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전쟁 포기 개방 신시대 연다
  •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7.07.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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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편이 너무 잦으면 본 무대가 썰렁해진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기자 회견 역시 예외가 아니다. '미족을 향한 충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고편에서 상영된 '북한의 전쟁 도발 위험성'을 입증할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자기가 망명한 지난 2월 이후 북한 권력 핵심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었을 그는, 마치 흘러간 옛노래를 리바이벌하는 퇴역 가수처럼 보이기조차 했다. 최근의 권력 동향 얘기가 아니더라도, 국내의 북한 전문가들 중에는 "그가 얘기하는 수준의 전쟁위기론이 남북 관계50년 동안 한 번이라도 없었던 적이 있는가"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많다. 더군다나 북한 핵심부 동향을 계속 주목해온 주변국 정부는 그의 '충정'에 냉소로 화답했다. 이같은 현격한 인식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개방확대론자들, 권력 대세 장악
최근 북경과 워싱턴 등지에서 북한의 권력 핵심부 인사들을 접촉한 서방 소식통들의 발언을 접하면 이런 의문에 대한 실마리가 잡힌다. 이들에 따르면, 현재 북한 권력 핵심음 황씨의 증언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소식통들은 현재 북한 권력의 대세를 전쟁론자들이 아니라 개방확대론자들이 장악했다며 황씨의 증언을 일축했다. 황씨의 증언대로 전쟁준비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 내용이 다를 뿐 아니라, 이미 지난 6월을 기점으로 개방확대론자들이 대세를 답음으로써 내부 논쟁이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일서 3주시 탈상 이후 본격 출범한 김정일 시대는 황씨의 발언과 같은 '전쟁 준비 가속화'가 아니라, '개방 확대에 따른 대폭적인 변화'양상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얼마전 북한을 다녀온 조선족 사업가들 중에는 '현재 평양에서는 정책 전환과 관련한 중대 발표설이 나돌고 있다'고 전하는 사람도 있다. 김정일 승계를 전후 해 개방 확대 정책이 대외에 천명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개방확대론이 대세를 장악했다는 소식은 그동안 북한 관련 정보가 간접 방식으로 유통되어 온 것에 비해, 서방 소식통들이 직접 북한 고위층과 면담하면서 확인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매우 높다. 이들은 또한 그 정황을 구체적으로 전하기도 했다. 득 지나나해 말과 올해 초 북한에서는 당·정·군 핵심에 대한 대규모 인사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김정일의 권력은 당에서 새롭게 떠오른 당료 그룹과 세대교체를 통해 올라온 군부 실세 그룹이라는 두 축으로 구축되었다. 당의 신 실세 그룹은 나이로 볼때 실무자급이 40대, 책임자급이 50대 초반을 넘지 않는다. 이들은 광북 이후 세대라는 자부심과 탁월한 국제 감각, 개방 지향적 성향이 특징이다. 북한을 위기에서 구출할 세력은 자기들밖에 없다는 강한 긍지도 가지고 있다. 반면 군부의 신 실세 그룹은 체제 혼란기에 사회통제 세력으로 전면에 나타났다. 따라서 양 세력은 개방 확대론과 신중론이라는 이질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외 경제 정책 연구원 조명철 박사(전 김일성 대학교수)는 "북한에서 군은 당의 영도에 따르는 종속 변수다"라고 지적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군부의 위장 강화 역시 '당의 영도 중심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이 다의 영도 중심은 김정일 승계 시기가 다가옴에 따라 또 한번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군사 통치라는 비정상적 과도기 상황을 청산하고 정상적 국가 체제로 전환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두 가지 쟁점이 발생했다.

하나는 그동안의 사기 진작에 의해 발언권이 한껏 강화된 군부를 어떤 방법으로 '원위치'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다. 특히 당의 실세 그룹이 지난 3,4월 이후 통치술의 일환으로 확산시켜 온 6,7월 또는 7,8월 '전쟁위기설'을 어떻게 무마하고 국면을 전환할 것인가가 큰 숙제였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 없이 국면 전환을 시도할 경우 군 상충부의 반발을 무마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또 하나의 쟁점은 개장 확대 문제였다. 북한 권력 핵심부가 나진·선봉이라는 기존 경제 특구 정책만으로는 경제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은 지난해 9월 잠수함 사건 이후부터였다. 7월에 행해진 김정우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위원장의 일본·홍콩 방문, 그리고 9월의 나진·선봉 국제 투자 세미나 때까지만 해도 일정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것은 9월 세미나에는 불참했지만 한국 기업은 어쩔 수 없이 나진·선봉으로 몰려들 수 밖에 없고, 이것을 발판으로 하여 해외 자본을 유치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개방 이익 분배 놓고 당·군 갈등 겪어
한국 기업의 투자 세미나 참가가 무산된 이후 북한이 이안 데이비스 유엔개발계획(UNDP)북경 사무소장 주선으로, 10월에 한국기업만을 위한 투자 세미나를 따로 준비하려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잠수함 사건이라는 돌발 변수가 발생함에 따라 10월 투자 포럼은 무산되었고, 결과적으로 한국 기업의 나진·선봉 진출 역시 당분간 기대하기 힘들게 되었다.

