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제, 영국에 불리”
  • 런던 · 한준엽 통신원 ()
  • 승인 2006.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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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왕실 여론 고조



황태자 부부 별거 후 왕위 승계자 싸고 논란도

  귀중한 문화재가 잿더미로 변하고 6천만 파운드의 재산 피해를 낸 윈저궁의 대화재 이후 나흘만인 11월24일,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은 자신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런던시 주최 오찬연설에서 올해를 “뒤돌아보기조차 두려울 정도로 지긋지긋한 해”라고 술회했다.

  올 상반기 앤 공주가 이혼판결 선고로 기나긴 별거생활을 청산한 데 이어, 둘째 왕자 앤드류?퍼기 부부가 파혼하고 지난 12월9일에는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너 부부마저 별거를 공식 선언함으로써 여왕의 심기는 불편하기만 하다.

  메이저 총리가 최근 하원 본회의에서 찰스?다이애너의 공식 별거선언을 담은 버킹검궁의 성명을 발표했을 때 왕정 지지파가 대부분인 보수당 의원들마저 왕위 계승 문제에 우려를 나타냈다.  그동안 왕정제도의 폐지를 주장해왔던 반왕정 공화주의자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군주제도를 폐지하자는 여론을 확산시키기 위해 더욱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난 몇개월 동안 일어난 일련의 스캔들과 결혼생활의 파탄으로 왕실내 2세들은 왕가의 자멸을 재촉하는 시한폭탄의 버튼을 직접 눌러대고 있다.  영국 국민은 바야흐로 군주제도의 종언을 목격하고 있다.  재위중인 현 여왕이 아마도 우리 군주제도하의 마지막 군주가 될 것이다.”  노동당의 데니스 스킨너 의원이 내뱉은 이 ‘무엄한’ 발언은 BBC 저녁 종합뉴스를 통해 여과없이 전해져 충격을 주었다.

  영국 언론은 이번 찰스?다이애너 별거 사건을, 윈저가가 지난 1936년 이혼녀 심프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서 왕위를 버린 에드워드 8세의 퇴위 이후 두번째로 맞는 위기로 표현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왕실과 군주제도의 존립 자체를 우려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에 몰린 것이다.

  메이저 총리는 스킨너 의원의 발언을 겨냥해 “두사람의 별거 사건으로 헌정상의 위기는 야기되지 않을 것이다.  별거 상태에서도 찰스 황태자는 적법하게 왕위를 계승할 것이다.  두사람이 이혼을 고려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다이애너비 역시 왕비가 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찰스 황태자의 왕위 계승을 강력히 시사했다.

54%만 “이혼해도 왕위 올라야”

  이같은 메이저 총리의 다짐은 언론뿐 아니라, 보수당과 왕정 지지자들이 지배하는 의회의 공감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공화주의자의 기수인 노동당의 토니 벤 의원은 12월14일 왕실 가족의 각종 특권을 제한 또는 박탈하고 영국 헌정제도를 개혁하자는 내용을 담은 ‘영국연방법안’을 하원에 제출해놓고 있어 내년 초에는 이법안에 대한 의회의 토론이 벌어 질 것으로 예상된다.

  반왕정 공화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과 때를 맞춰 군주제도에 무관심하던 국민의 여론이 크게 변화했다. <선데이 타임스>가 12월13일 발표한 모리 여론조사 결과는 군주제 폐지가 오히려 영국에 유리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는 국민이 과반수를 훨씬 넘어섰음을 보여주었다.  군주제 폐지가 영국에 오히려 불리하다는 왕정 지지자의 숫자는 지난 5월 49%였는데 이번에는 37%로 떨어졌다.  반면에 반왕정파를 지지하는 견해는 17%, 그리고 군주제 폐지가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은 42%로 나타났다.

  특히 찰스?다이애너의 별거 선언에도 불구하고 찰스 황태자가 예정대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견해는 60%, 만일 그가 이혼을 할 경우에도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데는 54%만이 지지를 보이고 있어 찰스에 대한 일반의 여론이 점차 나빠지고 있음을 드러냈다.  다이애너비에 대한 국민의 시각도 차츰 변하고 있다.  비록 그의 국민적 인기는 여왕의 19%보다 앞선 22%를 보였지만, 별거 상태에서 그가 찰스와 함께 왕비에 즉위할 수 있다는 견해는 37% 반대는 57%로 나타났다.

