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 사태,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박성준 기자 ()
  • 승인 2006.05.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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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환씨 사망 2주기 계기로 본 원진 사태… 인정기준 미달자들 계속 투쟁


 

  91년 1월5일, 김봉환씨(당시 53세)가 쓰러졌다. 그는 경기도 미금시 도농동에 있는 인조견사 생산업체인 원진레이온을 그만두던 지난 83년까지 6년 동안, 이 회사 원액2과에 근무하면서 유해물질인 이황화탄소(CS2)가스에 노출됐다. 김씨는 90년 10월 병원에서 중독증 진단을 받은 뒤부터 직업병으로 인정받기 위해 회사와 노동부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여오던 터였다. 김씨는 노동부로부터 요양 신청서를 접수하라는 통보를 받던 날 쓰러졌다. 병원으로 옮겨진 김씨는 밤 10시30분쯤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했다.

  김씨가 사망하자 근로자들은 문제를 덮어두려 했던 회사를 상대로 연일 규탄시위를 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 10여개 단체도 ‘원진레이온 직업병사망사건 대책위원회’(이하 원대협)를 구성해 진상조사에 나서는 등 사건에 간여했다. 5개월 간의 싸움 끝에 “김씨의 죽음은 고혈압이 아니라 직업병 때문이며 그에 따라 유족에게 보상금과 장례비를 지급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회사측은 전·현직 근로자에 대해 정밀 역학조사를 실시키로 해 사태는 일단 근로자측의 승리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일지 참조).

 

중독 환자 207명… 일부만 보상

  근로자들은 매우 실질적인 ‘전리품’을 얻었다. 원진 문제에 줄곧 참여한 성수의원 양길승 원장은 “원진 사태는 직업병의 심각함을 일깨워주는 데 큰 공헌을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해결 과정에서 얻은 성과이다”라고 강조한다. 양원장이 말하는 성과란 직업병 시비가 발생했을 때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의견을 수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사용자가 직업병 발생에 따른 보상보다 예방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지게 됐다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정부로 하여금 여러 차례 문제점이 지적됐던 직업병 인정 기준을 손질토록 해 직업병 관리에 전기를 마련한 점도 결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김씨가 죽은 지 2년이 흐른 지금, 원진 근로자들은 아직도 불만에 차있다. 불만은 지난 11월16일부터 12월6일까지 원진에 근무했던 근로자 14명이 서울 명동성당에서 집단 단식농성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노동부가 직권으로 실시한 검진에서 “직업병 환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정받고 따로 모여 판정 기관의 결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직업병을 조속히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지난 88년 이후 현재까지 원진에서 나온 이황화탄소 중독 환자는 모두 2백7명. 이들 중 일부는 직업병 판정을 받은 환자와 거의 같은 증세를 보이고 있는데도 아직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어 문제가 커졌다.

  심상윤씨(49) 부부도 이같은 부류에 속하는 이황화탄소 중독증 유소견자들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해 죽음의 독가스를 마셨지만 신체검사를 할 때마다 ‘이상이 없다’는 결과만 나왔다. 직업병 인정 여부를 점수로 정한다면, 사람 죽어간다는 판단도 점수로 정하는가.” 몇차례의 특수검진 결과 직업병 유소견자라는 판정만 받아 회사측으로부터 작업 전환 조처를 받아 작업을 중단한 채 다른 동료와 함께 노조로 출근하는 심씨는 입사한지 15년째에 접어드는 고참 근로자이다.

 

부부·부자·모녀 환자도 여럿

  심씨와 함께 입사한 부인 고정자씨(45)도 역시 유소견자. 고씨는 “먹고 살 일이 걱정이다. 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온몸이 저려 진통제를 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원진 근로자 가운데 심씨 부부처럼 부부 또는 부자, 모녀가 직업병에 걸린 사람은 여럿 있다. 원진에서 9년 일했으며 역시 중독증세를 보이고 있는 황홍현씨(42)는 “원진 근무자들 가운데 온전하게 가정을 이루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이처럼 직업병 증세로 노동력을 상실했으면서도 산재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원진 근로자는 70여명에 이른다. 이들의 미래는 암담하다. 회사측과 근로자측이 선임한 동수의 의사로 구성돼 객관적으로 직업병을 판정해오던 판정위원회가 노동부의 위법판정을 받고 활동을 금지당해 더욱 난감하다.

  처음의 6인으로 구성된 판정위원회는 노사가 합의해 만든 기구였다. 원진 노조 오명섭 교육부장은 “전에는 만장일치가 돼야 직업병이 인정됐기 때문에 오히려 효율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노동부가 정한 직업병 인정기준에 따라 직권으로 직업병을 판정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노동부가 판정권을 찾아간 후 오히려 원진 직업병에 대한 무중독 판정 비율은 30%에서 60%로 높아졌다.

  원진 근로자들은 판정위원회를 부활하거나 지난 91년 11월에 ‘개악’된 ‘업무상 재해 인정기준’(이하 인정기준)을 다시 고치자고 요구한다. 개정된 인정기준은 작업장의 이황화탄소 기준 한계농도를 10ppm 으로 못박고, 이황화탄소 중독증의 전형적인 증상을 포함해 두가지 이상의 증상을 보여야만 직업병으로 인정한다. 근로자들은 한계농도를 낮추고 전형적인 증상 한가지만 있어도 직업병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진직업병대책위원회 유양훈 간사는 “한계농도가 10이면 위험하고, 그 이하면 괜찮다는 말인가. 이것은 환자를 조기 발견해 치료하려는 제도가 아니라 오히려 환자의 상태가 더욱 악화되도록 부추기는 제도다”라고 주장한다.

  지난해 4월 서울대 보건대학원이 실시한 작업환경 측정 결과,‘독가스실’로 악명높은 방사과에서 이황화탄소 가스 농도가 최고 39.7ppm으로 나타났다. 지난해에도 방사과에 근무하던 이병태씨 등 3명이 숨지고 4명이 쓰러졌다.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직업병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 이들을 단일 사업장으로는 직업병 발생 규모가 세계 최대라는 원진의 악몽에서 구출해 보살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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