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요술’이 노예 만든다
  • 이진우(계명대 교수. 철학) ()
  • 승인 1996.09.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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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비평

 
“노예라는 낱말을 두려워하면서도 결단코 노예적으로 행동하는 세계가 있다.” 자본주의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니체의 이 말은 아마 그 과격함과 솔직함에서 마르크스를 능가할지 모른다. 우리 시대는 입으로는 ‘인간의 존엄’과 ‘노동의 가치’를 끊임없이 되뇌면서 실제로는 생존을 이어가는 데 급급하다. 21세기를 바라보는 지금 이러한 시대적 성격이 변하기는커녕 사회주의 몰락과 더불어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그러기에 우리는 니체의 과격함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점점 더 단단해져 가는 자본주의의 껍질을 떼어내고 그 ‘속’을 보려면 니체의 망치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니체는 ‘망치를 가지고 철학을 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일까?

 우리는 각질이 되어가는 자본주의에 점점 익숙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가 모든 사람에게 일할 기회를 주고, 모든 사람에게 개인적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고 모든 사람에게 서로 교통할 공간을 제공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노예 제도의 해방자이다. 자본주의는 빈곤을 ‘풍요한 소비’로 탈바꿈시키고, 전쟁을 생산적 ‘경쟁’이라는 말로 살짝 바꿔놓은 마술사이다. 그러니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물리치고 전지구적으로 확산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미국을 한번이라도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아마 이 자본주의적 마술을 도금이라도 맛보았을 것이다. 물론 이 마술에 취해 미국식 자본주의의 신봉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마술이 가짜 요술에 지나지 않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칠지는 다른 문제이지만 말이다.

현대인들, 소비의 붙박이로 전락

 광활한 대지, 엄청난 규모의 쇼핑센터, 밤새도록 방영되는 수십여 개의 텔레비전 채널, 쉴새없이 달려가는 자동차 행렬, 이들은 모두 자본주의의 상징이요 자본주의적 자유의 기호들이다. 미국은 그야말로 노예제도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자유 국가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 정도로 엄습해 오는 수많은 기회와 상품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허상에 눈멀지 않을 정도로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면, 자본주의적 요술 장난의 술수가 하나둘씩 눈에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아마 ‘자본주의는 정말 노예 제도를 폐지하였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은 먹을 거리가 엄청나게 싸고 많은 나라이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빈곤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일까?

 먹을 것이 많은 만큼 뚱뚱한 사람이 많은 나라가 또한 미국이다. 뚱뚱한 사람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단지 미국에서는 뚱뚱한 사람들이 대체로 하류층에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왜 그럴까? 자본주의의 두 번째 요술을 들여다보면 이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사회적으로 계층이 상승하면 할수록 부부가 같이 일하는 확률이 높고, 일하기 위해서는 나타나는 겉모습에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몸’을 가꾼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몸을 가꾸려면 역시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돌아가는 오락을 통해 대리 만족할 수밖에 없다. 먹고 앉아서 텔레비전을 본면서 산다는 느낌을 가진다면, 느는 것은 몸밖에 더 있겠는가? 그렇다면 미국의 자본주의는 인간을 빈곤과 전쟁으로부터 해방시켜 소비의 붙박이로 만든 것인가?

 자본주의의 세 번째 요술은 끊임없는 움직임이다. 미국에서, 아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활동과 자유를 상징하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자동차이다. 자동차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느 S나라가 이국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상식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일하고, 먹고, 움직이는가? 일할 기회가 있고, 먹을 것이 충분하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고 해서 인간의 존엄이 보장되는 것인가? 그들에게 먹을 것 만큼은 부족하지 않게 보장하고, 텔레비전과 자동차를 통해 환상의 세계를 퍼뜨리는 것은 오히려 이런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것이 아닐까.

 이것이 아메리카니즘이라면, 그것은 또 다른 소비의 노예를 생산할 뿐이다. 물론 이러한 인식도 자본주의에 대한 착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심한 말을 해보는 것은 ‘빨리빨리’라는 말을 국가적 기호로 보편화한 한국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지극히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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