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보자 '약', 약보다'뽕'
  • 성기영 기자 ()
  • 승인 1997.07.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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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 본드 흡입 · 약물 복용서 '크랙'등 신종 마약으로 이동중

지난 7월 1일부터 시행된 청소년 보호법 때문에 슈퍼마켓·편의점 업주 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청소년에게 담배나 부탄 가스·본드를 예전처럼 무심코 팔았다가 잇달아 입건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업주들의 반발을 예상하면서도 정부가 청소년을 약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극약'처방에 나선 것이다.

청소년 약물 근절에 정부가 이같은 고단위 처방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그간 청소년들의 약물 사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말해준다. 일단 약물에 중독되면 좀처럼 헤어나로 수 없을뿐더러 약물 사용을 중지한다 하더라도 그 후유증이 평생 남는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본드에 손을 댄 김태훈군(16·가명)이 본드를 끊은지는 1년이 넘었다. 3년 넘게 거의 매일 본드를 붙잡고 살다시피 했던 것을 생각하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지만 김군은 아직도 소리내어 책을 읽다 보면 이따금씩 자기도 모르게 혀가 꼬이고 말이 끊어진다. 약물 중독 후유증이다. 김군도 이를 잘 안다. 그래도 하루에 본드나 니스 6~7통을 '불어대던'몇년전, 사물이 온통 뿌옇게 보이고 밤 낮 없이 환청에 시달렸던 데 비하면 많이 나아진 것이가. 김군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흡입해 오던 본드나 니스를 외부의 도움없이 스스로 끊었지만 약물에 중독된 청소년에게서 이런 사레를 발견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청소년약물상담소(02-383-0036)에 접수된 다른 사례를 보자.

"중3 때부터 선배들에게 흰 가루 약을 사 먹었습니다. 12개 들이 포장에 만~2만원씩 하는데, 이걸 먹으면 말을 더듬고 허공에 소리르 지르기도 합니다."

"고2 때부터 '러미나'를 복용했는데 졸업 후 끊으려고 해 보았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배가 고플 때도 밥보다는 약을 먼저 찾게 됩니다. 아무것에도 의욕이 생기지 않아요."

본드 흡입후 난잡한 성관계
이런 사례를 보면 청소년들의 본드·가스·약물 복용 등이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본드나 부탄가스 외에 청소년들이 흔히 약국에서 사서 복용하는 러미나는 다량 복용할 경우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진해 거담제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렇게 본드나 가스를 들이마시고 나면 십중팔구 그룹 섹스나 동성애 등 난잡한 성관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추세가 그래도 나타난 또 다른 사례를 보자.

"고등학교 입학 직후 선배들에게 끌려서 조직에 가입했습니다. 선배들이 얻어 놓은 오피스텔에 토요일마다 끌려가 항문 성교를 강요당했죠. 너무 아파서 앉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고 나면 선배가 원하는 학생을 데리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가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거든요. 물론 오피스텔에는 본드를 쌓아놓고 관계를 하기 전에 본드를 흡입합니다."

약물 복용후 성관계로 이어지는 사례 중에는 근친상간과 같은 극단적인 예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청소년약물상담소에 1주일에 20여건씩 들어오는 상담 사례 중 20%정도가 근친상간과 관련되어 있다는 충격적인 통계도 있다. 게다가 94년까지만 해도 상담해 오는 청소년은 주로 18세 전후의 고등학생들이었으나 최근 들어 중학생, 심지어는 초등학생으로 연령이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흐름이다.

이들이 한 번 '쫄'(본드를 뜻하는 은어)을 불기 시작하면 약물에 강한 아이들의 겨우 하루 종일 비닐 봉지를 입에 대고 있는 경우도 많다. 최근에는 청소년들이 토끼라는 은어로 부르는 '토끼 코크'가 널리 사용된다. 토끼 코크는, 이를 사용해본 청소년들에 따르면, 성분은 다른 본드보다 순하면서도 환각 작용은 더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최근 급격하게 확산되고 있다.

전문의들은 본드 등에 중독 될 경우 뇌세포가 파괴되어 이에 따르는 각종 정신 질환, 예를 들면 기억력 장애나 정신 불열증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젊은 나이에 치매 현상이 닥칠 가능성도 많다.

따라서 약물 중동임이 확인되면 곧바로 전문의를 찾아 재활 치료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이들을 위한 재활 프로그램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청소년 약물 중독자를 치료하는 전문 병원은 아직 하나도 없는 형편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결손 가정 출신인 청소년 중독자들이 둥지를 틀 곳은 아무 데도 없다.

학교에서 '약물 교육'불가능
그나마 학교에서라도 약물 관련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약물에  빠지는 아이들을 사전에 구제할 수 있겠지만, 이 점 또한 미흡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지난 7월부터 중고생들을 상대로 한 소변 검사 항목에 약물검사를 추가하기는 했지만,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서도 다분히 회의적인 반응을 나타낸다.

경기도 안산에서 약물 중독 청소년을 위한 대안 공동체 '들꽃 피는 마을'을 운영했던 김현수 목사는 "학교측이 약물을 사용하는 학생들을 교육청에 보고하는 것부터 은폐하기 일쑤인데 어떻게 제대로 된 약물 교육을 할 수 있느냐"라고 말했다. 실제로 경기도 한 중학교에서는 담당 교사가 약물 중독 학생을  교육청에 그대로 보고했다가 학교가 발칵 뒤집힌 적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앞으로 닥칠지 모르는 더 큰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국민 소득이 높아질수록 발생률이 줄어드는 다른 범죄와 달리 청소년 약물 중독의 겨우 소득 증가와 더불어 선진국형 신모델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본드나 가스는 이미 후진국형 약물이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경우 대략 만원 안쪽의 값이면 더 자극성이 강한약물을 찾게 마련이라고 진단한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김경빈 박사는 "코카인에 베이킹파우더를 첨가해 양을 크게 늘린 '크랙'등 신종 마약은, 같은 양의 코카인에 비해 15분의 1값인 10달러 선에 팔리기 때문에 청소년이 쉽게 접촉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라고 우려했다. 크랙은 80년대 중반부터 일부 마약 사용자들에게 퍼지기 시작했으며, 코로 가루를 직접 흡입하는 코카인과 달리 유리관이나 간단한 파이프를 이용해 흡입할 수 있어 코카인을 대중화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신종 마약이다. 크랙은 주로 남미 이주자들을 통해 일본에까지 유입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청소년약물상담소 민호기 소장은 "이미 조기 유학이나 배낭 여행 바람을 타고 국내 청소년들에게도 필로폰 정도의 마약은 유입되어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청소년들에게 약물을 팔지 못하도록 한 것은 때 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긍정적인 조처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 같은 조처로 청소년 약물 복용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다면 오산이다. 이미 '밥보자 약을 먼저 찾는'수많은 청소년들, 지금도 뇌세포가 녹아내리고 있을지 모를 이들을 어떻게 구제할것인가를 놓고 한시바삐 머리를 맞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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