북한의 권력 핵심부가 나진·선봉 이외의 대안을 마련하는 일에 착수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지난해 10월께 북경에서 북한 고위층과 면담한 국내의 한 대북사업자는 그로부터 충격적인 제안을 받았다. "나진·선봉은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정무원을 중심으로 남포 개발 청사진을 작성 중이다. 투자 지역 변경을 신중히 검토해 보라"는 것이었다. 같은 시기에 북한은 재일 조총련에 원산항 개발 청사진을 의뢰했다.

북한 정무원이 올 1월 △남포·원산에 보세가공 구역을 설치하고 △경수로 예정지인 산포시를 개방 특구로 개발하며 △나진·선봉과 연동해 청진항을 개방하기로 하는 개방확대 방안을 작성해 당 중앙위에 보고했다는 소식이 지난 5월 중순께 동북 3성의 조선족 유력인사에 의해 확인된 바 있다. 당시 그는 전화 인터뷰에서 "당 중앙 위 심의 결과 취지에는 찬성이다. 그러나 시기와 절차 문제 등 세부 문제를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재일 동포 사업가들 역시 당 중앙위 심의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워 왔다. 지난 5월게 오사카의 한 교포 사업가 역시 "우리도 계속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원산·남포 개방이 확정되면 투자 희망자들을 모아 진출할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올해 1월에 보고 된 개방 확대 방안에 대해 당 중앙위가 몇 달이 지나도록 결론을 내지 못했던 것은 바로 당 실세 그룹과 군부 실세 그룹 간의 논쟁이 결론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방 소식통들에 따르면, 이런 내부 논쟁에서 당료그룹의 개방 확대론이 대세를 장악했다는 것이다. 군부의 반발 역시 개방이라는 대세를 반대한 데서 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개방 흐름 속에서 군부의 몫을 보장하라는 '이익 집단'으로 서의 요구가 강했다. 북한에서 군부는 단순한 무력 집단이 아니다. 무역회사와 농장 기업을 거느리고 '제2 경제 부문'을 담당하는 주체이다. 당이 부한 경제력의 45%(통치 영향력은 65%)를 차지한다면, 군부는 35%(정무원은 15%)를 차지하고 있다. 당·군 갈등의 핵심은 바로 개방에 따른 이익 분배 문제였던 것이다.

북한, 미국과의 장성급 접촉으로 군부 통제
당의 실세 그룹은 교묘한 방법으로 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최근 국내 언론에 불쑥 등장한 '미·북한 장성급 접촉설'의 배후 진상이다. 북한 군부로 하여금 미국과의 고위급 군사 채널을 담당하게 함으로써, 군부에 일정한 역할을 부여하고, 이 과정에서 나타날 경제저가 이권을 배분해주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금년  초부터 몇 차례 있었던 미·북한 접촉 과정에서 유독 유해 협상만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도 사실은 군부 채널을 열어두기 위한 배려였다.

또 최근 미국은 7월 20일~22일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할 레이니 전 주한 대사의 방북길에 샘 넌 전 상원군사위원장을 동행시키기로 했다. 샘 넌은 재임기간에 미국 군부의 입장을 반영해온 반북 보수 정객이다. 왜 미국 정부는 하필 탈상 축하 특사로 반북 성향의 인물을 보내기로 했으며, 북한은 왜 그의 방북을 허용했을까. 극과 극은 서로 통한다. 군부 입장을 대변하는 그같은 보수적 인물이야말로 북한 군부의 협상 파트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의 영도 중심은 미국 군부를 통해 북한 군부의 호전성을 통제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을 구사한 것이다.

