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결과 따라 재계 판도 바뀐다”
  • 이흥환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2.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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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재벌, 사운 건 ‘정치게임’

통일국민당의 현대는 총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삼성 대우 럭키금성 선경 등은 ‘관망’ 또는 ‘암묵적인 여당지지’전략을 펼치고 있다.


 민자당 전국구 후보 54명의 이름이 발표되기 3일 전인 3월2일. 서울 롯데호텔에서는 劉 彰順 전경련 회장 주선으로 현대 삼성 대우 럭키금성 등 국내 4대 재벌 총수들이 은밀하게 회동해 관심을 집중시켰다. 당초에는 5대 그룹 회장이 모일 예정이었으나 盧泰愚 대통령의 사돈으로 재계에서 미묘한 위치에 놓인 선경그룹 崔鍾賢 회장이 빠지고 鄭世永 현대그룹 회장 具滋暻 럭키금성그룹 회장 姜晋求 삼성전자 회장 金埈成 (주)대우 회장이 참석했다.

 국내 굴지의 재벌 총수들이 모여 이번 총선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던 비슷한 시기, 청화대와 민자당 핵심부는 李明博 전 현대건설 회장(51) 李在明 전 대우기전 사장(44)을 끼워넣는 전국구 순번 조정작업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정치자금 지원액수 통일하자”
 2일의 재벌 총수 회동에 대해 崔昌洛 전경련 부회장은 “유창순 회장이 지난 1월 전경련 회장단 신년기자회견 때 재계가 공동으로 돈을 거둬 제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으며 이같은 입장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말해 재계 공동차원의 정치자금 제공은 없을 것임을 시사했다. 이날 모임에 참석했던 한 그룹의 관계자도 “노대통령이 ‘정치자금을 기업에 의존하지 않겠다’고 밝혔던 만큼 재계가 돈을 거둬 중앙선관위에 지정 또는 비지정기탁 등 어떤 방법으로든 선거자금을 제공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참석자들의 의견이 모아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4대 그룹의 이같은 입장정리에 따라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이번 총선에 전경련 차원의 정치자금 제공이 이루어지지 않게 됐다. 그러나 이날 모임의 결론은 공동 차원의 정치자금 제공만 하지 않겠다는 것일 뿐, 각 그룹이 개별적으로도 지원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이와 관련해 재계의 한 정통한 소식통은 “이날 모임은 공동으로 정치자금을 만들지 않겠다는 논의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각 그룹이 개별적으로 하고 있는 정치자금 지원액수를 통일하자는 데 주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또 “최근 총선을 앞두고 재벌들이 자금지원을 통한 줄대기가 너무 무질서하게 벌어지고 있어, 누구는 얼마를 줬는데 누구는 얼마밖에 주지 않는다는 불평이 나오는 등 지원액수의 차이에서 오는 부작용을 정리하는 문제가 시급한 것이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3 · 24총선은 올해 말에 있을 14대 대통령선거의 예비선거로 평가된다. 지난 13대 총선은 집권층의 성격을 규정하는 대통령선거후에 치러졌다. 그러나 이번 14대 총선은 정권교체기를 앞두고 치러진다는 점에서 정가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으며, 이번 총선의 결과는 불투명하기 짝이없는 향후 정세 판단의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하게 된다. 따라서 정치권 못지않게 정세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대기업들도 직 · 간접으로 선거전에 발을 들여놓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국민당의 총선 참여는 이미 현대그룹 차원의 총력전으로 인식되어 있고, 삼성 대우 럭키금성 선경 등은 국민당에 대한 시각차가 있긴 하지만 자의든 타의든 총선에 개입하거나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정 · 재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기업의 적극 참여로 선거 양상 변화
 재계 동향을 분석하는 재무부의 한 고위 관리는 “기업이 총선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여러 모로 선거판의 양상을 바꾸어놓았다”면서 이번 총선의 선거운동 양상에서부터 지난 13대와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국민당이 총선에 참여함으로써 선거운동이 ‘잠바’ 대 ‘양복’의 대결 구도를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 즉 여야를 막론하고 기존 선거운동원들은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 등 주로 잠바차림의 선거 ‘실전자’들이었으나, 국민당의 등장으로 양복을 차려입은 말쑥한 청년들이 ‘잠바’의 자리를 비집고 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민자 · 민주 양당의 중앙당 선거본부에는 “언변 좋고 말끔한 차림의 현대자동차 외판사원들이 전국의 표밭을 누빈다”는 ‘전황’이 접수되고 있다.

