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권 침해 방관하고 토초세 부과 가당찮다”
  • 정희상 기자 ()
  • 승인 1992.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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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 · 법조인 등 지주 48명, 당국 고발 태세

 서울 서초동 꽃마을 무허가 판자촌에 화재가 발생되고 나서 이들이 지난 3월 11일, 서울시내 한 다방에서는 화재사건 현장 토지소유자 아홉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저마다 이번 화재로 무허가 건물이 자연철거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다시는 영세민들이 집을 짓고 살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화재피해를 입은 영세민에게 지주들이 얼마간의 이주비용을 대기로 하고 서울시 측에는 공권력에 의한 해결을 적극 요청키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게 여의치 않게 되면 일단 불이 난 곳만이라도 지주들이 매월 2억여원을 각출해 사설경비원을 두자는 얘기도 오갔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각, 4명의 사망자를 낸 서초동 화재현장에는 오갈 데 없게 된 피해자들에 의해 또 다시 천막 철조물이 하나 둘씩 올라가고 있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지주들은 서울시와 서초구청 쪽의 대책없는 태도에 분개하며 이제 이 문제가 자신들의 적극적인 노력없이는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 관계 공무원들을 고발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서울시 도시 재개발 정책의 부산물인 서초동 무허가 판자촌의 운명은 이제 지주들이 뭉치고 나섬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일대 지주들 48명은 지난 해 4월부터 ‘지주연합회’를 결성해 당국의 재산권침해 방관에 정면으로 맞서고 나섰다. 그동안 다섯차례에 걸쳐 자신들의 사유지에 들어서 있는 판잣집들에 대한 철거방안을 마련해 달라는 진정서를 청와대와 서울시장 등에게 제출한 것이다.

 이처럼 지주들이 새삼스럽게 집단 움직임을 보이고 나선 것은 이 일대가 지난 해부터 시행된 토지초과이득세의 부과대상이 되어 막대한 세금을 물어야 하는 상황이 닥쳤기 때문이다. 지주들의 불만은 무허가 판잣집의 집단 형성으로 사실상 자신들이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는데도 당국이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노력 없이 지주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태도만을 취하고 있다고 보는 데서 비롯됐다.

 서초동 꽃마을 지주들의 면면은 크게 세부류로 나뉜다. 전현직 고위 공직자 · 법조인 · 사업가 등이 그들이다. 현재 지주연합회에 가입한 사람들 중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아챌 수 있는 ‘거물급 인사’들도 많다. 대법원 판사를 지내고 지금은 변호사로 있는 안병수씨, 서울 고검 검사 출신으로 현재 소비자보호원 분쟁조정위원장인 양현국씨, 유엔 대사 · 필리핀 대사를 역임한 김창훈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 김흥수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노동부 차관 출신인 정동철 산업안전공단 이사장, 서울 고검 검사 출신 변호사 함영업씨, 태평양그룹 부회장 신동관씨 등이 그들이다. 이박에도 각종 중소기업 사장과 국영기업체 간부들의 이름도 여럿 눈에 띤다.

“알아서 해결하라” 당국 태도에 지주들 발끈
 현재 지주연합회 대표는 박한창씨(한국통신 과장)가 맡고 있다. 박씨는 지주연합회에 가입한 사람들에 관해 이렇게 설명한다.

 “무허가 건물입주자나 그곳 토지 소유자는 모두 서울시 재개발정책의 피해자들입니다. 그래서 피해의 한 당사자인 지주들 중에서 당국이 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해주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현지 고위 공직자는 대부분 본인들이 이름을 빼달라고 해 가입되지 않았습니다.”

 박씨에 따르면 48명의 지주연합회원은 법원단지 임대 토지 소유자 중 일부에 불과하며 미가입자까지 합치면 1백여명은 될 것이라고 한다. 현지 주민들은 현지 장관으로 있는 최모씨, 민자당 전국구 공천을 받은 이명박씨 등도 이곳 지주라고 귀뜸한다. 이명박씨의 경우는 지난 90년 꽃마을 화재로 없어진 판자촌 위에 지하4층, 지상5층짜리 빌딩을 지었는데 현재 이곳 5층에 자신의 개인사무실을 두고 있다.

