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부도행렬 “4월이 더 걱정”
  • 김상익 차장대우 ()
  • 승인 1992.04.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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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자금 환수 등 ‘복병’ 잇따라

 바이어들과 상담하는 도중에 기업이 쓰러져 상담 자체가 무산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주문을 받아놓고 부도를 내 수출을 못하는 일도 많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중소 제조업체 중에서 위태롭지 않은 기업은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중소 제조업체의 무역업무를 대신해주는 고려무역 관계자의 현실진단은 이처럼 어둡기만 하다.

 중소기업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올들어 논노 · 삼호물산 등 부도를 내거나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회사가 꼬리를 잇고 있다. 지난해에는 13개 상장기업이 부도처리됐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앞으로 상장기업이 몇 개나 더 쓰러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상장기업이라면 웬만한 경기변동에 쓰러지지 않을, 그래도 튼튼한 기업일텐데 이런 기업이 잇따라 무너진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경제가 어렵다는 것을 반증한다. 상장기업의 부도는 증시의 침체를 가중시켜 증권시장을 통한 자금조달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올해에도 벌써 1천여개 기업 부도
 한국은행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당좌거래가 정지된 기업은 모두 6천1백59개에 이른다. 중소기업이 하루 평균 17개씩 부도를 낸 셈이다. 90년과 비교할 때 개인사업자보다 법인기업의 부도가 급격히 증가했다(59쪽 표 참조). 올해에도 벌써 1천개 이상의 기업이 부도를 냈다.

 우리 기업은 공통적으로 고임금 · 고금리에 시달리고 있다. 몇년새 급격한 임금상승으로 가격경쟁력이 약화된 데다 근로의욕마저 저하돼 불량률이 높아지고 납기를 못 지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수입개방 등올 내수시장마저 침체되는 바람에 판매가 더욱 어려워졌다. 부동산투자로 손해를 메우려던 기업은 최근의 부동산 경기 침체로 타격을 받았다.

 판매부진은 부도의 신호탄이다. 판매가 부진하면 재고가 쌓이고 판매대금의 회수도 어려워진다. 자금흐름이 끊겨 돌아온 어음이나 당좌수표를 막지 못하면 부도가 나는 것이다.

 한국신용평가(주)의 부도유형 분석은 이같은 과정을 좀더 자세하게 보여준다. 첫째 유형으로 제품개발에 실패, 부도를 내는 경우가 있다. 시장성이 결여된 제품을 개발해 시장에 내놓았다가 재고가 쌓이면 자금부담이 늘어나 결국 문을 닫게 된다. 두 번째 유형은 경기불황과 판매여건 악화로 부도를 맞는 경우다. 신발산업처럼 산업 자체가 경쟁력을 잃은 데다가 불경기까지 겹치면 관련기업은 잇따라 곤두박질하게 된다. 살아남기 위해 업종전환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소형 스피커 제조업체인 미크론전자의 경우 90년초 수출이 부진하자 무선전화기 생산으로 업종을 전환했는데, 자체 브랜드 개발에 실패해 부도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세 번째로 자기자본이 충실치 못해 타인자본에 의지하는 기업의 경우 시중 자금사정의 변화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릴 수밖에 없다. 자금의 흐름이 막히면 납기를 못 지키거나 제품을 제때 출하하지 못해 자금조달이 더 어려워진다. 만성적인 자금난이 부도로 연결 되는 것이다.

 끝으로 연쇄도산이 잇다. 관련기업이 부도를 내거나 부실기업을 인수했다가 당하는 경우다. 동양시스템과 고려시스템 등은 연쇄부도의 대표적 경우로 꼽힌다. 작년 한해 동안 관련기업 파산에 따른 부도는 58건에 달했다. 논노의 경우 법원의 재산보전처분을 받아 일단 파산을 모면했지만 논노로부터 받을 돈을 못 받게 된 하청업체 등 채권기업은 연쇄 도산의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지난해 이후 잇따른 도산사태가 판매부진 등 경영악화 요인도 있지만 일시적인 자금공백을 메우지 못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올들어 시중금리가 하향안정화 추세를 보이는 등 자금사정은 전반적으로 나아지고 있으나 중소기업들이 돈을 구하지 못해 쩔쩔매기는 마찬가지이다. 재무부도 금융기관의 여신운용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특정 업종에서 경영환경 변화 등으로 어려움이 생기면 개별기업에 대한 신중한 심사 없이 여신은 억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경쟁력이 있는 기업도 이 통에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사례가 없지 않았다.