 현대그룹에 대한 정부의 금융제재 조처가 화젯거리였던 지난 2월 말 증권가에 떠돌아 다닌 루머 중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다. “소장파 그룹 총수들이 현대 입장에 동조하며 똘똘 뭉쳤다.” “현대그룹에서 현대증권 등의 기관투자가가 선경 · 동방유량 등 이른바 ‘6공주식’에 대한 보복조처를 취할 것이다.” 이러한 루머는 결국 루머로 끝나고 말았으나 총선과 국민당,국민당과 여타 재벌, 재벌과 총선의 미묘한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이었다. 증권가에 나도는 뜬소문은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강원도 지역을 지지기반으로 한 ‘현대당’을 견제하기 위해 정부가 강원도 연고 재벌인 ㄷ그룹을 동원해 맞바람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소문이 떠돈 것은 3월 초였다. ㄱ그룹 회장비서실에 근무하는 한 이사는 이런 종류의 루머는 “확인할 수도 확인해줄 수도 없는 억측”이라고 못박았다. 그러나 뜬소문과 사실의 차이가 명백하게 구분되기 힘든 정 · 재계의 속성상 귀를 솔깃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

 이 이사는 또 총선과 재벌의 함수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그룹은 창업주 때부터 철저하게 장사꾼 기질로 무장했다. 어떤 형태로든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금기시해왔다. 정보를 거래하거나 정치동향을 분석하는 것조차 꺼린다. 물론 5공 때처럼 정보가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땅 밑으로만 흐르던 시절에는 정보수집 및 분석팀을 운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기업에서 총선의 예상 의석 수를 점치는 것은 사실 무의미한 작업이다. 지난 13대 총선 때 누가 여소야대를 예측했는가. 전문 여론조사기관들도 헛다리를 짚는 마당에 아무리 정보망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기업이 단독으로 총선을 예측한다는 것은 무리다. 특히 대통령선거라면 몰라도 총선에서는 예측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불가능한 작업이다.”

 ㅎ그룹의 비서실에서 재계 동향과 정보를 담당하는 ㄱ씨는 “총수에게 정식으로 보고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요 그룹들이 국민당을 비롯해 각 당의 예상 의석 수를 점치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총선 전담팀을 만들어 가동하는 대기업은 1개 기업뿐인 것으로 안다”고 말한다.

‘양다리 걸치기 전략’ 수정 불가피
 후보자 등록 마감일인 3월10일 현재까지 현대그룹을 제외한 다른 재벌그룹이 선거에 직접 간여한다는 ‘물증’은 없다. 재계 동향에 밝은 한 야권 인사는 “법정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재벌들이 여권 성향의 특정후보에게 실탄(자금)을 지원하는 등 드러내놓고 움직이지는 않는다. 민자당은 이미 오래 전에  선거자금을 확보해놓은 상태이고 대통령선거 때와 달리 총선에서는 재벌들의 집단적인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는 법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계와 재계 안팎에서 진단되는 재벌과 총선의 함수관계는 예사롭게 보아넘길 수 없을 만큼 ‘깊은 사이’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국민당의 출현으로 정계 판세가 종잡을 수 없는 혼미 국면으로 접어들자 각 그룹은 적당한 선에서 민자 · 민주 양당에 양다리를 걸치면 되었던 당초 총선 관련 전략에 일대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번 총선에서 국민당이 어느 만큼 약진하느냐에 따라 재계에 몰아닥칠 회오리는 엄청날 수밖에 없다. 특히 현대라는 강적을 상대하고 있는 삼성 대우 럭키금성 선경 등은 겉으로야 드러내지 않지만 그야말로 사운을 건 총력전으로 이번 총선에 임하고 있는 셈이다.

