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족보’ 뜯어고쳐 조선 왕조 죽였다
  •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7.08.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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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왕족 격하·혈통 끊기 통해 ‘왕실 해체’



일제의 식민 통치 실상과 그들이 왜곡한 역사는 광복 50년을 경과하면서 상당부분 밝혀지고 바로잡혔다. 그러나 개국이래 5백 여 년간 지탱한 조선의 군주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소멸했는지는 지금까지 소상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정문연)이 연구원 산하 장서각에 소장된 대한제국 왕실 족보등 관련 자료를 면밀히 분석해 조선 왕실이 헤체된 전모를 밝힌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정문연은 진정한 과거 청산을 이루자는 뜻에서 관련 자료를<시사저널>에 공개했다. <일제하 이왕직과 이왕가 족보>등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일제는 그동안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조선 왕실을 흡수·해체했다. <시사저널>은 일제가 무단 개작하고 왜곡한 조선 왕실 족보의 실물을 국내 언론 최초로 공개한다.<편집자>

을사조약(1905년)과 한·일협약(일명 정미조약·1907년)을 맺어 조선 왕실로부터 대한제국의 외교권과 내정권을 빼앗은 일제는 마침내 1910년 국권을 완전히 강탈하는 한·일병탕을 강행했다. 1910년 8월 22일, 매국노 이완용과 당시 조선 통감 테라우치 마사타케가 서명·날인한 이 조약은 놀랍게도 정식 명칭이 없었으며(일본은 훗날 일·한병합조약이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조약 체결에 따르는 비준 절차가 생략되었고, 비준서를 대신할 순종 황제의 조서마저 일본이 날조한 불법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불법 조약’에 의해 5백년 동안 존속해온 조선 왕실이 소멸했다. 일본이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 왕실을 해체해야만 했다. 일제는 조선 왕실을 해체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움직였을까.

천황의 5세손으로 대접답은 고종 · 순종
이태진 교수(서울대·국사학)에 따르면, 일제는 변탄 전부터 이에 대한 복안을 갖고 있었다. 통감 테라우치가 마련한 것으로 보이는 이 복안의 주요 내용은 대한제국(조선) 황제(병탄 당시에는 순종)를 태공전하(太空殿下)로, 황태자를 공전하(公殿下)로 바꾸어 일본 와이족의 예우를 받게 하고, 그밖의 다른 왕족에게는 공작·후작·백작 작위를 내린다는 것이었다. 병탄 교섭의 한국 측 상대자였던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의 데라우치가 제시한 복안에 대해 ‘백성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이 크므로 국호를 존속시키고, 황제는 왕으로 개칭하자’는 수정안을 내놓았다. 통강부측은 이를 받아 들였다. 그러나 통감부의 원안이건 이완용의 수정안이건 본질은 같았다. 겉으로는 조선 왕실의 존재를 인정하는 체했지만 실제로는 조선 왕실의 지위를 한 단계 격하시켜 궁극적으로 일본 황실에 편입한다는 내용이었다.

정문연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조선 왕실을 격하하고 일본 황실에 흡수·통합하는 작업은 병탄과 동시에 바로 착수되었다. 1910년 8월 29일 합병이 공식 발표되던 날 일본 천황은 조선 왕족 예우에 관한 조서를 내렸다. 일제가 편찬한 <순종실록> 부록에 실린 일본 황제 조서의 주요 내용은 활제 체제인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 천황가의 하부 단위인 왕·공급(級)으로 편성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德壽宮 李太王)이라는 dqhd작을 받았다. 합병 당시 황제이던 순종은 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여기서 고종과 순종에게 부여된 ‘태왕’ 또는 ‘왕’이라는 호칭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왕이라함은 일반적으로 ‘절대군주’를 일컫는 용어이지만, 일제가 부여한 왕은 이와 달리 일본 천황가 봉작제 단위의 하나에 불과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확립한 일본 천황가 봉작제에 따르면, 일본의 왕은 천황, 황의 부인은 황후, 세자는 태자, 태자의 부인은 태자비라는 작위를 얻는다. 또 태자부부사이에서 난 아들들에게는 친황(親王)이라는 이름이 붙으며, 왕이라는 칭호는 천황의 5세손 이하에게 주어지는 작위였다(<표2>참조). 결국 고종과 순종은 일본 천황가에서 천황의 ‘5세손 이하 왕족’ 대접을 받은 것이다.

고종·순종이 왕 작위를 받은 외에, 고종의 형제와 순종의 형제들은 공(公)이하 작위를 받았다. 예컨대, 순종의 동생인 의왕 이 강과, 공종의 형인 이 희에게는 공작 작위가 수여되었다. 이밖의 다른 인물에 대해서도 후작·백작·자작·남작 작위가 돌아갔다(<표1>참조).