 이와 관련, 최근 일부 단자사에서는 심사기능을 강화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만큼 기업이 자금을 끌어다 쓰기는 더 어려워진 셈이다. 제일투자금융의 李亨年 기업분석부장은 “요즘의 부도사태 때문에 심사기능을 강화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타인자본에 의존하려 하는 기업의 자세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돈을 쌓아놓고 기다리는 사람이 없으므로 ‘남의 돈’을 얻어서 장사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돈을 무작정 빌려줄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91년 현재 우리나라 제조업의 평균 지자기자본 비율은 25.3%밖에 안되는 데 비해 89년 기준으로 일본기업은 30.3%, 미국은 40.5%, 대만은 58.8%로 상대적으로 건실한 재무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현재 자본시장이 육성돼 있지 않아 현실적으로 기업이 지정금융을 조달할 수 있는 길은 거의 없다. 증권시장이 침체된 것을 우려해 회사채 발행이나 유상증자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증시에서의 자금조달이 어렵기 때문에 기업들이 은행이나 단자사로 몰리게 되고 그 결과 자금난이 더 심화되는 것이다.

“산업구조 조정기 과도기적 현상일 수도”
 작년부터 가속화되고 있는 기업의 부도를 산업구조 조정기의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섬유 봉제 등 노동집약적 저부가가치 산업이 무더기로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립대 姜哲圭 교수는 “최근의 부도사태는 선거로 인해 기업자금이 제대로 흐르지 못하는 데다 우리 경제가 산업구조 조정기에 처해 빚어지는 결과가 아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진단한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은 오일쇼크를 맞았을 때 에너지 다소비형 산업인 중화학공업을 중진국에 넘기는 등 구조조정을 이루었다. 강교수는 “우리의 경우 경쟁력 상실이 산업구조조정을 가속화하는 것 같다”면서 “벌써 왔어야 할 조정기가 늦게 왔다”고 지적한다. 3저호황을 맞았을 때 기술개발에 투자하는 등 구조조정을 해야 했는데, 시설만 확장해놓아 호황이 사라지자 시설은 넘쳐나지만 수출은 안되고 임금은 마구 올라 채산성이 더욱 악화됐다는 것이다.

 요즘의 부도사태가 산업구조 조정기의 과도적 현상이라면 우리 경제의 체질강화를 위해 피할 수 없는 시련이랄 수 있다. 지금의 진통을 거친 뒤 건실한 산업구조를 갖춰 경쟁력을 되찾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지만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지금이 과도기라면 그 뒤에 경쟁력이 살아날 기미가 보여야 한다. 그러나 그같은 전망이 보이지 않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李永綠 산업부장은 기술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구조조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우려하고 있다. 기술개발에는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정부는 금융 · 세제상의 혜택을 주어 기업에 기술개발 의욕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부는 최근 중소기업 지원확대 방안을 내놓고 있다. 재무부는 상반기중 2천5백억원 안팎의 자금을 지원하고 금리 하향안정화를 유도하는 한편 경쟁력을 있으나 일시적으로 자금난을 격고 있는 기업을 발굴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상공부도 제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생산기술 개발에 1천8백억원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계에서는 총선 이후를 크게 걱정하고 있다. 4월 위기설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다. 선거 때 풀린 돈을 환수하는 과정에서 기업의 자금사정이 더 악화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기업을 죽이면서까지 통화긴축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는 측도 있지만 총선 뒤에는 또다른 복병이 있다. 12월결산법인들이 법인세를 내야 하는 등 기업의 자금압박 요인이 도사리고 있다. 부도의 행렬은 좀처럼 멈출 조짐이 안보인다. 문제는 지금의 부도사태가 중소 제조업종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산업기반은 지금 뿌리채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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