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정적 뚫는 바리톤
  • 김현숙 차장대우 ()
  • 승인 1992.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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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필 주최 <전쟁 레퀴엠>에 초청된 김관동 교수



1962년 5월30일.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17년째 되는 해 영국 코벤트리시의 성미카엘대성당에서는 주목할 만한 연주회가 열렸다. 전쟁 당사국이었던 영국 소련 독일 세 나라의 음악가들이 모여 대전중 희생된 영혼을 위무하는 진혼곡을 연주한 것이다.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미카엘대성당 재건 헌당식을 겸한 이날 처음 연주된 곡이 바로 벤자민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이다.

종군을 거부한 죄로 기소된 후 무죄판결을 받은 브리튼이 골방에 틀어박힌 지 20년 만에 만든 대작 <전쟁 레퀴엠>은 레퀴엠의 전통적 양식을 파괴하고 현대음악이 나아갈 길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예술가의 정치·사회적 책임감을 표명한 귀중한 작품으로 기록된다.

“시인의 임무는 전쟁을 경고하는 일이다”로 시작하는 <전쟁 레퀴엠>은 영구의 반전시인으로서 1차세계대전이 끝나기 1주일 전에 산화한 청년 알프레드 오웬이 전쟁을 통렬히 고발한 대서사시에 브리튼이 이 곡을 붙인 것이다. 당시까지 레퀴엠에는 가톨릭 전례문을 쓰는 것이 엄격한 전통이었으나, 브리튼은 과감하게도 영시를 사용했다. 특히 소련의 일급 소프라노 헤더 하퍼, 독일의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를 염두에 둔 작품으로 두 번 다시 전쟁이 되풀이돼서는 안된다는 브리튼과 오웬의 기도를 명 연주가들이 감동적으로 초연했다.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은 내년 2월18일 일본 도쿄의 오처드홀에서 재현된다. 2차대전중 희생된 동양인을 진혼하는 무대가 한·중·일의 솔리스트로 구성된 도쿄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 의해 올려진다.

도쿄필의 ‘아시아 3개국 솔리스트 초청 <전쟁 레퀴엠> 연주회’를 기획한 다카오 하세는 한국의 바리톤 김관동 교수(연세대)를 초청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알다시피 <전쟁 레퀴엠>은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브리튼이 작곡했습니다. 처음 공연 당시 영국의 적국으로 대성당을 파괴한 독일, 또 소련 솔리스트 2명을 초청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우리는 브리튼을 추모하면서 전쟁에 의해 상처받은 한국과 중국의 솔리스트 2명을 초청합니다.”

일본의 신예 가주시 오노가 지휘하는 도쿄필의 연주에 초청된 솔리스트는 김관동씨 외에 일본의 테너 아키시 오카모토(明志 若本)와 중국의 소프라노 천수어(陳素娥).

아키시 오카모토는 독일의 뒤셀도르프오페라단에, 천수어는 북경의 중앙가극원과 이탈리아의 밀라노스카라오페라단에 각기 소속되어 있다.

김관동씨는 “자의로 참전한 독일·소련의 희생자와 식민지 상황에서 개죽음을 당한 한국·중국의 희생자가 같은 차원에서 진혼받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따져야 하겠지만, 음악인으로서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은 한번 도전할 만한 매력적인 곡이다. ‘묶은 사람이 푼다’는 일본의 결자해지의 의지가 어느 만큼 진심인지는 일본에 가서 파악하겠다”고 초청받은 소감을 밝힌다.

 

국내에서 아직 연주못한 대작

베를린음대와 빈국립음대를 졸업한 뒤 빈국립오페라단원으로 활약하면서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피가로 역 전문가로 각광을 받던 김관동씨는 지난 86년 귀국한 뒤, 훌륭한 바리톤이 아쉬운 한국 오페라계에 단비와도 같은 역할을 해왔다. 거구의 유럽 성악가들과 경쟁하느라 익힌 큰 스텝과 시선 처리법, 하이바리톤의 화려함이 그가 지닌 장점이다. 이탈리아적인 서정과 독일의 아카데믹한 악풍을 지닌 그는 <전쟁 레퀴엠>을 가리켜 ‘소름끼치는 작품’이라고 평한다.

“‘나는 네가 죽인 적이다. 친구여‘라는 대목이 나오는 후반에 가면 악기가 완전히 멈춘 무시무시한 정적이 감돕니다. 그걸 바리톤이 뚫고 들어가거든요.”

그가 맡아야 할 바리톤의 영역은 전시의 실제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는 듯 죽은 자의 절규가 집중되어야 하고 연주자에게는 고도의 기교를 요구한다. 국내에서 아직 연주된 일이 없음은 물론이다.

“브리튼이 영시를 가사로 쓰면서 바리톤에게 그 실험의 많은 부분을 위임한 것 같아요. 라틴어로 된 전통적 레퀴엠 기법의 연주는 소프라노와 어린이 합창, 관현악, 오르간에 맡긴 데 반해, 영시의 드라마틱한 부분은 대개 바리톤이 감당하도록 되어 있거든요. 피셔 디스카우가 부르기로 했으니까 마음놓고 쓴거지요. 화성이 너무나 복잡해서 한국에서는 반주를 맡아줄 피아니스트를 구하기 힘듭니다.”

옛 스승인 브라우어 교수(베를린국립음대)를 찾아가 방학 두달 동안 <전쟁 레퀴엠>의 레슨을 받겠다는 그는 “이 곡을 완전히 정복하면 내 음악의 영역도 한 단계 성숙할 것 같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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