 LNG선 건조 수주권의 향방을 가름하는 재계의 치열한 쟁탈전이 단적인 예로 지적될 수 있다. LNG선은 인도네시아로부터 수입하는 LNG 가스를 실어나르는 배를 말하는 것으로 배 1대당 가격이 무려 2억5천만달러(약2천억원)에 이르는 고부가가치 · 고도기술집약 선박이다. 지난해 현대중공업은 LNG선 1 · 2호를 수주하는 개가를 얼렸다. 올해는 3 · 4호선의 건조계약이 체결될 예정인데 현대중공업에 맞서 대우조선과 삼성중공업의 연합함대가 도전하고 나섰다.

 정부는 이 3개사의 공방전이 과열되자 연초에 LNG선의 운항선사와 건조업체 결정권을 가스공사에 넘겼다. 명분은 민간업계의 자율적인 판단에 맡긴다는 것이었지만, 업계에서는 이를 현대에 다시 넘기는 것을 꺼리는 정부가 부담스런 결정의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데 있다고 해석한다. 올 4월로 예정돼 있는 3 · 4호선 건조계약이 이번 총선결과에 따라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은 쉽게 짐작되는 일이다.

 총선을 시발로 앞으로 대통령선거에 이르기까지 싫든 좋든 정계의 톱니바퀴와 맞물려 돌아갈 수밖에 없는 재계 입장은 대략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현대처럼 가장 적극적인 방법으로 직접 정치에 뛰어드는 경우이다. 물론 현대에서는 국민당 창당이 鄭周永 대표의 개인적 차원이고 정대표는 이미 현대를 떠나지 않았느냐고 강변하지만 재계의 시각으로는 현대와 국민당을 한 묶음으로 보는 것이 사실이다.

10대 재벌 ‘親 · 反국민당’으로 양분
 둘째로 정당을 만들 수는 없지만 특정 정당에 긴밀한 끈을 잇대어 놓는 방법으로 ‘살길’을 찾는 입장이다. 대부분의 재벌들이 이 경우에 해당되는데 10대 재벌의 입장은 여기서 둘로 나뉜다. 즉 겉으로 나서서 국민당을 지원할 수는 없지만 심정적이나마 국민당에 우호적 입장을 취하는 그룹과, 아예 국민당을 적극 반대하는 세력으로 민자당과 같은 배를 타는 그룹이다.

 전자의 경우에 대해 국민당의 한 핵심당직자는 “이름만 들으면 다 알 만한 재벌 총수 한분이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팔 걷어붙이고 나서서 국민당을 돕고 싶다고 말하더라”면서 “중소기업은 말할 것도 없고 그룹 순위 10위권 밖의 재벌들은 거의 우리에 대해 우호적”이라고 말한다. 5대 그룹 중 한 회장은 국민당 정대표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현 정권을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특히 90년 12월 노대통령의 10대 재벌 초청 만찬에서 노대통령에게 직설적으로 “6공이 과거와 비교해 나아진 게 뭐 있느냐”고 6공의 실정을 노골적으로 비난해 술자리를 깬 것으로 알려졌다. 이 그룹은 결국 청와대와의 채널담당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야만 했다.

 삼성과 대우는 ‘不可近 不可遠’ 원칙에 충실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삼성그룹의 경우에는 60년대에 ‘한비사건’을 겪으면서 정치사건에 연루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왔으며, 정치권과는 별도로 홀로서기에 주력한다는 것이 그룹 관계자들의 공통된 입장이다.