조선 왕족 격하 작업은 곧바로 왕실 권한 축소로 이어졌다. 예컨대 조선이 독립국이었을 때 왕은 왕실의 인사권과 예산 편성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합병 이후 순종은 왕실 인사와 예산 편성 권한을 전혀 가질 수 없었다. 합병 이후 왕실 업무를 담당하던 기관인 이왕직(李王職) 직원 임명이나 상벌은 일본 궁내부 대신 소관이었으며, 조선총독부의 감독을 받았다. 또 일본 황실로부터 ‘이왕가(李王家)’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조선 왕실에 관한 일체의 사항은 이왕직을 통해 일본 궁내부에 보고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일본 천황의 통솔 아래 놓이게 되었다.

왕실 규모, 병탕 이후 5분의 1로 줄어
왕실 규모와 기능도 대폭 축소되었다. 정문연의 설명에 따르면, 1894년 이전 조선 왕실은 승정원·사옹원·경연청·규장각·내수사를 비롯해 모두 26개 기관이 넘는 방대한 규모였지만, 1910년 이왕직 직제에서는 5개 부서로 크게 줄었다.

이왕직 설치와 관제는 1910년 12월 30일 발표된 ‘황실령 제34호’에 의해 재가되었다. 이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되고, 대한제국 왕실을 일본 천황가의 하부 단위로 편입한 지 꼭 4개월만의 일이었다. 이왕직은 겉으로는 대한제국 왕실 업무를 담당했던 궁내부를 대신하여 왕실 업무를 처리하는 기관이었지만, 실제로는 왕실 사람들의 출생·혼인·사망과 그밖의 주요 사무를 관장하고, 왕족의 인적 사항을 관리·보관함으로써 조선 왕실을 통제·관리하고 더 나아가 조선 왕실 해체를 가속화하는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이번에 정문연이 그 전모를 밝힌 조선 왕실 족보 개작 작업도 이왕직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일제 시대 조선 왕실 족보, 이른바 ‘이왕가 족보’를 면밀하게 분석한 정문연 신명호 선임연구원에 따르면, 이왕직이 족보 개작 사업을 벌이게 된 것은 다음 세 가지 필요 때문이었다.

첫째는, 합병 직후 격하한 조선 왕실의 지위에 맞게 족보를 뜯어고쳐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둘째, 일제는 덕혜 옹주와 의친왕의 맏아들 이 건 등이 일본인과 결혼 한 사실을 족보에 기재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 일제는 순종이 사망한 뒤 순종의 ‘왕’ 작위를 이어받은 영친왕이 1920년 일본 황가의 자손인 이방자씨와 결혼함으로써 이방자씨를 조선 왕실의 호적에 하루 속히 입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 왕실 족보 개작 작업이 순종이 사망해 3년상이 끝난 해인 1929년에서야 비로소 시작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조선 왕실, 이른바 ‘구황실’ 족보를 개작하는 사업은 일제가 조선을 합병한 지 꼭 10년째가 되는 1929년 이왕직에 의해 착수되었다. 그 이후 1933년에서야 비로소 일단락된 왕실 족보 개작을 통해 이왕직은 조선 왕실의 대표적인 족보인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과 역대 왕비의 족보인 <열성왕후왕비세보(列星王后王妃細報)>를 개작하는 외에, 새로 <왕족보(王族譜)>를 만들었다.

일제는 이같은 작업을 위해 1908년 조선조 최후로 작성된 <선원계보기략>을 분해하여 이를 저본으로 개작 내용을 추가하는 한편, 족보 편찬 사업을 위해 이왕직 주전과(主殿課) 안에 따로 임시편찬계를 설치했다. 이왕직의 족보 개작 사업이 일본 궁내부의 지휘를 받았음은 물론이며, 한국내 최고 책임자인 이왕직 장관은 1932년 7월 한국인 한창수에서 일본인 노시다 치사쿠로 바뀌었다.

이보다 앞서 이왕직은 1932년 6월 ‘선원계보기략 국조어첩 황후왕비세보 수정에 관한 건‘을 기안하여 일본 궁내부의 담당자 수즈키 시게타카에게 보냈는데, 구황실 족보에 명기된 ’태황 ‘황제 폐하’라는 글자를 모두 삭제하고 이를 모두 고종·순종으로 바꾸는 등 호칭이나 경칭엥 관한 지침과 기준을 마련한다는 것이 주요내용이다. 이렇게 족보를 개작한 주요 목적은 역시 조선 왕실 해체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일제는 순종 족보(<이왕족보>)를 새로 만들면서 ‘명치 43년 8월 29일 한국 병합을 맞아 (일본 천황의) 칙지에 의해 창덕궁 이왕의 칭호를 받았다···’고 하여 불법적인 한·일변탕을 합법화하고, 조선 왕실이 일본 황실에 예속되었음을 명백하게 기록했다.