  그러나 눈앞의 위기를 의식한 보수당 정부와 왕실 관계자 및 영국 국교 고위관계자, 그리고 일부 헌법학자는 찰스 황태자의 별거가 왕위 계승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을 것임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영국 국교회의 존 하브굿 요크 대승정은 “실패한 결혼의 경우, 이혼보다는 차선책으로서 별거가 최상의 해결방안이다. 절대권력의 상징인 군주는 영국 국교의 수장이기 때문에 설령 이혼한 경우라도 왕위 계승은 이루어진다”라고 교회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헨리 8세가 첫째 왕비 캐더린과의 이혼을 반대한 로마 가톨릭 교황청의 입장에 반발해 창설한 교회가 바로 영국 국교회이다.

  그러나 영국의 언론과 국민은 가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실패한 가장이 어떻게 도덕율의 정점인 영국 국교의 수장이자 국가통합의 상징인 왕으로서 종교적 의식인 대관식에서 왕관을 물려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강한 의혹을 나타낸다.

“윌리엄 왕자에게 왕위 물려줄 계산”

  영국의 타블로이드판 신문들은 찰스 황태자가 자신에 대한 국민의 신뢰감이 줄어들고 있음을 의식해, 여왕이 앞으로 10~15년을 더 재위할 경우 왕위를 아들인 윌리엄 왕자에게 물려줄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다이애너비도 현재의 상황으로 미루어 왕위는 아들 윌리엄에게 넘겨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번 별거 선언도 미래의 왕이 될 윌리엄의 왕위 계승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자신의 권리와 특권 일체가 박탈될 수 있는 이혼 대신 택한 계산된 책략이라는 것이 찰스를 옹호하고 있는 왕실 측근들의 주장이다.

  왕실내 찰스 지지자들의 이같은 주장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찰스 황태자의 왕위 계승에 비판적인 일부 언론과 왕실 관계자들은 아들 윌리엄 왕자가 아버지 찰스보다 독립심과 자부심이 더 강한 것은 물론이고 찰스에게 부족한 이해심과 부드러운 성격까지 갖추고 있어, 엘리자베스 여왕이 앞으로 10~20년 더 재위할 경우 윌리엄에게 바로 왕위가 이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한다.

  이같은 시나리오는 찰스 황태자가 당초의 왕위 계승 서열에 따라 왕위를 물려받겠다는 의사를 분명히하고 있다는 그의 측근 소식통들의 반박성명으로 일단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그러나 앞으로 찰스와 다이애너의 화해가 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한 두 사람을 정점으로 한 왕실내 세력겨루기는 치열해질 조짐이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질지도 모를 분파대립을 우려해 영국의 보수주의 가치를 옹호해온 유력일간지 <더 타임스>는 12월16일자 사설에서 찰스 황태자의 왕위 계승이 적법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사설은 찰스와 40년의 나이 차가 있는 윌리엄 왕자가 10~20년 후에 아버지 찰스보다 왕의 임무와 권한 수행에 더 적합한 인물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깎아내리고, 찰스 황태자는 여왕처럼 사려깊고 양심적이며 강한 의무감의 소유자라고 치켜세웠다.  특히 군주가 선견지명의 통찰력을 지녀야 할 필요는 없지만 찰스 황태자는 이미 내각과 외교 부처의 공적 서류를 지난 15년 동안 접해본 적이 있어 국가의 수장에게 필요한 귀중한 경험을 터득했다고 이 사설은 주장했다.

  어린 두 아들의 교육과 장래를 우려하고 있는 찰스와 다이애너비가 당장 이혼할 가능성은 없다는 견해도 있다.  의회내 보수주의자들과 왕정 옹호론자들은 앤 공주가 이혼의 전단계로서 별거를 택한 전례로 보아 상당한 시간이 흐르면서 두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이혼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인디펜던트 매거진》의 편집장이며 왕실 문제 전문가인 알렉산더 챈슬러씨는 경악스런 한해를 보내는 여왕에게 다음과 같은 충언을 보내고 있다.  “여왕은 폐하로서의 직무에 충실하고 희생적이긴 하지만 앞으로 닥쳐올 위기와 문제에 좀더 기민하게,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을 경우 가장 오랫동안 영국인의 존경의 대상이 돼왔던 제도를 무너뜨리는 각종 재앙을 스스로 불러들인 군주로서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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