으나 경찰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던 중 알리바이를 번복한 참고인들도, 진술을 번복한 이유가 경찰이 강압적인 수사 분위기를 조성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또 변호인측은 피고인들의 알리바이를 뒷받침해주는 전화 통화 기록을 10월 하순에 입수해 11월 21일 첫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언론에 공개했다. 경찰과 검찰에서 범행을 시인했던 피고인들 역시 경찰의 고문 수사 때문에 범행을 허위로 자백했다고 주장했다.

 피고인들이 고문 수사를 당한 것이 사실인지 여부를 가리기 위해 이 사건을 맡은 박태범 부장판사는 첫 심리 공판이 끝난 지 이틀 뒤인 11월23일 자신의 집무실에서 피고인들의 신체 검증을 실시했다. 박판사는 검증 결과 발견된 여러 상처가 고문의 흔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재판에 참고하겠다는 감평을 해 여운을 남겼다.

 이런 와중에 부산변호사협회 인권위원회(위원장 조성래)는 첫 공판이 끝난 뒤 고문 수사를 문제 삼아 진상 조사에 착수했다. 피고인들과 관련 참고인들의 진술을 토대로, 피고인들이 고문 수사를 당했으며 참고인들마저 강압적 수사를 받았다고 판단한 부산변협 인권위는, 12월26일 수사를 담당했던 부산 북부경찰서 형사 14명을 대검찰청에 독직 폭행 및 감금죄로 고발했다. 원종성·옥영민 등 피고인이 고문 당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는 증인들까지 나타나 이들의 진술에 대해 공증을 마친 뒤에 취한 조처였다. 1심 재판이 진행중인 상황에서 취해진 부산변협 인권위의 이러한 이례적 조처로 이사건은 다시 한번 전국적 관심사가 됐다.

 특히 변호인측은 공판 때마다 속속 새로운 증거나 증인을 내세우곤해 이 사건의 유·무죄 공방은 검찰측에 점점 불리해져 갔다. 그 중 주범으로 지목돼 1월24일 열린 9차 결심 공판에서 4명의 피고인 가운데 유일하게 검찰로부터 사형을 구형받은 원씨의 알리바이는 이 사건의 최대 쟁점이다. 그의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이 한 증언을 제외하고도 많은 물증이 제시됐다. 변호인측은, 원씨가 검찰이 주장하는 범행 모의일인 10월9일에 대구에서 애인과 함께 애인 조카 운동회에 참석했음을 입증하는 사진을 제시했다. 또 변호인측은 9일부터 12일까지 원씨가 범행 현장이나 범행 모의 현장에도 없었음을 밝히는 전화 통화 기록까지 제시했다.

 

사건의 ‘진실’은 우리 사회 도덕성

 검찰은 이에 대해 사진은 조작했을 가능성이 크고 통화 기록은 아예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원씨의 부친이 수산회사를 경영하는 소문난 재력가인 데다가 시의회 부의장을 맡고 있는 유력 인사여서, 영향력을 발휘해 전화국 직원들을 매수했다는 것이었다. 검찰 역시 탐문 수사 끝에 밝힌 조작 가능한 정황들을 증거로 제시했다.

 피고인 남해경씨의 알리바이도 쟁점이다. ○○여전 비서과에 재학중이던 남씨가 범행 당일 오후 2시부터 10분간 타자 시험에 응시했음을 증명하는 시험지가 남씨의 알리바이를 입증하는 변호인측 증거 자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찰은 이 시험지가 친구 이상희씨가 대리로 치른 것이라며, 남씨의 알리바이를 주장해온 친구 이씨를 지난 1월6일 학교업무방해 혐의로 기소했다. 남씨가 제출한 시험 답안지의 성명·학번 기재 방식이 시험감독관이 요구한 것과 다르고, 친구 이씨가 낸 답안지와 총타수 및 타자 형식이 똑같은 점 등을 들어 대리 시험이 분명하다는 것이 검찰의 주장이다.

 이러한 유·무죄 공방 속에서 지난 2월6일 드디어 선고 공판이 열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검찰은 경찰이 범행 차량 안에서 채취한 머리카락이 이정빈 교수의 유전자 감식 결과 숨진 강양과 이현숙씨의 것으로 밝혀졌다며 재판부에 재심리를 신청했고, 이는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변호인측도 이에 뒤질세라 지난 2월13일 열린 12차 공판에서 원종성 피고인이 검찰측이 주장하는 범행 모의일 오후에 대구에서 애인의 조카 운동회에 참석한 모습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증거로 제시했다.

 2월24일로 선거 공판이 예정된 이번 사건의 특징은, 선고 결과가 유죄이든 무죄이든 판결이 미칠 파장이 심각하리라는 것이다. 유죄일 경우 피고인들의 알리바이를 제시했던 수많은 증인들은 살해된 강양과 유족의 아픔을 뒤로 한 채 극단적인 집단이기주의를 표출했다는 비난과 함께 위증죄를 면하기 어렵게 된다. 무죄일 경우 고문 수사 혐의를 받고 있는 경찰에 대한 여론이 악화하고 공권력의 상징인 검찰과 경찰의 위상은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 자명하다. 이들 피고인이 유죄든 무죄든, 이번 재판 결과 드러나는 ‘진실’은 우리 사회의 도덕성에 다시 한번 큰 흠집을 낼 것이다.

부산·蘇成玟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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