일제는 이와 아울러 조선 왕실의 주요 인사를 일본에 볼모로 보내거나, 일본 황족 또는 귀족과 혼인시켜 조선 왕실의 명맥을 끊는 작업도 끊임없이 추진했다. 1926년 순종이 사망함에 따라 ‘왕’작위를 계승한 영친왕 이 은씨를 일본에 보내 천황가 나시모도노미야 모리마사왕의 장녀 방자(方子·일본 이름 마사코)와 1920년 결혼시킨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토 히로부미의 손에 이끌려 열한 살에 일본에 간 영친왕은 일본에 건너간 지 56년만인 63년에야 가까스로 환국했다.

일제 강압에 집요하게 저항한 왕족
이 밖에도 일제가 정략 결혼을 시켜 조선 왕실의 맥을 끊으려고 노력했던 일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1930년 고종의 딸 덕혜 옹주는 도쿄 화족 출신인 소 타게시와 화촉을 밝혔다. 1931년 의친왕 이 강의 장남 이 건(훗날 이 강의 공 작위를 이어받음)은 일본인 히로하시 세이코와 혼인했다. 일제가 만든 이 건의 <공족보>에 기재된 내용에 따르면, 건의 아내가 된 히로하시 세이코는 당시 일본해군 대좌 마쓰다이라쓰키나카의 딸이었다.

이처럼 조선 왕실 해체 작업은 크게 이왕직을 통해 왕실 축소와 정략 결혼을 통한 혈통 끊기를 두 축으로 합병 직후부터 광복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일제의 이런 작업이 늘 순탄하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의친황의 둘째 아들 이 우를 일본인과 결혼시키려다가 실패한 사건은 그 가운데 대표적이다.

의친왕의 딸 해경씨(미국 거주)의 최근 증언에 따르면, 이 우는 1922년 일본에 끌려가 비록 일본식 교육을 강요받았고 일본 육사를 졸업하여 일본군대에 들어갔지만 평소에도 의도적으로 한국말을 골라 쓰는 발골 기질이 강한 청년이었다. 그의 반골 기질이 자기네에 직접 저항으로 번질 것을 우려한 일제는 이를 차단하기 위해 이 우를 정략 결혼시키려고 했지만, 이를 눈치 챈 의친왕은 ‘우는 이미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와 약혼한 사이다’라는 소문을 펴뜨려 이를 좌절시켰다. 박영효와 짜고 이른바 ‘위장 약혼설’을 꾸며내 일본인과의 결혼을 막았다는 것이다.

최근 나온 연구 성과들은 조선 왕실이 비록 소극적이고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알려졌던 것보다는 더 광범위하고 집요하게 일제의 강압에 저항했음을 보여준다. 한 예로 김기섭 교수(서울대·교육학)는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 소장된 자료를 토대로, 고종이 1905년부터 약 2년동안 을사조약을 무효화하려고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 상이 외교 관계를 맺고 있던 나라에 친서를 보내는 등 광범위한 외교 노력을 기울였음을 입증했다. 고종이 강제 퇴위한 뒤 왕위에 오른 순종 역시 비록 소극적이었지만, 합병 조약의 효력을 부인하기 위해 조약 비준용 조서에 자필 서명을 거부하는 등의 방법으로 일제에 저항했다는 사실도 서울대 이태진 교수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

일제의 ‘왕실 왜곡’ 바로잡아야
고종 · 순종 · 의친왕 등 조선 왕실의 주요 인물들이 국권 수호 차원에서 이같이 저항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쓰러져 가는 왕실과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저항했는지는 학계에서도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합병 시기 조선 왕실의 역할에 대해 비판적인 연구자들은 “왕실의 저항이 독립운동 내지 국권 수호 운동으로 평가받으려면 이미 을사조약때 왕실로부터 어떤 결단이 나왔어야 했다”라고 주장한다. 또 일부 학자들은 “조선 왕실은 일제의 회유·포섭에 말려 국가는커녕 왕실의 명맥을 잇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라고 더 인색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반면 학계 일각에서는 그간의 조선 왕실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주로 일제가 식민 지배할 필요성으로 은폐·외곡한 탓이 크므로 이번 기회에 긍정적인 측면을 집중 조명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조선 왕실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나오든 간과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이번 정문연 연구 결과에서 드러났듯, 일제 식민 지배의 잔흔은, 조선 왕조가 수대에 걸쳐 신성하게 여겨 왕이 직접 수정 작업을 진행하고, 왕실도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하며 애지중지했던 족보에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경복궁 마당에 세웠던 조선총독부 건물은 헐렸으나, 정문연 장서각에서 번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이른바 ‘이왕가 족보’에는 아직도 일제 때 족보 개작을 주도한 일본인의 자필 서명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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