서방 소식통들에 따르면, 최근 몇 달 사이에 진행된 당·군 역할 조정은 이처럼 평화적 방법만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다. 군부내 반 개방 세력 극비 숙청이라는 강압적 수단도 동원되었다. 금년만 해도 북한 군부에는 몇 차라ㅔ 인사 이동이 있었다. 국내 언론에는 승진자의 면면만 부각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개방 반대 세력 숙청이라는 극비 움직임이 병행되었다.

여기까지가 김일성 3주기 탈상을 앞두고 북한 권력핵심에서 당의 개방확대론자들이 대세를 장악해온 과정이다. 소식통들은 이같은 대세 장악 과정이 6월 초순께 끝났다고 한다. 바로 이 시기에 개방 확대 조처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즉 △나진·선봉 지대에 대한 11개 항의 개혁 확대 조처 △ 원산·남포에 대한 보세가공구역 설치 △유엔공업개발기구(UNIDO)에 보낸 외자 유치 희망서에서 평양·남포·사리원과 함남 이원군 등으로 유치지역을 확대하겠다고 결정한 일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유엔공업개발기구 한국사무소 신덕순 소장에 의하면, 북한은 7월 1일에도 25개 추가 프로젝트를 유엔공업개발기구에 통고했는데. 여기에도 평양에 2건, 김책시에 1건, 평안북도 용변군에 1건 등 나진·선봉 이외 징겨이 포함되어 있다. 외국 자본을 나진 ·선봉 지역에 한정해 받아들이겠다던 기존 입장이 획기적으로 변한 것이다.

개방확대론이 어떤 양상을 Elf 것인지는 아직 예측 부러 상황이다. 일부 전문가는 중국의 개혁·개방 과정에서 나타난 징후들이 이미 북한에 포착되고 있다고 진단하기도 한다.

당의 '보이지 않는 실세들'이 개방 정책의 최전선에 전진 배치되고 있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 대우경제연구소 이찬우 선임연구원은 "중국에서도 후위에 있던 당 실세들이 개방의 가속화 단계에서는 전면에 등장했었다"라고 지적한다. 조명철 박사는 "당이 전면에 나선다는 것은 국가의 총 역량이 집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북한 전역 개방하는 '빅뱅'가능성
국가 재정에 대해 15%의 영향력을 가진 정무원이 나진·선봉 특구를 주도했던 시기와, 재정 능력 45% 통치 영향력 65%인 당이 주도하는 시기는 비교 대상이 안되는 것이다. 기존 나진·선봉 특구는 지난 4월게 교체가 확정된 공진태·김문성 등 정무원 인사들이 담당하고, 새로 보세 구역으로 결정될 원산·남포 지역은 당의 실세들이 담당하는 이원 관리 시스템을 도입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나타나 '점·선·면 지역개발 전략'이 북한에서도 재현될 것이다. 즉 나진·선봉과 청진항, 신포와 원산, 그리고 원산과 남포를 잇는 현재의 전략이 점·선 전략이다. 그러나 현재 북한의 산업 상태는 어느 한 두군데 손을 대서는 회생시키기가 불가능하다. 당의 핵심부 역시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점에서 면(거점 조시 몇 개를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으로 가는 '전면 개방' 시나리오 역시 끈질기게 나돌고 있다. 이찬우 연구원은 이를 '빅뱅 시나리오'라고 부른다. 한 서방 소식통은 "북한이 어느날 , 전세계에 북한 전역을 개방하겠다고 폭탄 선언을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재계의 북한 실무자들은 또한 북한이 김책제철소나 원산항을 각각 러시아와 일본에 50년 이상 조차해 대리 개발하는 방식을 택할 가능서도 있다고 본다. 북한이 러시아·일본과 깊숙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중국이 홍콩을 대리 개발토록 해 재미를 본 사례를 북한도 눈여겨 본 것이다. 70년대에 한국이 건설 인력을 해외에 보내 외화 획득에 나섰던 것처럼 북한 역시 노동 인력 대규모 해외 송출을 검토하고 있다. 얼마전 대만 정부가 북한 노동 인력을 수입하겠다고 발표한 것은 그 일부분이 드러난 것이다.

조선족 유력 인사는 "현재 평양 시내에 외화 상점이 수십군데 있고, 평양 시민의 4분의 1이 이를 이용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개방 초기와 비교해도 상상을 초월할 변화이다"라고 지적했다. 앞으로 전개될 북한의 개방 확대 조처와 아를 둘러싼 주변 국가의 발 빠른 대응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형태로 진행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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