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 싸움 ‘3당 시대’ 열렸다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2.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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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히 ‘화요일의 대혁명’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선거였다. 3월24일 선거 당일만 해도 민자당 압승구도로 보이던 선거 결과는 시계의 시침이 자정을 넘어가면서 급변해 13대에 이어 또 한번 ‘여소야대’ 정국을 탄생시켰다. 민자당 중앙당사의 선거 상황실에 나왔던 세 최고위원의 얼굴이 차례차례로 굳어져가던 그 시간은 그들이 “구국의 결단”이라고 찻잔해마지 않았던 3당합당이 유권자들의 한표에 의해 냉어한 심판을 받는 순간이었다.

 민자당 당직자들에게서는 “안기부와 기무사가 선거를 망쳐놓았다. 그들은 이 결과를 어떻게 보상할 거냐”는 원망의 소리가 거침없이 나왔다. 그러나 민자당의 안정 의석 확보 실패는 안기부와 기무사의 ‘실수’에 모든 원인을 돌릴 수는 없다.

 14대 총선 결과는 국민당과 무소속의 대약진으로 설명된다. 창당부터 선거일까지 불과 한달 반의 시간밖에 없었던 신생 정당 국민당은 자력으로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성공, 놀란 만한 저력을 과시했다. 이는 ‘재벌당’이라는 비난 속에서도 국민에게 제3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이 상당한 흡인력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역대 어느 선거 때보다도 불리한 선거법을 끌어안고 싸워야만 했던 무소속 후보들도 여당의 텃밭에서 ‘홀로서기’에 성공해 여당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는 여당의 프리미엄을 통한 조직력과 금권에 의지할 때만 당선 가능성이 있다는 일반의 상식을 뒤엎음과 동시에 집권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불신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민자당 무소속 영입 ‘새 판짜기’ 모색
 13대 총선에 의한 ‘여소야대’를 인위적으로 개편, 거대 여당을 만든 민자당은 이제 4년 전고 똑같은 고민을 되풀이하고 있다. 13대 국회 초반의 악몽이 약체 민자당을 괴롭히고 있다. 이제 단독 개헌은 물건너간 ‘망상’이 되어버렸다. 법안 하나를 통과시키는 것도 야당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게 됐다. 따라서 새로운 정권창출을 위해서나 집권 후반기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해서라도 민자당은 새로운 판짜기를 모색할 것이 분명하다.

 이 경우 무소속 당선자들은 여권의 유혹에 가장 근접해 있다. 이들 대부분이 친여 인사라는 점은 민자당을 어느 정도 안심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들의 상당수는 계파간 나눠먹기식 공천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민자당이 이들을 모두 흡수하는 것은 불가능ㅎ다. 민자당이 설혹 이들을 모두 영입한다 해도 과반수를 가까스로 넘어서는 정도일 뿐이다.

 결국 국민당은 자연스럽게 정계 재편의 핵심이 되어버렸다. 25일 17시 현재 31석의 제3당에 불과한 국민당은 의석수에 상관없이 역대 어느 정당보다도 강력한 ‘캐스팅 보트’를 행사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견제와 개헌 저지를 최대의 선거 쟁점으로 삼았던 민주당은 자력으로 개헌 저지선을 마련하는 데 실패해 국민당을 묶어둬야만 개헌을 저지할 수 있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다. “국민당의 등장은 우리 정치에서 하나의 재앙이다.” 지난 20일 민주당 김대중 공동대표는 해남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국민당의 성격을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14대 총선은 민주당으로 하여금 ‘정치적 재앙’인 국민당을 정국 운영의 ‘동반자’로 삼게끔 강요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민주당 의석수는 전국구 의석 22개를 포함해 97석. 개헌 저지선인 1백석에서 3석이 모자란다. 그러나 무소속 당선자의 성향에 비추어 민주당의 무소속 영입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따라서 ‘여소야대’의 상황 속에서도 민주당은 국민당의 행보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묘한 입장이다.

 “이번 총선은 내 책임 아래 치른다”고 호언 장담한 민자당 金泳三 대표는 “여소야대가 되면 헌정이 중단되는 사태가 올 것”이라고 유권자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김대표는 헌정이 중단되는 사태에 대비하기에 앞서 자신의 거취는 물론, 민자당 내의 새로운 판짜기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상황에 처했다. 한때 국민당의 출현을 자파에 유리한 구도라고 성급하게 단정했던 민자당 내 민주계는 이제 국민당을 제일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아야만 한다. 민주계가 염려하는 최악의 구도는 청와대와 국민당이 의기투합해 새로운 ‘개헌전선’을 형성하는 일이다. 정계와 재계의 두 覇者가 적절한 권력분담에 합의하고 내각제 개헌을 시도할 수도 있다는 예측은 김대표의 새로운 악몽이 되고 있다.

