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글래드스톤이 있다면
  • 박권상 (편집 고문) ()
  • 승인 1992.03.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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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선거부정 방지법을 만든 것은 여당이었다. 우리도 불이익을 감수하는 정부여당의 ‘용기’를 바란다.

 선거에 부패타락이 전무한 표본이라고 하면 물론 영국을 든다. 후보자 한사람당 8백만원 정도가 선거비용 상한선이고, 그 이상 쓰는 사람도 없고 쓸 수도 없다. 만일 이 법을 어기면 형무소에 갈 뿐 아니라 영구히 피선거권을 빼앗긴다. 정치적 사형선고다. 그러나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부정타락의 정도는 오늘의 우리나라를 뺨칠 정도로 심했다. 19세기초, 제한선거 시절 이야기지만 국회의원 한자리 사는 데 당시 돈으로 5천~8천 파운드, 지금의 우리 돈가치로 6억원 정도였다. 1868년의 노스햄턴 선거구에서 돈많은 호족들이 후원하는 세사람이 저마다 15만파운드씩 퍼부었다. 지금 우리돈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3백억원이나 된다. 날마다 선거민이 술독에 빠졌다는 기록이 있고, 돈을 대던 호족은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당당하게 공명선거를 치러 선거에 이긴 개혁주의 후보자도 있었다. ≪자유론≫으로 유명한 철학자요 문필가인 존 스튜어트 밀은 하원의원을 선거구 대표의 개념에서 국민 대표 개념으로 발전시켰고 돈 안쓰는 선거제도에 크게 기여한 이론가였으며, 그 스스로 이론을 실천에 옮긴 정말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1865년 웨스트민스터 선거구에 출마하면서 ‘조건’을 붙였다. 즉 그의 정치이론과 원칙을 고수한다고. 그는 돌아다니면서 표를 구걸한다든가 선거운동원을 쓰지도 않았다. 단돈 1파운드도 선거 때문에 안쓴다는 주의였다. 단 선거 며칠 전 후보자 공동 선거집회에 참가하여 정견을 발표하고 유권자의 질문에 응했다.

단 한푼도 쓰지 않고 선거운동한 존 S. 밀
 밀은 그전에 ≪의회의 개혁에 관해서≫라는 소책자에서 “영국 노동자는 다른 나라 노동자에 비해 좀 낫다고 할 수는 있으나 거짓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줄 알면서도 대체로 거짓말을 잘한다”고 비난한 일이 있었다. 물론 상대방 후보가 이 대목을 묵과하지 않았다. 대대적으로 인쇄해서 뿌렸고 연설회에 나온 유권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청중은 대부분 노동자였다. 그들은 “노동자를 모독한 글이 진의냐?”고 야유하고 어떤 이는 외투 속에 감추어 온 고양이 시체를 밀한테 던졌다.

 그러나 밀은 눈썹도 까딱하지 않았다. 태연자약하게 “내가 쓴 것은 모두 사실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순간 장내는 놀랐고 숙연해졌고 곧이어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정치인 하면 모두 거짓말쟁이 사시꾼, 눈앞에서만 감언이설로 인기를 끌어모으는 족속이라는 이미지가 지배하던 시대인데, 감히 유권자한테 당당하게 소신을 밝히자 청중은 당황했고 이윽고 매료된 것이다. 한 노동자가 일어나 말했다. “우리의 결점을 솔직히 지적하는 인사를 환영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친구를 찾고 있지 아양이나 떠는 인사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런 분의 충고에 감사하고 그의 지도력에 따릅시다.” 우레 같은 박수가 장내를 뒤흔들었다. 밀은 단 1파운드도 쓰지 않았고 “선거구민의 심부름 일체 안하고 지역사업 일체 안한다”는 공약이었는데도 당당하게 당선되었다. 그리고 국회에 들어가 부정 타락 당파주의 지역이기주의가 지배하던 영국의회를 개혁하는 데 선구자가 되었다.

임기 1년도 안남은 대통령이 10년 앞 일을 공약하다니
 마침내 1883년 부패 · 위법방지법이 채택됨으로써 부정부패는 일소되었는데, 이 법이 성공한 배경을 요약하면, ①매수 향응 부당한 영향력 행사, 대리투표 및 선거비용한도 위반과 허위신고 등은 형사처벌과 당선무효이며 후보자 본인이 범법자일 경우 영구히 그 선거구에서 나설 수 없도록 공민권을 박탈했다. 또 선거운동원이 위법했을 경우조차 당선이 무효가 되는 일종의 연좌죄를 적용했다. ②이 법 제정을 추진한 윌리엄 글래드스톤의 자유당 정부가 솔선했고 야당이 호응하였다. ③이 법 제정을 계기로 개인본위 선거에서 정당본위 선거로 발전하고 정당에 대한 찬반투표로 선거운동성격이 달라졌다는 것 등이다. 특히 정부여당이 솔선수범했다는 데 성공의 결정적 이유가 있다는 것,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월8일 노태우 대통령은 “14대 총선거를 역사상 가장 공명정대한 선거로 치르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임기 1년도 안남은 대통령이 각 시도를 순시하면서 10년 앞 개발사업까지 공약하고 있고, 도지사 시장군수 경찰서장, 기타 정보기관이 선심행정, 정보수집 제공 등 음성적으로 여당후보운동에 나섰다. 몇몇 유력한 후보자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외유길을 떠나거나 출마를 포기하였고, 곳곳에서 ‘일회용’입당사태가 벌어지고, 심지어 공공연하게 현금을 뿌리다가 적발된 사례도 있다. 불유쾌하고 불행한 일이다. 우리한테 공명선거는 그야말로 백년하청이란 말인가.

 우리에게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용기있는 정치가들이 다만 몇이라도 있다면, 우리에게 윌리엄 글래드스톤 같은 위대한 정치가가 이끄는 집권여당이 있다면 하는 아쉬움이 따른다. 집권층이, 정부여당이 최악의 경우 정권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공정하고 떳떳하게 게임의 룰을 지킨다는 비장한 각오가 서고 행동이 뒤따른다면 공명선거는 90% 이상 성취된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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