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에 눌린 화해의 싹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2.03.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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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핵고리 풀려야 남북관계 진전”

 최근 북한의 핵개발을 둘러싼 미국정부 내의 심상치 않은 기류를 타고 우리 정부도 핵문제와 연계해 일련의 대북교류를 잇따라 중단하자 미국의 대북한 핵정책의 본질에 대한 의구심이 높아지고 있다. 미 행정부 내에서조차 북한의 핵개발 시점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뚜렷한 확증없이 흘러나오고 있는 북한의 핵개발 임박론은 매파에 의한 고도의 정보 기만작전(disinformation campaign)이 아니냐 하는 의혹도 일고 있다. 합의서 발효를 계기로 활기를 띨 것으로 예상되던 남북교류가 미국 내의 ‘이상기류’로 인해 표류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매파의 입김을 대변하는 미 중앙정보국(CIA)의 게이츠 국장은 2월말 의회 증언에서 “북한이 앞으로 수개월에서 2년 안에 핵무기를 개발할 것”이라고 확언했다. 미 국무부측은 최근 그의 주장을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반박하긴 했으나 대세는 매파측으로 기울고 있다. 매파측은 앞으로 수개월 내에 북한은 핵재처리 시설을 완공하고 빠르면 내년중에 핵무기를 보유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한마디로 매파 입장에선 북한에 더이상 시간여유를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같은 위기감 때문에 미국은 북한의 핵문제에 대해 일종의 강박관념에 빠져 있다. 핵문제가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는 남북관계가 지장을 받아도 할 수 없다는 쪽으로 미국의 대북 핵정책이 가닥을 잡았다는 게 소식통들의 얘기다. 한 정통한 소식통은 “미국측은 국제원자력기구의 북한 핵사찰이 예상되는 오는 6월을 최종 시한으로 잡고 수순에 따라 대북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다”면서 “6월 이후엔 미국이 직접 국제무대에 나서 대북한 압력을 가중시킬 것이다”라고 내다봤다.

 우리측은 작년 12월 서울에서의 5차 총리회담 때만 해도 미국측의 양해아래 합의서채택과 핵문제를 별도로 추진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지난 2월 평양에서의 6차 회담에서 김일성 주석이 “우리는 핵무기가 없는 것은 물론 만들 필요도 없다”고 말한 게 결정적으로 미국측의 신경을 건드렸다. 가뜩이나 대북 불신감이 팽배한 데다 핵개발에 대한 강박관념에 빠져 있던 미국측은 김주석의 발언으로 완전히 심사가 뒤틀린 것이다. 김주석의 발언이 있은 후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등 유력지가 앞을 다루어 이를 보도했고, 때맞춰 게이츠 CIA국장과 리스카시 주한미군사령관이 미의회증언을 통해 강도높게 북한을 비난했다.

 우리측이 종전의 합의서와 핵문제를 별도 추진한다는 방침을 포기하고 모든 대북교류를 핵문제의 타결과 연계시키기로 방침을 바꾼것도 미국 내의 이같은 기류 때문이다. 외교안보연구원 尹德敏 교수는 “미국측은 그동안 우리 정부의 별도 추진 전략에 불만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6차회담을 고비로 미국은 우리 정부와 협의를 통해 연계전략(linkage strategy)으로 방침을 바꾼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우리 정부는 별도 전략 차원에서 미국과 협의를 거쳐 올해부터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지키로 하고 비핵화 선언을 하는 등 보따리를 풀었으나 막상 북한에게서 얻어낸 것은 하나도 없다는 주장이다.

 2월말에서 3월초 사이 로널드 레먼 국무부 군축국장을 비롯, 더글러스 팔 백악관 아주담당 선임보좌관, 제임스 릴리 국방부 국제안보담당차관보 등 미 행정부 고위인사들이 잇따라 방한한 것도 북한 핵문제에 대한 미정부의 우려가 상당히 심각한 상황임을 반영한 것이다. 이들의 방한 목적이 반드시 북한 핵문제에 국한되지는 않았지만 “단연 제1의 관심사였다”는  게 자리를 함께했던 한 소식통의 말이다. 이 소식통은 “북한 핵문제에 관한 한 한·미 양국은 이견이 없다”고 말한 뒤 “이들의 방한은 앞으로 국제무대에서의 북한핵 대응방안을 세우기 위한 한·미간의 협의가 주목적”이라며 항간의 압력설을 부인했다.

 이들의 방한이 협의 차원이건 압력 차원이건 간에 분명한 것은 미국의 대북한 핵정책이 철저히 자국의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켄터 미 국무차관은 최근 상원 청문회에서 미국의 대북한 핵정책을 “남한과의 동맹관계와 한반도의 분단현실이라는 보다 큰 테두리 안에서 살펴야 한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이미 남북한 관계가 북한핵을 둘러싸고 삐걱거리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그의 증언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서강대 李相禹 교수는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북한 핵문제가 풀리지 않는 남북관계의 진전이란 별 의미가 없다”고 설명했다.

 미국 정부는 북한의 핵개발을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시아에서의 제1의 안보위험”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같은 인식은 작년 12월 남북한이 합의서를 채택할 당시 미 국무부가 “북한 핵시설에 대한 국제사찰과 남북한 상호사찰은 별개의 문제”라고 논평한 데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남북 상호사찰과 별도로 국제사찰을 강조한 것은 북한 핵문제야말로 미국의 이해가 걸린 세계적인 관심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 핵고리를 푸는 데 남북관계가 ‘지렛대’로 이용될 수 있다면 언제든 그럴 수 있는 게 미국측의 입장”이라고 한 전문가는 지적한다.

“한 · 미간 공통 이해분모 찾아야 한다”
 결국 남북관계는 미국과 북한간에 핵문제를 둘러싼 줄다리기가 계속되는 한 무한정 경색될 것 같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남북 양측이 합의서에 따라 앞으로 구성할 정치 군사 교류 등 3개 분과위의 활동도 핵고리가 풀린 이후에라야 실질적 진전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북한측이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경제교류 역시 당분간 유보상태에 있다.

 북한은 오는 4월8일 소집하는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최근에 서명한 핵안전협정을 비준하고 뒤이어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사찰목록을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서울주재 미국 외교관의 표현대로 “북한이 핵개발할 의사가 없다는 확신을 실천을 통해 국제사회에 보여주지 않는 한” 미국측의 대북한 압력은 계속될 것 같다. 전문가들은 지금처럼 북한의 핵개발 임박론에 남북관계가 ‘볼모’로 잡혀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만큼 하루빨리 한·미간에 공통의 이해분모를 찾아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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