 지주 가운데 특히 법조인이 많은 것은 이곳에 법원단지 조성이 검토되던 지난 80년을 전후해 그들이 앞을 내다보고 발빠른 투자를 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인터뷰에 응한 고위 공직자 출신 지주들은 한결같이 “노후를 대비해 약간의 땅을 사두었을 뿐 투기목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강남등기소를 찾아 48명 지주들이 소유한 땅 평수를 확인해본 결과 전체 8천여 평에 이르렀는데, 대부분 각각 1백평 · 5백평씩을 소유하고 있었다. 땅을 구입한 시점은 법원단지 조성이 검토되던 80년대 초반 이후가 3분의 2가량을 차지했고, 나머지 3분의 1이 70년대에 구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어쨌든 70년대 후반만 해도 평당 몇만원 선이던 이곳 땅값은 현재 3천만원대를 호가하는 금싸라기로 변했다. 따라서 지주들이 당초 투기목적은 없었다고 말하지만 그동안 전국적인 부동산 투기 불에 힘입어 결과적으로 엄청난 반사이익을 보제 된 것만은 분명하다.

 현재 지주들은 당국의 대책없는 태도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반해 자신들의 땅에 무단입주해있는 주민들에 대해서는 의견이 약간씩 다르다. 우선 이들은 서울시와 서초구청이 자본주의의 기본질서인 국민의 재산권을 보호해줄 의무가 있는데 아무런 대책없이 과중한 세금만 거둬가고 있다는 사실을 통열히 공박한다. 서울시 재개발 정책의 부작용으로 하루아침에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땅을 무단 점유하고 있는데도 그 특수성은 무시한 채 세금은 세금대로 다 거둬가고, 해결은 지주와 입주자 간에 하라고 떠넘기는 시의 정책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동안 이 문제를 둘러싸고 지주들이 당국을 상대로 줄다리기를 벌이기도 여러차례. 그러나 그때마다 당국의 답변은 지주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식이었다.

 지주 중 한사람인 김창훈 외교안보연구원 연구위원은 당국의 무성의로 인한 문제해결의 어려움을 이렇게 설명했다.

 “고건 시장 시절 서울시를 찾아갔습니다. 서울시 측에서 노력해 현재 고도제한지구로 묶여 있어서 5층 이상 건축이 금지된 서초동 무허가촌 일대를 7층까지 풀어주면 지주들이 나머지 2층에 해당하는 수익금을 서울시에 납부할테니 그 돈으로 입주자를 구제해달라고 거의했죠. 당시 고시장은 쾌히 받아들였으나 검찰과 법원측의 반대로 무산된 겁니다. 주위에 5층 이상이 들어서면 사법부 권위가 떨어진다나요.”

 이처럼 문제가 지지부진하기를 몇 년. 이제 지주연합회 측은 더 이상 사태를 방관할 수 없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올해부터는 국회와 서울시 의회에 청원서를 내는 한편, 관할 서초구청장 및 구청 도시정비국장을 직무유기죄로 형사고발할 것을 결의했다.

 한편 지주들은 자신들 소유의 땅에 무단 입주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크게 두가지 입장을 보이고 있다. 지주들이 이주비용 등 다소간의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평화적으로 해결해보자는 측과, 공권력 실종지대에 대해 그런 양보는 있을 수 없으니 강제 철거든 임대아파트 입주 자격 부여든 오로지 서울시가 문제를 떠맡아야 한다는 입장이 그것이다. 전자는 대개 변호사 · 외교관 출신 지주 등의 의견이고, 후자는 주로 과거에 법집행 경험이 있었던 직업 출신이나 일부 사업가들의 생각인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이들 모두 서울시의 근원적 해결노력 없이는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고 보는 점에 있어서 공통의 고민을 안고있다.

 지주들이 현재 당국을 상대로 형사고발 등 극한적인 수단까지 동원하려고 나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주연합회측은 무허가 건물 입주자들에게 서울시가 영구임대아파트 입주권을 주고, 지주들이 얼마간의 이주비를 대는 선에서 타결되는 것을 최선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서울시측에서 그럴 의사가 없다면 공권력을 동원해서라도 재산권 행사를 당장 보장해달라는 단서도 붙이고 있다.

 애초에 지주들이 영세민들에게 그 땅에 들어와 살라고 한 일이 없듯이, 각지에서 몰려든 철거민들도 현재 거주하는 땅이 누구 소유인지를 알고 들어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울시는 지금 이 문제를 양 당사자간에 해결해야 할 것으로 치부한다. 여기에 수도 서울의 빈부격차와 정책빈곤이라는 심각한 문제가 상징적으로 함축되어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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