 그러나 재계 일부에서는 삼성의 이러한 자가진단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최근 TK의 원로 대부로 알려진 申鉉碻 전 회장의 재기용설이 나오자 “삼성과 TK세력은 떼놓을 수 없는 관계이며 삼성은 결국 민자당쪽에 서 있는 게 아니냐” 하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삼성측에서는 “삼성이 TK의 '대변자‘ 역할을 한다는 분석은 삼성을 모르는 사람들의 얘기”라고 못박는다. 신현확 전회장을 삼성과 TK를 연결하는 매개자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자동차협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현대 및 쌍용의 견제에 밀려 계속 자동차사업에 뛰어들지 못하고 있는 삼성은 만약 국민당이 예상 밖의 세력을 얻을 경우 자동차사업 진출이 그만큼 어려워지게 된다. 올해 삼성의 최대 목표는 자동차 생산이다.

 국민당의 출현으로 다른 어느 재벌보다도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은 대우그룹이다. 대우가 느끼는 긴장도는 국민당이 출범하자 대우 내부에서 한때 “김우중 회장도 출마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을 정도이다. 대우의 이러한 긴장은 80년 초 당시 신군부가 경제구조 개편이라는 구실로 현대의 창원중공업을 거의 강제적으로 대우에게 넘겨준 점, 당초 정주영씨가 노력했던 금강산개발 등 북방사업의 주도권을 최근 대우가 거머쥔 것 등 현대쪽과 불편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이동통신 사업허가를 둘러싸고 삼성의 강력한 견제를 받고 있는 선경그룹은 6공과 같은 노선을 걸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선경의 최종현 회장은 전경련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덕에 내년 2월의 회장단 선거에서 차기 회장감으로 지목되고 있으며, 선경그룹은 6공을 거치면서 부상한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3공은 현대, 5공은 삼성, 6공은 대우”
 이번 총선과 관련해 재계가 택할 수 있는 제3의 선택도 상정해볼 수 있다. 이도 저도 다 싫으니 복잡한 정치 기류에 발목을 붙들리지 않겠다는 경우이다. 이같은 경향은 재계 총수들의 출국 행렬에서도 입증된다. 쌍용그룹 金錫元 회장이 지난 1월 돌연 5개월 동안의 미국 유학길에 나섰고, 한국화약그룹 金昇淵 회장은 지난해 12월 출국 이후 미국 그리스 등지를 방문하면서 아직 귀국하지 않고 있다. 한라그룹 鄭仁永 회장은 지난 2월 3주가량을 미국에서 보내고 최근 귀국했으나 선거가 본격화되는 이달 중순경 다시 동남아 출장길에 나설 예정이다. 일본과 한국을 약 한달 간격으로 오가는 롯데그룹 辛格浩 회장도 지난 1월 출국 이후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코오롱 그룹 李東澯 회장도 곧 출국할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선경그룹 崔鍾賢 회장과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도 곧 출국할 굿으로 알려져 관심을 끌고 있는데, 삼성 李健熙 회장은 1월17일 출국해 미국 로스앤젤레스 지역을 돌아봤으며 현재는 일본에 머무르고 있다. 이같은 재벌 총수들의 해외출장 러시 현상은 지난 87년 대통령선거, 88년 총선 때도 있었다.

 재벌 총수들이 선거 기간에 자리를 비우는 것은 수많은 정치인들로부터의 자금요청을 피하려는 데 주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0대 재벌 등 주요 재벌들은 여전히 총선과정의 줄대기를 통해 세력확장에 매달려야 한다.

 재계 일각에서는 정치권뿐만 아니라 재벌의 재편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선경이 자신의 매출 규모보다 덩치가 훨씬 큰 유공을 흡수하면서 재벌 서열 5위로 뛰어오른 시점이나 한국화약이 명성을 인수하면서 서열 9위로 올라선 시기가 정권교체기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 크다. 6공에 들어서면서 삼성은 서열 1위의 자리를 현대에 넘겨주었다. “3공은 현대, 5공은 삼성, 6공은 대우”라는 재계의 유행어가 있듯이 다음 정권에서 과연 어느 그룹이 재계의 주도권을 행사할지 3월24일 밤에 뚜껑이 열리는 투표함에서 그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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