급속한 정계 재편은 없을 듯
 국민당 鄭周永 대표최고위원은 다른 당과의 공조와 관련 “여야를 막론하고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적극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정대표는 청와대 영수회담에 대해서도 “나라를 위해서라면 그 누구와도 만나겠다”고 말했다. 그의 이런 입장은 향후 정국 운영을 국민당이 적극 주도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판짜기에 대한 그의 적극적 자세가 과연 정계재편을 노리는 것인지는 아직 불명확하다. 총선 이전만 해도 “총선이 끝나면 엄청난 지각변동이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 정대표는 25일 한걸음 후퇴 “지진이 한번 정도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대표가 말하는 ‘지진’은 급속한 통합이라기보다 무소속 당선자들의 흡수에 더 무게가 실려 있다는 것이 당내 인사들의 해석이다.

 14대 대통령 선거가 그리 멀지 않고 각자 갈 길이 바쁜 상황에서 급속한 정계 재편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3당 합당으로 일순간의 달콤함을 맛보았던 민자당이 결국 이번 선거로 통렬한 매질을 당한 것에서도 드러나듯 인위적인 정계 재편에 대한 국민적 저항심은 또 다른 정치작업을 용납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국민당 정주영 대표의 꿈은 오히려 대통령 직선제 고수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대표는 25일 대통령 선거 출마 문제와 관련 “한두달 더 생각해본 다음 당론에 따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실상 그의 지향점은 대통령 선거 출마로 집약된 듯하다. 그는 기회있을 때마다 “민자당의 내각제 개헌 기도는 노태우 대통령이 또 한번 자리를 차지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기 때문에 절대로 반대한다”고 말해왔다.

 국민당이 6공 세력의 본산지인 대구에서도 2석을 차지하는 등 전국적으로 고르게 득표한 것도 대통령 선거전에서 국민당에게 일단 유리한 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정치권 스스로의 지역감정 조장으로 부산과 호남 지역에서 참패하기는 했지만 이 두 지역을 제외하고는 전국에 교두보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또 국민당 후보가 상당수 지역에서 2위를 기록하는 ts전을 해 국민당은 득표력을 일단 인정받은 셈이다. 자체 집계에 따르면 25일 낮 17시 현재 국민당 득표율은 20%를 넘어서고 있다. 정대표는 전국의 모든 지역에 지언유세를 다니면서 대통령 선거 출마에 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사실 지원 유세만큼 훌륭한 선거운동도 없다. 국민당 핵심부는 일단 30석만 넘으면 대통령 선거전에서 유리한 위치에 오를 수 있다는 자체 평가를 내렸었다.

 민주당 김대중 대표의 대권 가도에 국민당 변수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동안 정치권 일각에서는 민주당의 참패를 가정한 구도에서 김대표의 내각제 선회 가능성이 끊임없이 거론됐다. 그러나 선거 결과 개헌 저지선에 거의 근접한 상황인데다 수도권 지역의 강세등 자위할 만한 대목이 많은 만큼 내각제로 선회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졌다는 게 중론이다.

 이전 총선으로 대권주자로서의 김대표 위상은 오히려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전북 지역에서 2석을 잃은 대신 서울 · 경기 지역에서 선전한 데다 충남 · 북 지역에서 ‘야권 터널’을 뚫는데 성공한 것은 커다란 성과다. 반면 이기택 대표는 부산 · 경남 지역에서 역부족을 드러내 입지가 약화됐다.

 이런 정황에 따라 김대표의 대권 가도에는 자치단체장 선거의 실시가 필요충분 조건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김대표의 희망대로 자치단체장 선거가 가능하려면 국민당의 협조가 선행되어야 한다. 관권선거와 부정선거 문제를 줄기차게 거론해온 김대표는 대통령 선거의 관건이 차지단체장 선거에 달려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국민당 손에 달린 자치단체장 선거
 그러나 이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실시 여부를 결정할 열쇠는 국민당이 쥐고 있다. 국민당은 정부 여당의 편을 들어 민주당 김대표를 곤혹스럽게 할 수도 있고, 김대표와 공동전선을 펴 민자당을 곤경에 몰아놓을 수도 있다. 이 선택권은 제3당 국민당의 커다란 전리품이자 정주영 대표의 입지를 훨씬 넓혀 줄 ‘여의봉’이 된다.

 바야흐로 삼각구도에 의한 새 정치마당이 펼쳐졌다. 13대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3당은 적절한 견제와 연합으로 국민에게 새로운 정치를 선보일 것이다. 이는 정치 후진국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는 우리 정치 현실을 일약 몇 단계 발전시킬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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